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그녀의 것
김혜진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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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진의 『오직 그녀의 것』은 한 편집자의 일과 삶, 그리고 읽기에 관한 이야기다. 주인공 석주는 젊은 시절부터 삶을 개척하거나 쟁취하기보다 “주어진 몫을 수용하며 감당하는 방식으로 삶에 순종했던”(p.29) 인물이다. 그녀에게 일은 투쟁의 현장이 아니라 인내의 자리였고, 열정은 불타는 감정이 아니라 “가만히 길들이는 방식으로”(p.87) 자기 자신을 닦아가는 과정이었다.


그녀가 말하는 ‘일’의 세계는 반복과 수정, 타인의 판단과 마감이 얽힌, 감정의 여지가 점점 희미해지는 곳이다. 나는 그 세계가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일과 감정, 열정과 체념, 인간과 체계 사이의 균형을 잡으려 애써왔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건 감정을 덜어내는 법을 배우는 일이며, 그 과정에서 자신이 점점 무뎌져가는 것을 감당해야 하는 일이기도 했다. 석주는 그렇게 책을 만들면서 세상을 이해했고, 결국 그 일 덕분에 “남몰래 갈망하던 성취와 성공을 어렴풋하게 경험하고, 타인과 자신을 사랑할 힘을 얻었다.”(p.271) 그녀는 깨닫는다.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것은 언제나 상처받는 일이며, 일은 결코 쉬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수년째 책을 읽어왔다. 읽기를 통해 나를 옭아매던 오래된 감정들로부터 벗어나는 경험을 했다. 책은 내 안의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대신 말해주는 것 같았고, 나는 그 문장들을 따라 조금씩 단단해지는 듯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책으로 사람을 만들고, 일로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오히려 사람에게 지치기 시작했다. 책을 매개로 한 사람들, 읽는다는 행위로 연결된 관계들 역시 그 나름의 위계와 권력을 품고 있다는 걸 깨달으면서— 읽는다는 일에도 회의가 찾아왔다.


『오직 그녀의 것』은 ‘읽는다’는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했다. (편집자로서의 읽기는 아니지만, 그 태도는 독자로서의 읽기와도 연결되었다.) 읽기란 결국 타인과 세상을 이해하기 이전에, 자신에게로 향하는 여정이라는 사실을. 석주는 그것을 쉰이 넘어서야 깨닫는다.


 “이야기가 향하는 곳이 자신의 내면이라는 것. 허구의 서사가 불러일으키는 것은 내밀한 기억의 감정이며, 자신으로부터 출발하여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것이 실은 읽는 행위의 전부”(p.267)라는 것을.


"책을 좋아하나요?"(p.272)라는 질문은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지만, 어쩌면 삶 전체를 향한 질문이기도 하다. 나는 여전히 책을 좋아한다. 그러나 이제는 그 좋아함이 나를 무너뜨리지 않기를, 다치지 않으면서도 계속 좋아할 수 있기를 바란다. 좋아한다는 것은 끝내 그만두지 못하는 일, “꾸역꾸역 해나가는”(p.253) 일이라는 걸 알기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서 읽고 쓴 솔직한 리뷰입니다. 

그녀에게 삶은 노력과 분투를 통해 획득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미래는 모험이라기보다 수용에 가까웠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녀는 삶이 어떤 식으로든 예정되어 있다고 믿었다. 각자에게 주어진 몫이 있다고 여겼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데 거부감이 없었다. - P10

작품을 냉정하게 보라는 건 단점에 집중하라는 의미가 아니에요. 그 작품이 지닌 고유한 지점, 빛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라는 의미이기도 하죠. 좋은 점을 찾는 건 부족한 점을 찾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부족한 부분에서 잠재성을 발견하는 건 더 어려운 일이고요. - P25

그러게요. 참 이상하죠? 일이 쉬워지는 법이 없으니. 오래하면 익숙해질 법도 한데 이 일은 그렇지도 않아요. 좋아하는 게 이렇게 무섭습니다. 밉고 싫고 그만두고 싶어도 꾸역꾸역 해나가게 되거든요. 예전에 제 사수가 그러더군요. 뭘 좋아한다는 게 원래 그런 거라고. 더 좋아하고 많이 좋아할수록 마음 다칠 일이 많다고. 그땐 무슨 이런 감상적인 소릴 하나 싶었는데 지나고 나니 틀린 맒도 아니더라고요. - P253

