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움가트너 (애나 일러스트 리커버)
폴 오스터 지음, 정영목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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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움가트너』의 바움가트너는 10년 전 아내를 잃은 일흔의 철학교수다. 그의 삶은 상실 이후 멈추지 않고, 다른 속도와 감각으로 이어진다. 그는 환지통을 앓고 있다. 이 통증은 이 소설에서 잃어버린 존재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감각에 가깝다. 안나는 부재하지만, 기억과 몸의 감각 속에서 계속 남아 있다.


『바움가트너』는 기억이 작동하는 방식에 주목한다. '왜 더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순간들은 사라지고, 우연히 마주친 장면들이 오래 남는지' 생각한다. 기억은 의도적으로 선택되지 않고, 예고 없이 찾아오는 것이다. 그것은 환지통처럼, 이미 없어진 것들이 여전히 현재를 건드리는 방식이지 않을까.


이 소설에서 상실은 고립으로 끝나지 않는다. 바움가트너는 다른 사람들과의 연결 속에서만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깊이 연결되었던 한 사람이 사라진 뒤에도, 그 관계의 흔적은 삶을 지탱한다. 『바움가트너』는 상실 이후에도 관계와 기억이 남긴 감각 속에서 시간이 계속된다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말해주는 것 같다. 


기억이 하는 일이 있다면, 사라졌음에도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비의지적 기억’에 의해 증명하는 일이 아닐까? 기억은 예고 없이 도착해 현재의 감각을 흔든다. 아무 의미 없었던 장면들도 우연에 의해 소환되고, 그것은 또 다른 것과 연결된다. 떠난 사람과, 지나간 시간과, 지금의 나를 느슨하게 이어 붙이며 삶이 완전히 끊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매 순간 기억하게 한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서 읽고 쓴 솔직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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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그녀의 것
김혜진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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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진의 『오직 그녀의 것』은 한 편집자의 일과 삶, 그리고 읽기에 관한 이야기다. 주인공 석주는 젊은 시절부터 삶을 개척하거나 쟁취하기보다 “주어진 몫을 수용하며 감당하는 방식으로 삶에 순종했던”(p.29) 인물이다. 그녀에게 일은 투쟁의 현장이 아니라 인내의 자리였고, 열정은 불타는 감정이 아니라 “가만히 길들이는 방식으로”(p.87) 자기 자신을 닦아가는 과정이었다.


그녀가 말하는 ‘일’의 세계는 반복과 수정, 타인의 판단과 마감이 얽힌, 감정의 여지가 점점 희미해지는 곳이다. 나는 그 세계가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일과 감정, 열정과 체념, 인간과 체계 사이의 균형을 잡으려 애써왔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건 감정을 덜어내는 법을 배우는 일이며, 그 과정에서 자신이 점점 무뎌져가는 것을 감당해야 하는 일이기도 했다. 석주는 그렇게 책을 만들면서 세상을 이해했고, 결국 그 일 덕분에 “남몰래 갈망하던 성취와 성공을 어렴풋하게 경험하고, 타인과 자신을 사랑할 힘을 얻었다.”(p.271) 그녀는 깨닫는다.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것은 언제나 상처받는 일이며, 일은 결코 쉬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수년째 책을 읽어왔다. 읽기를 통해 나를 옭아매던 오래된 감정들로부터 벗어나는 경험을 했다. 책은 내 안의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대신 말해주는 것 같았고, 나는 그 문장들을 따라 조금씩 단단해지는 듯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책으로 사람을 만들고, 일로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오히려 사람에게 지치기 시작했다. 책을 매개로 한 사람들, 읽는다는 행위로 연결된 관계들 역시 그 나름의 위계와 권력을 품고 있다는 걸 깨달으면서— 읽는다는 일에도 회의가 찾아왔다.


『오직 그녀의 것』은 ‘읽는다’는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했다. (편집자로서의 읽기는 아니지만, 그 태도는 독자로서의 읽기와도 연결되었다.) 읽기란 결국 타인과 세상을 이해하기 이전에, 자신에게로 향하는 여정이라는 사실을. 석주는 그것을 쉰이 넘어서야 깨닫는다.


 “이야기가 향하는 곳이 자신의 내면이라는 것. 허구의 서사가 불러일으키는 것은 내밀한 기억의 감정이며, 자신으로부터 출발하여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것이 실은 읽는 행위의 전부”(p.267)라는 것을.


