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울프의 파도

그때그때의 운명과 우연에 따라, 여행과 체류 계획에 따라 각 서재의 책들을 재배치하는 일에 그는 열정을 쏟아부었다. 그는 자동차 트렁크에 커다란 여행가방을 싣고 한 서재에서 다른 서재로 떠난다. 어디로 떠나는 여행가방에는 다른 물건은 거의 없이 오직 책이 가득하다. 그의 여행가방은 그 자체로 작은 도서관이다. 명목상으로는 여행중에 읽게될책들, 하지만 대부분은 읽는다는 직접적인 필요보다 여행지인 장소에 어울린다고, 그러므로 반드시 동행해야 한다고 느끼는 책들이다. 그 책들은 그곳에 있어야만 하기 때문에 그곳으로 떠나는 것이다. 자신이 갈 여행지에 머문 적이 있는 작가들의 작품, 그곳에서 작업했다고 알려진 책들, 그리고 그 작가들의 인터뷰 필름, 오슨 웰스가 그 장소에서 찍은 영화, 지금과는 다른 시대의 예술과 문학과 작가와 영화, 그리고 그런 책과 영화에 관한, 그들의 시대에 관한다른 저자들의 책들……… 그의 여행가방은 그 어떤 경우라도절대로 ‘충분히 클 수가 없다. 헌책방에서 마음에 드는 책을발견할 경우, 그 책을 이미 갖고 있다 할지라도 또다시 구입하는 데 그는 주저함이 없다.  - P11

베를린 서가의 주인은 헌책방이 아닌 대형 서점은 거의 출입하지 않는데, 일단 책값이 비싸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지만근본적으로는 신간 베스트셀러, 이런저런 화제성이 큰 책들이 주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는 시간대의 지층이 없이 오직 리얼타임의 사물들만이 가치를 갖는다.
그리고 놀라운 속도로 쇄신된다. 우리는 산책길에 서점 진열장에 전시된 시대의 영혼을 구경한다. 그리고 산책을 계속한다. 신간을 사야 할 경우 그는 동네의 단골 책방에서 주문을한다. 나는 언젠가 그에게 킨들을 선물해주었는데, 전자책이도서관을 통째로 들고 다니는 고난의 여행에서 그를 해방시켜주리라고 착각했던 것이다. 그는 킨들을 활용하긴 했으나 여행가방 속 내용물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여행가방 가득히 자신의 시대를 기꺼이 짊어지고 간다. - P12

그는 일생 동안 많은 책을 읽었고 그보다 더 많은 것을 경험했으며 그것들 모두를 기억 속에 단단히 간직한 사람이었다.  - P59

질문이 있었다. 행복한가?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그러자다음 질문. 지금 이 순간에 계속 머물기를 원하는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풀들이 많이 자라나 길이 보이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길과길 아닌 곳을 구분하지 않고 걸었다. 아지랑이같이 반짝이는풀벌레들이 주변을 날아다녔다. 도중에 들판이 보이는 벤치에앉아 책을 읽었다. 최근 나는 작별』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나는 작별들에 대해서 말한다. - P70

동시에 어떤 기억이 함께 불처럼 솟아올랐다. 나는 소스라치며 뒷걸음쳤다. 오래전 어느 날 당신으로부터 온 편지……… 그 순간 문득 작별은 사랑과 마찬가지로특정 시기에만 국한된 개별 사건이 아니라, 삶의 시간 내내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비밀의 의례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일생은 그것을 위해 바쳐진 제물이었다. - P82

 나는 손가락 끝으로 그것을 집어올린다. 평화와 고요. 오직 빛과 호흡만이 있는 순간. 지금 당신이불타고 있다는 증거인가? 글쓰기는 작별이 저절로 발화되는현장이다.  -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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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IRD는 상대적으로 자신의 친구와 가족, 같은 종족, 지역사회를 편애하지 않는다. 그들은 족벌주의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며, 맥락과 현실성, 관계와 편의보다 추상적 원칙에 집착한다.
감정적으로 볼 때, WEIRD는 그들이 속한 문화에서 장려되지만 대개자신이 세운 기준과 열망에 맞게 살지 못하면 죄책감에 시달린다. 대다수 비WEIRD 사회에서는 죄책감이 아닌) 수치심이 사람들의 삶을 지배한다. 사람들은 자신이나 친척, 심지어 친구들이 공동체에서 그들에게부과하는 기준에 따라 살지 못할 때 수치심을 느낀다. 가령, 비WEIRD들은 자신의 딸이 사회적 연결망 바깥에 있는 사람과 눈이 맞아 도망을 가면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체면을 잃었다‘라고 생각한다. 한편WEIRD들은 헬스장에 가는 대신 낮잠을 자면 죄책감을 느낀다. 헬스장에 가는 게 의무가 아니고 아무도 그들이 헬스장에 가는지 모른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 P46