석주는 알고 있었다. 이야기가 향하는 곳이 자신의 내면이라는 것을. 허구의 서사가 불러일으키는 것은 내밀한 기억의 감정이며, 자신으로부터 출발하여 자신에게도 돌아오는 것이 실은 읽는 행위의 전부라는 것 또한.
아쉬운 지점이 없진 않았다. 지나치게 망설이는 듯한 도입부와 어수선하게 정리된 결말은 손을 볼 필요가 없었다. 알량한 지위와 권위를 내세운다면 신인 작가에게 수정을 요구하는 건 어렵지 않을 거였다. 그러나 그렇게 하고 싶진 않았다. 뭐랄까, 의기소침해진 작가가 마지못해 고쳐온 원고를 받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 P267

책을 좋아하나요?
목소리에 감출 수 없는 다정함이 묻어났다. 맞다. 그건 오래전 사랑이 시작된 줄도 모르고, 그것이 삶을 얼마나 바꿔놓을지도 모른 채, 그저 속수무책 그 속으로 뛰어들 준비를 하던 석주에게 누군가 건넸던 바로 그 질문이었다. - P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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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다 하다 앤솔러지 1
김유담 외 지음 / 열린책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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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다』, 열린책들 하다 앤솔리지1


『걷다』는 다섯 명의 소설가가 걷기를 제각기 다른 목소리로 풀어낸 앤솔러지다. “하다”라는 가장 단순한 동사에서 출발했지만, 그 단순함 속에서 오히려 삶의 가장 근본적인 결이 드러난다. 김유담, 성해나, 이주혜, 임선우, 임현 — 이 다섯 작가의 소설은 서로 다른 길을 걸으면서도, 결국 걷기가 삶을 다시 묻는 행위임을 보여준다.


김유담의 「없는 셈 치고」에서 주인공은 오르막과 내리막을 오가며 “발바닥이 쓰라렸다. 그보다 더 쓰라린 건 마음인지도 몰랐다”라고 말한다. 그 문장에서 나는 걷기가 마음의 무게를 드러내는 몸짓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성해나의 「후보(後步)」에서는 38년간 철물점을 지킨 인물이 뒤로 걸으며 자기 삶을 반추한다. 걷기가 시간이 아니라 기억을 되짚는 방식이 될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이주혜의 「유월이니까」는 가장 절박한 순간에 발이 어떻게 생명을 붙잡는지를 보여준다. “살려고. 기를 쓰고. 걷고. 뛰는 거예요”라는 말은 걷기가 생존의 방식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이어지는 임선우의 「유령 개 산책하기」에서는 상실의 자리에서조차 걷기가 위로와 동행의 행동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유령 개와의 산책은 목적지 없는 느릿한 길이지만, 그 느림 속에서 오히려 삶이 회복된다.

마지막으로 임현의 「느리게 흩어지기」는 산책을 “흩어지기 위해 꾀를 내는 일”이라고 정의한다. 걷는다는 것이 모으는 일이 아니라 흩어내는 일이라는 말이 새롭게 다가왔다. 


나는 걷기를 좋아한다. 걸을 때마다 환기되는 감각, 불현듯 떠오르는 사유가 있다. 하지만 오늘날 걷기는 사색이 아닌 일부러 시간을 내어야만 가능한 행위가 되어버린 것 같기도 하다. 또는 건강을 위해 쫓기듯 걷는 것 같기도. 그래서 이 소설집의 문장들은 '걷다'의 행위,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해주었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서 쓴 솔직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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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박완서 X 이옥토 리커버 특별판) - 유년의 기억 소설로 그린 자화상 (개정판) 1
박완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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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박완서 장편소설, 웅진지식하우스


❶ 자화상을 그리듯 쓴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기억력에만 의지해 써 보았다”는 작가의 고백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박완서는 단순한 회고담에 머무르지 않는다. 기억의 공백을 상상력으로 메우고, 불확실한 기억을 “각자의 상상력을 따른다”는 통찰로 전환한다. 결과적으로 이 작품은 한 사람의 이야기를 넘어 시대의 이야기를 함께 담아낸 자화상이 되었다. 독자는 박완서의 성장기를 따라가면서 동시에 한국 현대사의 굴곡진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❷ 어머니의 형상 ― 신념과 한계