"책을 좋아하나요?"(p.272)라는 질문은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지만, 어쩌면 삶 전체를 향한 질문이기도 하다. 나는 여전히 책을 좋아한다. 그러나 이제는 그 좋아함이 나를 무너뜨리지 않기를, 다치지 않으면서도 계속 좋아할 수 있기를 바란다. 좋아한다는 것은 끝내 그만두지 못하는 일, “꾸역꾸역 해나가는”(p.253) 일이라는 걸 알기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서 읽고 쓴 솔직한 리뷰입니다. 

그녀에게 삶은 노력과 분투를 통해 획득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미래는 모험이라기보다 수용에 가까웠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녀는 삶이 어떤 식으로든 예정되어 있다고 믿었다. 각자에게 주어진 몫이 있다고 여겼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데 거부감이 없었다. - P10

작품을 냉정하게 보라는 건 단점에 집중하라는 의미가 아니에요. 그 작품이 지닌 고유한 지점, 빛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라는 의미이기도 하죠. 좋은 점을 찾는 건 부족한 점을 찾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부족한 부분에서 잠재성을 발견하는 건 더 어려운 일이고요. - P25

그러게요. 참 이상하죠? 일이 쉬워지는 법이 없으니. 오래하면 익숙해질 법도 한데 이 일은 그렇지도 않아요. 좋아하는 게 이렇게 무섭습니다. 밉고 싫고 그만두고 싶어도 꾸역꾸역 해나가게 되거든요. 예전에 제 사수가 그러더군요. 뭘 좋아한다는 게 원래 그런 거라고. 더 좋아하고 많이 좋아할수록 마음 다칠 일이 많다고. 그땐 무슨 이런 감상적인 소릴 하나 싶었는데 지나고 나니 틀린 맒도 아니더라고요. - P253

석주는 알고 있었다. 이야기가 향하는 곳이 자신의 내면이라는 것을. 허구의 서사가 불러일으키는 것은 내밀한 기억의 감정이며, 자신으로부터 출발하여 자신에게도 돌아오는 것이 실은 읽는 행위의 전부라는 것 또한.
아쉬운 지점이 없진 않았다. 지나치게 망설이는 듯한 도입부와 어수선하게 정리된 결말은 손을 볼 필요가 없었다. 알량한 지위와 권위를 내세운다면 신인 작가에게 수정을 요구하는 건 어렵지 않을 거였다. 그러나 그렇게 하고 싶진 않았다. 뭐랄까, 의기소침해진 작가가 마지못해 고쳐온 원고를 받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 P267

책을 좋아하나요?
목소리에 감출 수 없는 다정함이 묻어났다. 맞다. 그건 오래전 사랑이 시작된 줄도 모르고, 그것이 삶을 얼마나 바꿔놓을지도 모른 채, 그저 속수무책 그 속으로 뛰어들 준비를 하던 석주에게 누군가 건넸던 바로 그 질문이었다. - P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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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다 하다 앤솔러지 1
김유담 외 지음 / 열린책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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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다』, 열린책들 하다 앤솔리지1


『걷다』는 다섯 명의 소설가가 걷기를 제각기 다른 목소리로 풀어낸 앤솔러지다. “하다”라는 가장 단순한 동사에서 출발했지만, 그 단순함 속에서 오히려 삶의 가장 근본적인 결이 드러난다. 김유담, 성해나, 이주혜, 임선우, 임현 — 이 다섯 작가의 소설은 서로 다른 길을 걸으면서도, 결국 걷기가 삶을 다시 묻는 행위임을 보여준다.


김유담의 「없는 셈 치고」에서 주인공은 오르막과 내리막을 오가며 “발바닥이 쓰라렸다. 그보다 더 쓰라린 건 마음인지도 몰랐다”라고 말한다. 그 문장에서 나는 걷기가 마음의 무게를 드러내는 몸짓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성해나의 「후보(後步)」에서는 38년간 철물점을 지킨 인물이 뒤로 걸으며 자기 삶을 반추한다. 걷기가 시간이 아니라 기억을 되짚는 방식이 될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이주혜의 「유월이니까」는 가장 절박한 순간에 발이 어떻게 생명을 붙잡는지를 보여준다. “살려고. 기를 쓰고. 걷고. 뛰는 거예요”라는 말은 걷기가 생존의 방식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이어지는 임선우의 「유령 개 산책하기」에서는 상실의 자리에서조차 걷기가 위로와 동행의 행동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유령 개와의 산책은 목적지 없는 느릿한 길이지만, 그 느림 속에서 오히려 삶이 회복된다.

