텍스트의 포도밭 - 읽기에 관한 대담하고 근원적인 통찰
이반 일리치 지음, 정영목 옮김 / 현암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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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문해 인구층을 확대한 영향이야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에 언급될 만큼 막대하다. 그런데 인쇄가 시작되기 3세기 전에 '책읽기'라는 행위의 의미가 변한 시점을 일리치 이전에 관심을 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보이는 기술 발전은 알아채기 쉬우나 보이지 않는 변화는 통찰하기 어렵다. 읽기가 낭독에서 묵독으로 의미가 변하거나, 알파벳을 라틴어가 아니라 토속어를 표현할 도구로 활용하는 등의 사건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탐구 주제로 삼을 생각조차 못할지도 모른다.

  이 책은 중세 수도사인 후고가 쓴 『디다스칼리콘』이란 독서 가이드의 해설서이긴 한데 이론연구서라기 보다는 '읽다'란 표현이 내포한 의미가 어떻게 변했는지를 살펴보는 주요 근거로써 지금의 독서 행위를 성찰하자는 목적이 크다. incipit니 cogitatio, artes 등의 생소한 라틴어를 학습하는 즐거움도 있겠으나, 텍스트가 페이지에서부터 분리되면서 만들어낸, '책'에 대한 인식이 바뀌는 순간을 포착하는 기쁨이 더 크다. 지금껏 책읽기에 익숙해진 독자라면 12세기의 '책'이란 경외감으로 받들어야 하는 성물이란 사실에, 수사들이 중얼중얼대며 함께 소리내는 신체활동인 '읽기'에 어리둥절할 법하다.

  심지어 '쓰기'란 저자의 말이나 구술을 기록하는 바를 의미하지 저자의 생각과 사고 체계를 정돈한 지식과 정보의 집합체가 아니었다. '읽기'는 귀를 위시한 '청각'에 집중한 활동이었는데 장 제목, 색인, 종이, 문단, 띄어쓰기가 도입되며 눈으로 보는 '시각'활동으로 전환된 것이다. 저자가 수도사들의 '읽기'를 악보에 비유한 바는 그래서 적절하다.

조선시대 서당에서 훈장이 천자문을 읽어 준 후 학동들이 낭독해 암송하는 방법이 주를 이루었던 사실을 보면 '읽기'는 소리를 내는 감각기관 활동이 먼저지 이해, 숙지, 기억을 되새기는 정신활동은 부속이나 다름없었다.

  책읽기란 입으로 맛보고 기억의 궁전에 새겨넣어 묵상으로 되새기며 음미하는 전방위적인 행위고, 수사에게는 경건한 영적 활동의 일환으로 신이라는 '지혜'에 다가가는 기도 행위다. 책뿐만 아니라 SNS, 뉴스미디어, 잡지기사, 영화, 드라마 등 쏟아지는 정보를 숙고할 필요가 없는 현대인에게 12세기의 책읽기는 기괴하기 이를데 없다. 그러나 '읽기' 몰입감으로 삶에 변혁을 꾀하는 그들의 삶의 방식에 비춰 지금의 '읽기'가 어느 선상에 있는지 내 읽기는 어느 축에 기울어 있는지를 곱씹을 여지는 충분하다 본다.

  전체 335 p. 분량에 196 p.부터 주석과 참고문헌으로 빼곡하다. '주석이 이 자리에 있는 것은 한 삶이 어떤 구역을 자주 걸으며 주워 모았고, 이제 그 풍부한 기념물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이 생겼기 때문이'라는 소박한 이유치고, 부지런히 자료를 끌어 모은 정성에 그의 책을 수사식으로 읽는 흉내는 해야하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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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어둠의 속도
엘리자베스 문 지음, 정소연 옮김 / 푸른숲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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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폐인 루의 시선과 감각, 사유에 스며들며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끊임없이 질문한다. 정상인이지만 범죄자이므로 머리에 칩을 이식해야 하는 돈과 비정상인이지만 정상인처럼 필사적으로 사는 루. 개정판이 출간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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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만 나면 인생그림책 21
이순옥 지음 / 길벗어린이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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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만 나면 고개를 디밀고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애쓰는 생명에 어쩜 그리 눈물이 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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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 쇼펜하우어 아포리즘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지음, 김욱 옮김 / 포레스트북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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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 문장, 문단에 머무르는 시간이 점차 길어진다. 쇼펜하우어의 글 여기저기에서 발췌한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고, 현대인들이 부족한 여유시간을 짧게나마 누릴 수 있게 만들어진 잠언 모음집인데, 하. 글뿐 아니라 자신의 삶도 곱씹느라 머리가 바쁘다. 그의 글이 현실적이고 현대적이라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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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슬픔이여 안녕 (개정판) 클래식 라이브러리 1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김남주 옮김 / arte(아르테)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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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청소년 성장소설의 원형. 열일곱의 ‘세실‘은 성숙한 어른인 ‘안‘에게 한껏 매혹당하지만, 그녀가 아버지와의 결혼으로 자신의 삶 속에 깊숙이 들어오자 자신을 자신답지 못하게 하리란 불안감에 그녀를 파멸케 한다. 그 후 ‘슬픔‘에게 인사할 수 있는 성숙된 내면을 갖춘 건 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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