작품의 한 축은 어머니의 존재다. 홀로 맏며느리의 위치에서 가부장적 전통을 거슬러 아들을 서울로 보내고, 딸에게 “신여성이 되라”고 다그치며, 물장수를 부러워할 정도로 교육을 통한 계급 상승을 꿈꾸었던 인물. 그는 가족의 생존을 위해 기지를 발휘했고, 억척스러움과 당당함으로 자녀들의 길을 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에게는 시대적 제약과 개인적 한계가 있었다. 민족적 자각과 저항보다는 눈앞의 생존과 체면에 더 치중했고, 자식 사랑은 때때로 잔혹한 이기심으로 변주되기도 했다. 작가는 이 복합적인 모성을 애증 어린 시선으로 그려낸다. 어머니는 강인하면서도 모순된 인물로, 전쟁과 분단의 격랑 속에서 한 가족의 운명을 이끌어갔다.


❸ 근현대사의 풍경 속에서


작품의 시간적 배경은 일제강점기에서 해방, 분단과 한국전쟁에 이르는 격동기다. 소녀의 눈에 비친 풍경은 “저녁노을이 피 흘리는 듯한 비애”에서부터, 일본어 강제 교육, 친일 혐의로 인한 마을 청년들의 분풀이, 좌익과 우익의 충돌, 전쟁 중의 생리 중단과 ‘벌레가 된 시간’까지 이어진다. 개인의 성장기는 곧 민족사의 상흔과 맞물리며, 기억은 역사적 증언이 된다. 작가는 ‘벌레 같은 시간’을 증언해야 한다는 예감 속에서 글쓰기를 결심하는데, 이는 문학이 ‘기억의 윤리적 형식’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❹ 문학적 의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한 소녀의 성장소설이자 개인의 내밀한 기억과 역사적 집단 경험을 증언하는 문학이다. 작가는 “소설이라 불러도 되는지 모르겠다”면서도 결국 소설이라는 틀을 선택한다. 이는 문학이야말로 불확실한 기억을 담아내고, 상실과 비애를 의미로 바꾸어내는 최적의 장르라는 믿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작가의 개인 이야기는 세대의 이야기와 겹치고, 어머니의 삶은 한국 여성들의 삶과 연결되며, 소녀의 성장 과정은 한국 근현대사의 아픔을 담고 있다. 그래서 읽을 때마다 박완서 작가 개인의 삶을 넘어 한 시대의 풍경을 떠올리게 되고, 동시에 기억이 문학으로 바뀌는 과정을 확인하게 되는 것 같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서 쓴 솔직한 후기입니다. 

감수성과 기억력이 함께 왕성할 때 입력된 것들이 개인의 정신사에 미치는 영향이 이렇듯 결정적이라는 걸 생각할 때, 나의 그런 시기의 문화적 환경이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너무도 척박했었다는 게 여간 억울하지가 않다. 그러나 한편 우리가 밑바닥 가난 속에서도 드물게 사랑과 이성이 조화된 환경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엄마 덕이었다고 감사하는 마음이 생긴 것은 강경애의 소설을 읽고 나서였다.(p.209) - P209

자식의 안전을 위해 법에서 금하는 불온한 사상을 두려워하면서도, 자식이 위험을 무릅쓰고 하는 일이니만치 뭔가 위대한 일이라고 믿고 싶은, 가장 우리 엄마다운 이중성이었을까? 아니면 엄마도 임의로 할 수 없는 불길한 예감 때문이었을까?

모성애도 이념 투쟁의 영향을 받으면 이렇게 악몽이 되고 만다. 다시는 생각하기도 싫은 더러운 시대였다.(p.248) - P248

나는 밤마다 벌레가 됐던 시간들을 내 기억 속에서 지우려고 고개를 미친 듯이 흔들며 몸부림쳤다. 그러다가도 문득 그들이 나를 벌레로 기억하는데 나만 기억상실증이 걸린다면 그야말로 정말 벌레가 되는 일이 아닐까 하는 공포감 때문에 어떡하든지 망각을 물리쳐야 한다는 정신이 들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잊어버린 부분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 여러 군데서 개별적으로 당한 일들이 한 묶음으로 단순화돼 남아 있고, 구체적인 사건들을 추상적으로밖에 생각해 낼 수가 없다. 그건 몸으로 벌레처럼 기었을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폭력에 굴복당했다는 증거겠지만 어쩌랴, 그렇게 생겨 먹은 게 보통 사람이 안 미치고 견딜 수 있는 정신력의 한계인 것을.(p.293) - P293