마지막으로 임현의 「느리게 흩어지기」는 산책을 “흩어지기 위해 꾀를 내는 일”이라고 정의한다. 걷는다는 것이 모으는 일이 아니라 흩어내는 일이라는 말이 새롭게 다가왔다. 


나는 걷기를 좋아한다. 걸을 때마다 환기되는 감각, 불현듯 떠오르는 사유가 있다. 하지만 오늘날 걷기는 사색이 아닌 일부러 시간을 내어야만 가능한 행위가 되어버린 것 같기도 하다. 또는 건강을 위해 쫓기듯 걷는 것 같기도. 그래서 이 소설집의 문장들은 '걷다'의 행위,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해주었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서 쓴 솔직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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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박완서 X 이옥토 리커버 특별판) - 유년의 기억 소설로 그린 자화상 (개정판) 1
박완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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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박완서 장편소설, 웅진지식하우스


❶ 자화상을 그리듯 쓴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기억력에만 의지해 써 보았다”는 작가의 고백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박완서는 단순한 회고담에 머무르지 않는다. 기억의 공백을 상상력으로 메우고, 불확실한 기억을 “각자의 상상력을 따른다”는 통찰로 전환한다. 결과적으로 이 작품은 한 사람의 이야기를 넘어 시대의 이야기를 함께 담아낸 자화상이 되었다. 독자는 박완서의 성장기를 따라가면서 동시에 한국 현대사의 굴곡진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❷ 어머니의 형상 ― 신념과 한계


작품의 한 축은 어머니의 존재다. 홀로 맏며느리의 위치에서 가부장적 전통을 거슬러 아들을 서울로 보내고, 딸에게 “신여성이 되라”고 다그치며, 물장수를 부러워할 정도로 교육을 통한 계급 상승을 꿈꾸었던 인물. 그는 가족의 생존을 위해 기지를 발휘했고, 억척스러움과 당당함으로 자녀들의 길을 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에게는 시대적 제약과 개인적 한계가 있었다. 민족적 자각과 저항보다는 눈앞의 생존과 체면에 더 치중했고, 자식 사랑은 때때로 잔혹한 이기심으로 변주되기도 했다. 작가는 이 복합적인 모성을 애증 어린 시선으로 그려낸다. 어머니는 강인하면서도 모순된 인물로, 전쟁과 분단의 격랑 속에서 한 가족의 운명을 이끌어갔다.


❸ 근현대사의 풍경 속에서


작품의 시간적 배경은 일제강점기에서 해방, 분단과 한국전쟁에 이르는 격동기다. 소녀의 눈에 비친 풍경은 “저녁노을이 피 흘리는 듯한 비애”에서부터, 일본어 강제 교육, 친일 혐의로 인한 마을 청년들의 분풀이, 좌익과 우익의 충돌, 전쟁 중의 생리 중단과 ‘벌레가 된 시간’까지 이어진다. 개인의 성장기는 곧 민족사의 상흔과 맞물리며, 기억은 역사적 증언이 된다. 작가는 ‘벌레 같은 시간’을 증언해야 한다는 예감 속에서 글쓰기를 결심하는데, 이는 문학이 ‘기억의 윤리적 형식’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❹ 문학적 의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한 소녀의 성장소설이자 개인의 내밀한 기억과 역사적 집단 경험을 증언하는 문학이다. 작가는 “소설이라 불러도 되는지 모르겠다”면서도 결국 소설이라는 틀을 선택한다. 이는 문학이야말로 불확실한 기억을 담아내고, 상실과 비애를 의미로 바꾸어내는 최적의 장르라는 믿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작가의 개인 이야기는 세대의 이야기와 겹치고, 어머니의 삶은 한국 여성들의 삶과 연결되며, 소녀의 성장 과정은 한국 근현대사의 아픔을 담고 있다. 그래서 읽을 때마다 박완서 작가 개인의 삶을 넘어 한 시대의 풍경을 떠올리게 되고, 동시에 기억이 문학으로 바뀌는 과정을 확인하게 되는 것 같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서 쓴 솔직한 후기입니다. 