적, 사회적 영향을 가져온다. 다시 말해, 사람들의 뇌를 바꾸는 것이다.
즉각적인 경제적 효과는 작거나 약간 긍정적일지라도 뒤이어 정치적,
사회적 연쇄 효과를 낳을 심리적 변화를 고찰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심리가 미래에 문화적으로나, 수천 년에 걸쳐 유전적으로 계속 진화할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많은 사회에서 다양한 새로운 기술이 우리의 기억을 증강하고, 인지 능력을 형성하고, 우리의 개인적 관계와 결혼 양상을 재조정하는 중이다. 그와 동시에 양성평등의 수준과 교육 수준이 높아지면서 우리의 가족이 재조직화 및 축소되고 있다. 로봇과 인공지능이 점차 우리의 육체노동과 가장 힘든 인지업무의 다수를 대신하고 있다. 전자상거래가 늘어나고 금융 거래 보안이 강화되면서 평판을 철저하게 관리할 필요성이 줄어들고, 낯선 사람을 신뢰하고 협동하려는 우리의 내면화된 동기가 약해질지 모른다. 이런 신세계를 마주하면서 우리의 마음이 계속 적응하고 변화할 것임은의심의 여지가 없다. 미래에 우리는 다르게 생각하고, 느끼고, 지각하고,
도덕적으로 판단할 것이며, 세번째 밀레니엄의 여명기에 살았던 이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하려고 애쓸 것이다.
- P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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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함을 감수하고서도, 마치 공공의 보험처럼, 장애인 왕진을 가는 의사가 동네가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동네 주민들은 받아들이고 있었다. 당장 자기가 그 왕진의 혜택을 입지 않아도, 누구라도 장애를 가지게 될 수 있고 누구라도 나이 들고 약해질 수 있다는 걸 알기에.

이렇게 가면 동네가 더 잘 보인다. 얼마나 가파른 오르막을 걸어야 집에 도착할 수 있는지도 보고, 집까지 가는 길에 싱싱한 식재료와 생필품을 구할 곳이 마땅히 있는지도 본다. 집에 도착해서는 고혈압·당뇨 교육도 하고, 무좀 상태도 본다.

방 안의 가구 배치도 본다. 방에 볕과 바람이 잘 들어오는지 확인한다.
왕진 가방을 들고 길을 나서면, 진료실이 거리로 무한히 확장되는 느낌에 빠진다.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주중에 이렇게 여유 있게 동네를 거니는 의사도 없을 거라며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 가방을 들면 나는 코스튬을 입고 변장한 히어로가 되어 동네를 누비는 것 같아 가슴이 뻐근해진다.

이 민망하면서도 은근히 맛있었던 하루를 친구들에게 얘기했다. 친구들은 부끄러운 듯 즐거운 듯 웃어주었다. 얼마 후 그 친구들이 우리 집 근처로 이사 오게 되었을 때, 자기들 집 욕실 인테리어를 하며 욕조를 넣었다는 얘기를 해주었다. 몸을 담그고 목욕하고 싶으면 언제든 부담 없이 오라는 말과 함께.

할머니는 아픈 와중에도 증손주를 위해 성냥개비에 찔리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그 옛날 햇살이 잘 드는 방 금침 위에서 죽음을 향해 한 발씩 다가가고 있으면서도, 증손주의 병원놀이에 기꺼이 한몫 참여하셨던 내 증조할머니가, 연분홍색 꽃반지 위에 겹쳐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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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할머니의 삶에 대해 할머니 본인만큼 잘 알지는 못하고, 진료실에 오기 전에도 진료실을 나간 후에도 할머니의 삶은 계속된다

오늘도 진료실의 문이 열린다. 한 사람이 들어온다. 그 사람의 가장 아프고 힘든 시간이 걸어 들어온다. 나는 그 시간에 공명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트랜스젠더는 정신 질환의 세계적인 진단 기준이 되는 미국정신의학회의 진단및통계편람 최신판에서 이미 삭제되었다. 대신 법적으로 지정된 성별과 자기 스스로가 그러하다고 생각하는 성별이 다른 데서 오는 ‘위화감’을 줄여, 좀 더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의학의 역할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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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반복한 것은 그때 그들이 그곳에 있었다면이 아니라 그때 그곳에 누군가 있었다는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미국이 자신들의 책임을 인정하는 미래를 연습하였을지는 알 수 없었다. 불을 붙인 이후의 시간을 미래라 생각하였을지도 알 수 없었다. 아마도 그들은 그런 미래를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어땠을지는 알 수 없지만 끝을 내고 매듭을 지어버리는 일, 다음을 생각하지 않는 일이 필요할 때가 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왜인지 그들이 새로운 세계를 스스로 믿고 살아내어 미래를 현재로 끌어당겨 반복하여왔을 것이라는 짐작은 계속되었다.

종교를 가진다는 것은 미래를 연습하는 훈련을 거치겠다는 것과 아주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그것은 미래를 누구보다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각오일 것이다. 그들이 손으로 만지고 반복한 미래는 어떤 것이었을지 다시 생각하다가 그것을 묻고 되묻고 답하고 다시 묻는다면 끌어온 미래도 이미 일어난 과거로 혹은 지금 살아가는 현재로 믿을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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