그때 문득 막다른 골목까지 쫓긴 도망자가 획 돌아서는 것처럼 찰나적으로는 사고의 전환이 왔다. 나만 보았다는 데 무슨 뜻이 있을 것 같았다. 우리만 여기 남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약한 우연이 엎치고 덮쳤던가. 그래, 나 홀로 보았다면 반드시 그걸 증언할 책무가 있을 것이다. 그거야말로 고약한 우연에 대한 정당한 복수다. 증언할 게 어찌 이 거대한 공허뿐이랴. 벌레의 시간도 증언해야지. 그래야 난 벌레를 벗어날수가 있다.
그건 앞으로 언젠가 글을 쓸 것 같은 예감이었다. 그 예감이 공포를 몰아냈다. 조금밖에 없는 식량도 걱정이 안 됐다. 다닥다닥 붙은 빈집들이 식량으로 보였다. 집집마다 설마 밀가루 몇 줌, 보리쌀 한두 됫박쯤 없을라구. 나는 벌써 빈집을 털 계획까지 세워 놓고 있었기 때문에 목구멍이 포도청도 겁나지 않았다.(p.309) - P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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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춤을 추세요
이서수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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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춤을 추세요』 , 이서수 소설집, 문학동네


이서수의 단편집 『그래도 춤을 추세요』에는 버티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나온다. 그들은 억지 웃음을 쓰거나, 해괴한 막춤을 추거나, 막춤 굿으로 기도하거나, 낯선 땅에서 개척자로 살아간다. 삶의 무게에 지치면서도, 결국 다시 몸을 움직이고 이어 달리는 인물들이다. 「이어달리기」, 「춤은 영원하다」, 「AKA 신숙자」, 「운동장 바라보기」등에 이르기까지 작품집은 서로 다른 삶의 현장을 배경으로 하지만, 그 안에서 반복적으로 떠오르는 문제의식이 있다. 바로 노동과 생존, 가족의 의무와 책임, 죄책감, 다문화와 무지,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는 몸의 언어로서의 ‘춤’이다.


「이어달리기」의 화자는 직장에 들어가면서 억지 웃음을 배워야 했다. 면접 자리에서 “죽상”이라는 말을 들은 뒤로는 생존의 기술처럼 가면을 쓰고 웃었지만, 그 웃음은 곧 자신을 갉아먹는 기술이 되어 미래는 “텅 빈 점포”(p.34)처럼 공허하게만 다가왔다. 반대로 엄마는 억지를 거부한 세대였다. 청소일을 했던 엄마는 “잘못했을 때만 사과했고, 웃고 싶을 때만 웃었다”(p.19)고 단호히 말하며, 타인의 요구에 맞춰 감정을 꾸미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삶이 덜 무거웠던 것은 아니다. 딸이 타협으로 버텼다면, 엄마는 자기 방식(부모이기 때문에)으로 버텼을 뿐, 결국 두 세대 모두 같은 무게를 짊어진 것이다. 화자가 “일하다 도망치고 싶었던 적 없었어?”라고 묻자, 엄마는 잠시 침묵하다가 “있었지… 네 생각 하면서 참았어”(p.37)라고 고백한다. 화자의 생각과는 대비된다.

이 작품은 억지 웃음을 지으며 가면을 쓰고 달려온 딸과, 자기 방식으로 달려온 엄마가 서로 바통을 이어받는 세대의 생존 계보라고 봐도 될까. 이들이 모두 백수가 되고 추위를 피해 도서관을 가며 서로에게 편지를 쓰는 행위가 그렇다고 생각되었다. 이런 방식의 릴레이가 인상깊었다.