감수성과 기억력이 함께 왕성할 때 입력된 것들이 개인의 정신사에 미치는 영향이 이렇듯 결정적이라는 걸 생각할 때, 나의 그런 시기의 문화적 환경이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너무도 척박했었다는 게 여간 억울하지가 않다. 그러나 한편 우리가 밑바닥 가난 속에서도 드물게 사랑과 이성이 조화된 환경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엄마 덕이었다고 감사하는 마음이 생긴 것은 강경애의 소설을 읽고 나서였다.(p.209) - P209

자식의 안전을 위해 법에서 금하는 불온한 사상을 두려워하면서도, 자식이 위험을 무릅쓰고 하는 일이니만치 뭔가 위대한 일이라고 믿고 싶은, 가장 우리 엄마다운 이중성이었을까? 아니면 엄마도 임의로 할 수 없는 불길한 예감 때문이었을까?

모성애도 이념 투쟁의 영향을 받으면 이렇게 악몽이 되고 만다. 다시는 생각하기도 싫은 더러운 시대였다.(p.248) - P248

나는 밤마다 벌레가 됐던 시간들을 내 기억 속에서 지우려고 고개를 미친 듯이 흔들며 몸부림쳤다. 그러다가도 문득 그들이 나를 벌레로 기억하는데 나만 기억상실증이 걸린다면 그야말로 정말 벌레가 되는 일이 아닐까 하는 공포감 때문에 어떡하든지 망각을 물리쳐야 한다는 정신이 들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잊어버린 부분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 여러 군데서 개별적으로 당한 일들이 한 묶음으로 단순화돼 남아 있고, 구체적인 사건들을 추상적으로밖에 생각해 낼 수가 없다. 그건 몸으로 벌레처럼 기었을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폭력에 굴복당했다는 증거겠지만 어쩌랴, 그렇게 생겨 먹은 게 보통 사람이 안 미치고 견딜 수 있는 정신력의 한계인 것을.(p.293) - P293

그때 문득 막다른 골목까지 쫓긴 도망자가 획 돌아서는 것처럼 찰나적으로는 사고의 전환이 왔다. 나만 보았다는 데 무슨 뜻이 있을 것 같았다. 우리만 여기 남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약한 우연이 엎치고 덮쳤던가. 그래, 나 홀로 보았다면 반드시 그걸 증언할 책무가 있을 것이다. 그거야말로 고약한 우연에 대한 정당한 복수다. 증언할 게 어찌 이 거대한 공허뿐이랴. 벌레의 시간도 증언해야지. 그래야 난 벌레를 벗어날수가 있다.
그건 앞으로 언젠가 글을 쓸 것 같은 예감이었다. 그 예감이 공포를 몰아냈다. 조금밖에 없는 식량도 걱정이 안 됐다. 다닥다닥 붙은 빈집들이 식량으로 보였다. 집집마다 설마 밀가루 몇 줌, 보리쌀 한두 됫박쯤 없을라구. 나는 벌써 빈집을 털 계획까지 세워 놓고 있었기 때문에 목구멍이 포도청도 겁나지 않았다.(p.309) - P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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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춤을 추세요
이서수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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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춤을 추세요』 , 이서수 소설집, 문학동네


이서수의 단편집 『그래도 춤을 추세요』에는 버티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나온다. 그들은 억지 웃음을 쓰거나, 해괴한 막춤을 추거나, 막춤 굿으로 기도하거나, 낯선 땅에서 개척자로 살아간다. 삶의 무게에 지치면서도, 결국 다시 몸을 움직이고 이어 달리는 인물들이다. 「이어달리기」, 「춤은 영원하다」, 「AKA 신숙자」, 「운동장 바라보기」등에 이르기까지 작품집은 서로 다른 삶의 현장을 배경으로 하지만, 그 안에서 반복적으로 떠오르는 문제의식이 있다. 바로 노동과 생존, 가족의 의무와 책임, 죄책감, 다문화와 무지,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는 몸의 언어로서의 ‘춤’이다.


