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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하는 귀 - 듣기의 수행성, 애도와 기억에 관하여
유은 외 지음 / 히스테리안 / 2025년 6월
평점 :

『애도하는 귀』, 유은 기획 및 글, 히스테리안 출판사
— 기억을 ‘하는 것’으로, '듣기'를 정치적 실천으로
유은의 『애도하는 귀』(히스테리안, 2025)는 세월호라는 참사를 둘러싼 목소리와 장소를 예술적 실천과 연결한 아티스트 리서치 북이다. 저자는 남겨진 자가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지, 우리는 어떻게 기억하고 어떻게 애도해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묻는다. 책을 읽어가는 동안 나는 말하기보다 듣기를 강조하는 작가의 시선과 함께 움직였다. 기억은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며 우리를 흔드는 행위라는 것, 그리고 그 기억이 귀를 통해 수행된다는 사실이 새롭게 다가왔다.
나 역시 오랫동안 애도의 방식과 마음이 과연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품어왔다.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한다고 말할 때, 그 마음은 진실할 수 있는가? 마음의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수많은 생각들은 어딘가 불완전한 흉내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이 책은 그 오래된 의문에 뜻밖의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애도는 완전한 재현이나 증명의 행위가 아니라, ‘듣기’라는 수행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말이 되지 못한 신음과 침묵, 공백의 떨림을 들으려는 태도, 끝내 이해할 수 없는 타자의 고통을 그저 곁에서 함께 감당하려는 몸짓, 그것이 애도의 길일 수 있음을 나는 새롭게 깨달았다. 듣기의 수행성은 나의 귀와 몸을 훈련하는 행위이고, 그렇게 듣는 순간 애도는 불가능성을 껴안는 실천으로 바뀐다는 것. 결국 애도의 방식은 바로 그 불완전함 속에 있었다.
「물기의 지형」에서 유은 작가는 교실을 애도의 장소로 경험한다. 공기청정기와 백색등의 소음이 가득한 멸균된 공간, 그 안에서 가능한 것은 정돈된 의례뿐이었고 울컥하는 침묵과 비명은 자리를 잃었다. “무엇이 ‘온전한’ 애도를 불가능하게 만드는가?”라는 물음은 한국 장례식 문화와도 겹쳐진다고 생각했다. 장례식장의 국화와 정해진 절차, 예법은 애도를 틀 속에 가두고 눈물조차 규율한다. 더 나아가 장례식장은 상주에게 과도한 소비를 강요하며 슬픔을 비용으로 치환하는 듯하다. 결국 애도의 자리는 마련되지만 정작 애도는 불가능해진다.
이어 히스테리안 연구자 강병우는 「기울임」에서 규격화된 애도는 멸균된 의례 공간 속에서 이루어지며, 그 과정에서 ‘자리’의 문제는 지워진다고 말한다. 자리가 고정되는 순간 타자의 목소리는 희석되고, 진정한 애도는 불가능해진다. 그래서 그는 “애도는 이 ‘자리 없는 장소’에서 기억을 수행한다”고 했다. 자리 없는 장소란 정해진 형식이나 틀로 묶이지 않은 여백과 공백, 아직 이름 붙지 않은 자리다. 이 통찰은 교실에서 느낀 답답함과 겹치며 더욱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듣기의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책에서는 푸코의 분석을 빌려 ‘듣는 자의 권력’을 지적한다. 의사, 교육자, 재판관과 같은 위치에 있는 자는 듣는 자의 자리에서 발화를 요구하고, 그 발화를 해석하고 평가한다. 반면 화자는 이미 말하기 이전부터 제약을 받으며, 말하는 순간 의미의 상실을 경험한다. 듣기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고, 권력과 긴밀하게 얽혀 있다는 것이다. 『애도하는 귀』는 바로 이 지점을 전복하려 한다. 선별된 말만이 아니라, 말이 되지 못한 소리와 침묵, 신음까지 들으려는 노력은 권력화된 듣기를 넘어서는 윤리적 실천인 것이다. 그것은 그저 귀를 귀울이고 몸을 흔드는 미약한 실천일 수 있지만 바로 거기에서 애도의 가능성이 시작된다.