「춤은 영원하다」는 억눌린 삶을 한순간 흔드는 춤의 힘을 보여준다. 엄마는 평생 바람을 피우고 돌아온 아버지를 간병하며 참아왔던 분노를 춤 속에서 터뜨린다. 쪽파를 쥔 채 몸을 흔들다 끝내 “상놈의 새끼, 끝까지…끝까지 참았어, 내가”(p.48)라며 죽은 아버지를 향해 외칠 때, 춤은 말로 다 하지 못한 삶의 무게를 드러내는 것 같았다. 화자는 엄마의 ‘우주’가 열렸다 닫히는 순간을 보게 된다. 할머니에게서 시작된 막춤은 엄마와 이모, 그리고 화자로 이어지며, 이모가 “테크닉보다 진심이 중요해”(p.59)라 말한 것처럼 진심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화자는 “우리의 유전자에 흐르는 막춤은 영원하다. 누구도 막을 수 없다”(p.69)고 고백한다. 서툴고 해괴한 막춤이지만 그 모습을 떠올리면 웃음이 나면서도, 동시에 마음이 저릿해진다. 우스꽝스럽고 유쾌한, 그래서 그 웃음 뒤에는 그들의 아픔과 어떤 찰나의 해방감이 함께 내포된 것 같다.


「AKA 신숙자」에서 기억에 남는 장면은 엄마가 딸에게 묻는 순간이다. “미리야,  너는 내가 아프면 얼마나 쓸 거니?”(p.142). 반련동물 퐁이에게 500만 원이 넘는 치료비를 쓰며 “내 새끼”라 부르는 딸을 보면서 던진 말이었다. 그 질문은 돌봄이 어디까지 닿을 수 있는지, 사랑은 얼마나 감당할 수 있는지를 묻는 것 같다. 딸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어떤 사랑은 너무 커서 무섭고, 어떤 사랑은 작아서 무겁지.'라고 생각한다. 사랑이 늘 한결같이 따뜻하고 숭고한 것이 아니라, 때로는 무겁고 버거운 것이기도 하다는 고백. 그 말 속에 모녀가 함께 짊어진 삶의 무게가 겹겹이 드러나는 듯하다. 이 작품에서도 춤이 등장한다. 이 장면은 분석을 해봐야할 것 같다.


소설집에서 엄마와 딸의 관계는 매우 흥미롭고 솔직하게 그려진다. 딸은 ‘엄마’ 대신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고, 불만을 대놓고 말하기도 하면서, 둘은 거리감 없는 친구처럼 지낸다. 하지만 그 안에는 각자의 무게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들은 부양과 노동의 압박 속에서도 자신의 입장을 숨기지 않고, 억눌린 채 받아들이기보다 스스로의 생각을 밝힌다. 그래서 이서수의 모녀들은 흔히 그려지는 희생적이거나 침묵하는 이미지와 달리, 친근하면서도 자기 목소리를 가진 인물들로 보였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서 쓴 솔직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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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하는 귀 - 듣기의 수행성, 애도와 기억에 관하여
유은 외 지음 / 히스테리안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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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하는 귀』, 유은 기획 및 글, 히스테리안 출판사

— 기억을 ‘하는 것’으로, '듣기'를 정치적 실천으로


유은의 『애도하는 귀』(히스테리안, 2025)는 세월호라는 참사를 둘러싼 목소리와 장소를 예술적 실천과 연결한 아티스트 리서치 북이다. 저자는 남겨진 자가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지, 우리는 어떻게 기억하고 어떻게 애도해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묻는다. 책을 읽어가는 동안 나는 말하기보다 듣기를 강조하는 작가의 시선과 함께 움직였다. 기억은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며 우리를 흔드는 행위라는 것, 그리고 그 기억이 귀를 통해 수행된다는 사실이 새롭게 다가왔다.


나 역시 오랫동안 애도의 방식과 마음이 과연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품어왔다.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한다고 말할 때, 그 마음은 진실할 수 있는가? 마음의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수많은 생각들은 어딘가 불완전한 흉내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이 책은 그 오래된 의문에 뜻밖의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애도는 완전한 재현이나 증명의 행위가 아니라, ‘듣기’라는 수행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말이 되지 못한 신음과 침묵, 공백의 떨림을 들으려는 태도, 끝내 이해할 수 없는 타자의 고통을 그저 곁에서 함께 감당하려는 몸짓, 그것이 애도의 길일 수 있음을 나는 새롭게 깨달았다. 듣기의 수행성은 나의 귀와 몸을 훈련하는 행위이고, 그렇게 듣는 순간 애도는 불가능성을 껴안는 실천으로 바뀐다는 것. 결국 애도의 방식은 바로 그 불완전함 속에 있었다. 