「이어달리기」의 화자는 직장에 들어가면서 억지 웃음을 배워야 했다. 면접 자리에서 “죽상”이라는 말을 들은 뒤로는 생존의 기술처럼 가면을 쓰고 웃었지만, 그 웃음은 곧 자신을 갉아먹는 기술이 되어 미래는 “텅 빈 점포”(p.34)처럼 공허하게만 다가왔다. 반대로 엄마는 억지를 거부한 세대였다. 청소일을 했던 엄마는 “잘못했을 때만 사과했고, 웃고 싶을 때만 웃었다”(p.19)고 단호히 말하며, 타인의 요구에 맞춰 감정을 꾸미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삶이 덜 무거웠던 것은 아니다. 딸이 타협으로 버텼다면, 엄마는 자기 방식(부모이기 때문에)으로 버텼을 뿐, 결국 두 세대 모두 같은 무게를 짊어진 것이다. 화자가 “일하다 도망치고 싶었던 적 없었어?”라고 묻자, 엄마는 잠시 침묵하다가 “있었지… 네 생각 하면서 참았어”(p.37)라고 고백한다. 화자의 생각과는 대비된다.

이 작품은 억지 웃음을 지으며 가면을 쓰고 달려온 딸과, 자기 방식으로 달려온 엄마가 서로 바통을 이어받는 세대의 생존 계보라고 봐도 될까. 이들이 모두 백수가 되고 추위를 피해 도서관을 가며 서로에게 편지를 쓰는 행위가 그렇다고 생각되었다. 이런 방식의 릴레이가 인상깊었다.


「춤은 영원하다」는 억눌린 삶을 한순간 흔드는 춤의 힘을 보여준다. 엄마는 평생 바람을 피우고 돌아온 아버지를 간병하며 참아왔던 분노를 춤 속에서 터뜨린다. 쪽파를 쥔 채 몸을 흔들다 끝내 “상놈의 새끼, 끝까지…끝까지 참았어, 내가”(p.48)라며 죽은 아버지를 향해 외칠 때, 춤은 말로 다 하지 못한 삶의 무게를 드러내는 것 같았다. 화자는 엄마의 ‘우주’가 열렸다 닫히는 순간을 보게 된다. 할머니에게서 시작된 막춤은 엄마와 이모, 그리고 화자로 이어지며, 이모가 “테크닉보다 진심이 중요해”(p.59)라 말한 것처럼 진심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화자는 “우리의 유전자에 흐르는 막춤은 영원하다. 누구도 막을 수 없다”(p.69)고 고백한다. 서툴고 해괴한 막춤이지만 그 모습을 떠올리면 웃음이 나면서도, 동시에 마음이 저릿해진다. 우스꽝스럽고 유쾌한, 그래서 그 웃음 뒤에는 그들의 아픔과 어떤 찰나의 해방감이 함께 내포된 것 같다.


「AKA 신숙자」에서 기억에 남는 장면은 엄마가 딸에게 묻는 순간이다. “미리야,  너는 내가 아프면 얼마나 쓸 거니?”(p.142). 반련동물 퐁이에게 500만 원이 넘는 치료비를 쓰며 “내 새끼”라 부르는 딸을 보면서 던진 말이었다. 그 질문은 돌봄이 어디까지 닿을 수 있는지, 사랑은 얼마나 감당할 수 있는지를 묻는 것 같다. 딸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어떤 사랑은 너무 커서 무섭고, 어떤 사랑은 작아서 무겁지.'라고 생각한다. 사랑이 늘 한결같이 따뜻하고 숭고한 것이 아니라, 때로는 무겁고 버거운 것이기도 하다는 고백. 그 말 속에 모녀가 함께 짊어진 삶의 무게가 겹겹이 드러나는 듯하다. 이 작품에서도 춤이 등장한다. 이 장면은 분석을 해봐야할 것 같다.


소설집에서 엄마와 딸의 관계는 매우 흥미롭고 솔직하게 그려진다. 딸은 ‘엄마’ 대신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고, 불만을 대놓고 말하기도 하면서, 둘은 거리감 없는 친구처럼 지낸다. 하지만 그 안에는 각자의 무게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들은 부양과 노동의 압박 속에서도 자신의 입장을 숨기지 않고, 억눌린 채 받아들이기보다 스스로의 생각을 밝힌다. 그래서 이서수의 모녀들은 흔히 그려지는 희생적이거나 침묵하는 이미지와 달리, 친근하면서도 자기 목소리를 가진 인물들로 보였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서 쓴 솔직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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