마지막「문을 나서며」에서 유은은 교육자의 자리를 성찰하며, 교사는 권력을 가진 ‘듣는 자’일 수 있기에 작은 목소리가 끝까지 도달할 수 있도록 동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교실은 지식과 권력이 고정된 공간이지만, 교사가 듣는 자로서 권력을 내려놓을 때 ‘자리 없는 장소’로 바뀌어 보이지 않던 목소리가 드러나는 자리로 변한다. 그 순간 교육은 곧 애도의 또 다른 이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도하는 귀』는 우리에게 애도의 자리를 새롭게 상상하라고 말한다. 멸균된 교실도, 규격화된 의례도 아닌, ‘자리 없는 장소’에서 비로소 애도는 가능하다. 듣기는 끝내 말로 다 하지 못한 감정을 놓치지 않고 받아들이는 일이다. 우리는 그 아픔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곁에 서서 들어주고 함께 버텨 줄 수는 있다. 애도는 완전하지 않은 자리에서 서로를 지탱하려는 작은 실천 속에서 비로소 가능하다는 믿음이 생겼다. **강력추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서 쓴 솔직한 리뷰입니다.
유은의 듣기를 위한 시도, 묵음으로 된 소리의 자리를 더듬어 찾아가는 길은 자신의 형상을 지우는 일이다. 자신을 연민하는 슬픔의 통제에서 벗어나, 작가는 슬픔이 결코 자신을 가둘 수 없게 하는 길을 제시한다. 그것은 생을 겪고 있는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겪는 비애와 사랑을 느끼는 일이다. 생의 모든 것이 ‘삶’의 수레바퀴에 연루된 존재임을 이 작은 책에 각인하며, 우리가 죽고 죽어 기억이 일으킬 바람을 기다린다. - P9
‘사회적 죽음’이란 무엇인가? 어떤 죽음이 사회적 죽음으로 인정되는가? 인정되지 못한 채 잊혀지는 죽음은 없는가? 여전히 듣지 못하는 목소리, 혹은 아직 말이 되지 않은 소리와 울림은 어디에 어떻게 자리할 수 있을까?
‘나’는, ‘우리’는 왜 사회적 죽음을 기억하고자 하는가? 타자의 자리에서, 타자이기에 행해야 하는 애도의 형태는 무엇인가? 듣는 몸과 기억하는 몸에 관한 미적 실천의 현상을 가늠하며 물음표를 따라갑니다. 이 책은 그 여정에 대한 기록입니다. - P12
교실이라는 공간이 애도를 위한 공적 장소가 되었다. 수많은 희생자들을 애도하기 위한 공간 속에서 나는 끊임없이 흩어진다. 온전히 애도하는 마음만으로 젖어 들기에는 어딘가 한 켠을 막아 세운다. 체기가 서린다. 공기청정기와 백색등의 발열 소리가 귀를 찌른다. 적절히 멸균된 장소 안에서 나는 그에 맞는 정돈되고 다듬어진 애도처럼 보이는 행위만이 가능함을 확인한다. 무엇이 ‘온전한’ 애도를 가능하지 않게 한 걸까? 기억을 위한 장소를 구상함에 있어 왜 꼭 공립학교의 관습적 형태를 복제해야만 했을까? 비명과 한숨과 신음, 이명을 위한 틈을 찾고 싶다. 애도를 위한 장소의 마땅한 형태에 대해 떠올린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공존을 위한 공간의 조건은 무엇일까 - P31
말하기, 그래서 말해진 것의 남루함이 불러일으킬 엄청난 경악 속으로 나 자신을 밀어넣기. 그 말이 내 입 밖으로 나오자마자, 나는 서둘러 이렇게 덧붙여야만 할 것이다. 그런 뜻이 아니야, 그런 뜻이 아니야 - P36
기억이 하는 것이 트라우마 서사에서 사랑과 연대의 서사로 이어질 때, 안으로 말려들어가기만 하던 내면의 관습을 멈출 수 있다. 나 아닌 세계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다. 이는 세계와의 접합지점을 새로이 찾게 하는 기점이 된다….
기억이 하는 것이 트라우마 서사에서 사랑과 연대의 서사로 이어질 때 비로소 우리는 애도의 여정을 함께 걷는다.
하지만, 그 애도는 불완전하다. 어쩌면 불가능하다. 불완전하고 불가능하기에 우리는 계속해서 애도의 자리를 유영한다.