「물기의 지형」에서 유은 작가는 교실을 애도의 장소로 경험한다. 공기청정기와 백색등의 소음이 가득한 멸균된 공간, 그 안에서 가능한 것은 정돈된 의례뿐이었고 울컥하는 침묵과 비명은 자리를 잃었다. “무엇이 ‘온전한’ 애도를 불가능하게 만드는가?”라는 물음은 한국 장례식 문화와도 겹쳐진다고 생각했다. 장례식장의 국화와 정해진 절차, 예법은 애도를 틀 속에 가두고 눈물조차 규율한다. 더 나아가 장례식장은 상주에게 과도한 소비를 강요하며 슬픔을 비용으로 치환하는 듯하다. 결국 애도의 자리는 마련되지만 정작 애도는 불가능해진다. 


이어 히스테리안 연구자 강병우는 「기울임」에서 규격화된 애도는 멸균된 의례 공간 속에서 이루어지며, 그 과정에서 ‘자리’의 문제는 지워진다고 말한다. 자리가 고정되는 순간 타자의 목소리는 희석되고, 진정한 애도는 불가능해진다. 그래서 그는 “애도는 이 ‘자리 없는 장소’에서 기억을 수행한다”고 했다. 자리 없는 장소란 정해진 형식이나 틀로 묶이지 않은 여백과 공백, 아직 이름 붙지 않은 자리다. 이 통찰은 교실에서 느낀 답답함과 겹치며 더욱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듣기의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책에서는 푸코의 분석을 빌려 ‘듣는 자의 권력’을 지적한다. 의사, 교육자, 재판관과 같은 위치에 있는 자는 듣는 자의 자리에서 발화를 요구하고, 그 발화를 해석하고 평가한다. 반면 화자는 이미 말하기 이전부터 제약을 받으며, 말하는 순간 의미의 상실을 경험한다. 듣기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고, 권력과 긴밀하게 얽혀 있다는 것이다. 『애도하는 귀』는 바로 이 지점을 전복하려 한다. 선별된 말만이 아니라, 말이 되지 못한 소리와 침묵, 신음까지 들으려는 노력은 권력화된 듣기를 넘어서는 윤리적 실천인 것이다. 그것은 그저 귀를 귀울이고 몸을 흔드는 미약한 실천일 수 있지만 바로 거기에서 애도의 가능성이 시작된다.


마지막「문을 나서며」에서 유은은 교육자의 자리를 성찰하며, 교사는 권력을 가진 ‘듣는 자’일 수 있기에 작은 목소리가 끝까지 도달할 수 있도록 동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교실은 지식과 권력이 고정된 공간이지만, 교사가 듣는 자로서 권력을 내려놓을 때 ‘자리 없는 장소’로 바뀌어 보이지 않던 목소리가 드러나는 자리로 변한다. 그 순간 교육은 곧 애도의 또 다른 이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도하는 귀』는 우리에게 애도의 자리를 새롭게 상상하라고 말한다. 멸균된 교실도, 규격화된 의례도 아닌, ‘자리 없는 장소’에서 비로소 애도는 가능하다. 듣기는 끝내 말로 다 하지 못한 감정을 놓치지 않고 받아들이는 일이다. 우리는 그 아픔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곁에 서서 들어주고 함께 버텨 줄 수는 있다. 애도는 완전하지 않은 자리에서 서로를 지탱하려는 작은 실천 속에서 비로소 가능하다는 믿음이 생겼다. **강력추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서 쓴 솔직한 리뷰입니다. 

유은의 듣기를 위한 시도, 묵음으로 된 소리의 자리를 더듬어 찾아가는 길은 자신의 형상을 지우는 일이다. 자신을 연민하는 슬픔의 통제에서 벗어나, 작가는 슬픔이 결코 자신을 가둘 수 없게 하는 길을 제시한다. 그것은 생을 겪고 있는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겪는 비애와 사랑을 느끼는 일이다. 생의 모든 것이 ‘삶’의 수레바퀴에 연루된 존재임을 이 작은 책에 각인하며, 우리가 죽고 죽어 기억이 일으킬 바람을 기다린다. - P9

‘사회적 죽음’이란 무엇인가? 어떤 죽음이 사회적 죽음으로 인정되는가? 인정되지 못한 채 잊혀지는 죽음은 없는가? 여전히 듣지 못하는 목소리, 혹은 아직 말이 되지 않은 소리와 울림은 어디에 어떻게 자리할 수 있을까?

‘나’는, ‘우리’는 왜 사회적 죽음을 기억하고자 하는가? 타자의 자리에서, 타자이기에 행해야 하는 애도의 형태는 무엇인가?
듣는 몸과 기억하는 몸에 관한 미적 실천의 현상을 가늠하며 물음표를 따라갑니다. 이 책은 그 여정에 대한 기록입니다. - P12

교실이라는 공간이 애도를 위한 공적 장소가 되었다. 수많은 희생자들을 애도하기 위한 공간 속에서 나는 끊임없이 흩어진다. 온전히 애도하는 마음만으로 젖어 들기에는 어딘가 한 켠을 막아 세운다. 체기가 서린다. 공기청정기와 백색등의 발열 소리가 귀를 찌른다. 적절히 멸균된 장소 안에서 나는 그에 맞는 정돈되고 다듬어진 애도처럼 보이는 행위만이 가능함을 확인한다. 무엇이 ‘온전한’ 애도를 가능하지 않게 한 걸까? 기억을 위한 장소를 구상함에 있어 왜 꼭 공립학교의 관습적 형태를 복제해야만 했을까? 비명과 한숨과 신음, 이명을 위한 틈을 찾고 싶다. 애도를 위한 장소의 마땅한 형태에 대해 떠올린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공존을 위한 공간의 조건은 무엇일까 - P31

말하기, 그래서 말해진 것의 남루함이 불러일으킬 엄청난 경악 속으로 나 자신을 밀어넣기. 그 말이 내 입 밖으로 나오자마자, 나는 서둘러 이렇게 덧붙여야만 할 것이다. 그런 뜻이 아니야, 그런 뜻이 아니야 - P36

기억이 하는 것이 트라우마 서사에서 사랑과 연대의 서사로 이어질 때, 안으로 말려들어가기만 하던 내면의 관습을 멈출 수 있다. 나 아닌 세계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다. 이는 세계와의 접합지점을 새로이 찾게 하는 기점이 된다….

기억이 하는 것이 트라우마 서사에서 사랑과 연대의 서사로 이어질 때 비로소 우리는 애도의 여정을 함께 걷는다.

하지만, 그 애도는 불완전하다. 어쩌면 불가능하다. 불완전하고 불가능하기에 우리는 계속해서 애도의 자리를 유영한다.

애도하는 자의 형상을 떠올린다. 그 자리에는 잠시나마 ‘우리’가 머문다. 우리는 계속해서 구성되고 변화한다. (111)

우리 안에 들어온 이들은 주체가 된다. 애도하는 주체로서 우리는 상실의 자리 곁에 머문다. 어떤 기억하기를 행할 것인가 묻는다. - P111

듣기, 왜 소리 내기가 아니고 듣기인가? 소리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그것이 보이지 않는 것들, 형언할 수 없는 것들을 담을 수 있는 매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소리를 어떻게 낼 것인가’보다는 ‘무엇을 어떻게 들을 것인가’에 주목해왔던 것이다. 내게 소리는 ‘듣기’의 문제이다. - P116

김애령은 푸코의 분석을 빌려 청자의 권력에 대해 언급한다. 근대 지식 권력은 "듣는 위치", 즉 "의사, 교육자, 재판관의 자리에서 ‘고백’을 요구한다." 힘을 가진 자는 듣고 해석하고 평가한다. 그에 반해, 고백해야 하는 화자는 청자의 해석과 평가를 받기 이전부터 공적 말하기에 부합하도록 부서진 말에 표면에 기성의 기표를 덧입혀야 한다. 화자는 말을 꺼냄과 동시에 의미의 상실을 경험한다. 청자는 듣는 동시에 듣지 않음으로써 기울어진 권력관계를 유지한다. 여기서 듣기의 관계적 실천은 실패하며, 청자에게 가닿지 못한 채 맴도는 말들은 변방으로 흩어진다.
실제로 현실정치에서 권력의 자리에 있는 이들의 귀에 가닿을 수 있는 말은 언제나 공적 형태로 가공되어야 한다. 이러한 한계로부터 고민의 가지가 한 줄기 뻗어 나온다. 선별된 말 이전의 소리와 침묵, 말이 되지 못한 말들을 어떻게 들을 수 있을까? 당신이 하지 않은 말과 하지 못한 말, 말줄임표와 쉼표 혹은 침묵 속에 숨겨진 말들을 들 - P118

으려면 나는 나의 귀와 몸을 어떻게 훈련해야 할까?
글을 쓰자고 다짐한 것은 예민한 귀가 되기 위한 조건과 환경을 톺아보고자 하는 마음에서 기인한 것일지 모르겠다. 침묵이 귓가를 스친다. 침묵으로 이어지는 말줄임표를 가늠한다. 들을 수 없는 환경을 묻는다. 들리지 않는 것들의 자리를 더듬는다.
나의 듣기에 대한 관심이 듣는 몸에 대한 윤리적 성찰과 요구로, 듣기의 윤리적 실천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어떻게 들을 것인가? 냉소와 폭력과 같은 자가 당착에 빠지지 않는 윤리적 방법론으로서의 애도와 듣기에 관해 묻는다. 타자의 침묵까지도 살펴 들을 수 있는, "충분히 날카로운" 동시에 온전함에 가깝게 자신을 비우고 들을 수 있는 귀를 단련하고자 한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질문하고 온전함에 가까운 듣기로 이어가는 대화를 만들어 갈 방향을 살핀다. - P119

타자를 ‘바깥’에 세워 애도하는 일은 완벽한 윤리를 추구하려는 모더니즘적 충동은 아닐까. 불가능성이라고는 말로 고통과 책임의 자리에서 응답하길 주저하는 것은 아닐까? 의례화된 장소는 타자에 대한 두 손 모은 마음과 잔잔한 애도가 채워져 있다. 그러나 그곳에는 길길이 날뛰는 애도의 행위도, 타자도 없다. 타자는 바깥에 있고 애도자는 여기에 있다. - P129

애도는 이 ‘자리 없는 장소’에서 기억을 수행한다. - P137

가끔 살아있다는 것과 죽어있다는 것의 사이를 분간하기 어렵다.

고통에 따른 글쓰기가 공허를 이기지 못함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그것에 대해 쓸 수밖에 없다.(중략)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은 죽음이 우리 안에 보존되어 있다는 것뿐이다. - P143

교육자의 자리가 타자의 자리가 될 수 있을까요? 말과 표정을 가다듬습니다. 불필요한 오해나 불신 어린 말을 덜어내기, 듣는 자로서 교사가 지닌 권력 또한 망각하지 않기, 작은 사람의 말이 마침표에 가닿을 때까지 동행하기. - P195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자신과 타자를 돌아볼 수 있다는 수행 가능성을 발견해서 일까요? 그 순간들 속에 겹쳐진 수많은 서사의 주름을 더욱 깊이 잡아가고 싶습니다. - P196

"돌봄은 교육이 아니다"라는 문장은 학교에서 맺는 수많은 관계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소외시켰습니다. 교사가 ‘교육전문가’ 정체성을 공고히 하는 과정은 결국 그 자신의 역량을 학생에게 지식을 전달하고 평가하는 것으로 한정시킵니다. 동시에, 교육공간이자 돌봄공간인 교실에서 맺어지는 정동적 여결과 연대를 불가능하게 합니다.

공적 돌봄의 외주화, 돌봄과 교육의 구별 짓기는 학교라는 사회 시스템을 위태롭게 합니다. - P197

비실재하는 사람들은 어떤 면에서 이미 탈실재화(derealization)의 폭력을 겪은 것이다.(…) 비실재하는 사람들에게 폭력이 가해진다면, 폭력의 관점에서 볼 때 폭력은 그 사람들의 삶을 해체하거나 부정하는 데 실패하는 것이다. 그들이 삶이 이미 부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상하게도 살아남아 있기에 다시 (또다시) 부정되어야 한다. 그들은 언제나 이미 상실된 상태이거나 아니면 아예 "존재했던" 적이 없기에 애도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리고 그들은 이렇게 죽어있음(deadness)의 상태로 끈질기게 계속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므로 죽여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애도하는 귀는 그러므로 불가능을 애도한다. - P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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