애도하는 자의 형상을 떠올린다. 그 자리에는 잠시나마 ‘우리’가 머문다. 우리는 계속해서 구성되고 변화한다. (111)
우리 안에 들어온 이들은 주체가 된다. 애도하는 주체로서 우리는 상실의 자리 곁에 머문다. 어떤 기억하기를 행할 것인가 묻는다. - P111
듣기, 왜 소리 내기가 아니고 듣기인가? 소리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그것이 보이지 않는 것들, 형언할 수 없는 것들을 담을 수 있는 매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소리를 어떻게 낼 것인가’보다는 ‘무엇을 어떻게 들을 것인가’에 주목해왔던 것이다. 내게 소리는 ‘듣기’의 문제이다. - P116
김애령은 푸코의 분석을 빌려 청자의 권력에 대해 언급한다. 근대 지식 권력은 "듣는 위치", 즉 "의사, 교육자, 재판관의 자리에서 ‘고백’을 요구한다." 힘을 가진 자는 듣고 해석하고 평가한다. 그에 반해, 고백해야 하는 화자는 청자의 해석과 평가를 받기 이전부터 공적 말하기에 부합하도록 부서진 말에 표면에 기성의 기표를 덧입혀야 한다. 화자는 말을 꺼냄과 동시에 의미의 상실을 경험한다. 청자는 듣는 동시에 듣지 않음으로써 기울어진 권력관계를 유지한다. 여기서 듣기의 관계적 실천은 실패하며, 청자에게 가닿지 못한 채 맴도는 말들은 변방으로 흩어진다. 실제로 현실정치에서 권력의 자리에 있는 이들의 귀에 가닿을 수 있는 말은 언제나 공적 형태로 가공되어야 한다. 이러한 한계로부터 고민의 가지가 한 줄기 뻗어 나온다. 선별된 말 이전의 소리와 침묵, 말이 되지 못한 말들을 어떻게 들을 수 있을까? 당신이 하지 않은 말과 하지 못한 말, 말줄임표와 쉼표 혹은 침묵 속에 숨겨진 말들을 들 - P118
으려면 나는 나의 귀와 몸을 어떻게 훈련해야 할까? 글을 쓰자고 다짐한 것은 예민한 귀가 되기 위한 조건과 환경을 톺아보고자 하는 마음에서 기인한 것일지 모르겠다. 침묵이 귓가를 스친다. 침묵으로 이어지는 말줄임표를 가늠한다. 들을 수 없는 환경을 묻는다. 들리지 않는 것들의 자리를 더듬는다. 나의 듣기에 대한 관심이 듣는 몸에 대한 윤리적 성찰과 요구로, 듣기의 윤리적 실천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어떻게 들을 것인가? 냉소와 폭력과 같은 자가 당착에 빠지지 않는 윤리적 방법론으로서의 애도와 듣기에 관해 묻는다. 타자의 침묵까지도 살펴 들을 수 있는, "충분히 날카로운" 동시에 온전함에 가깝게 자신을 비우고 들을 수 있는 귀를 단련하고자 한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질문하고 온전함에 가까운 듣기로 이어가는 대화를 만들어 갈 방향을 살핀다. - P119
타자를 ‘바깥’에 세워 애도하는 일은 완벽한 윤리를 추구하려는 모더니즘적 충동은 아닐까. 불가능성이라고는 말로 고통과 책임의 자리에서 응답하길 주저하는 것은 아닐까? 의례화된 장소는 타자에 대한 두 손 모은 마음과 잔잔한 애도가 채워져 있다. 그러나 그곳에는 길길이 날뛰는 애도의 행위도, 타자도 없다. 타자는 바깥에 있고 애도자는 여기에 있다. - P129
애도는 이 ‘자리 없는 장소’에서 기억을 수행한다. - P137
가끔 살아있다는 것과 죽어있다는 것의 사이를 분간하기 어렵다.
고통에 따른 글쓰기가 공허를 이기지 못함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그것에 대해 쓸 수밖에 없다.(중략)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은 죽음이 우리 안에 보존되어 있다는 것뿐이다. - P143
교육자의 자리가 타자의 자리가 될 수 있을까요? 말과 표정을 가다듬습니다. 불필요한 오해나 불신 어린 말을 덜어내기, 듣는 자로서 교사가 지닌 권력 또한 망각하지 않기, 작은 사람의 말이 마침표에 가닿을 때까지 동행하기. - P195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자신과 타자를 돌아볼 수 있다는 수행 가능성을 발견해서 일까요? 그 순간들 속에 겹쳐진 수많은 서사의 주름을 더욱 깊이 잡아가고 싶습니다. - P196
"돌봄은 교육이 아니다"라는 문장은 학교에서 맺는 수많은 관계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소외시켰습니다. 교사가 ‘교육전문가’ 정체성을 공고히 하는 과정은 결국 그 자신의 역량을 학생에게 지식을 전달하고 평가하는 것으로 한정시킵니다. 동시에, 교육공간이자 돌봄공간인 교실에서 맺어지는 정동적 여결과 연대를 불가능하게 합니다.
공적 돌봄의 외주화, 돌봄과 교육의 구별 짓기는 학교라는 사회 시스템을 위태롭게 합니다. - P197
비실재하는 사람들은 어떤 면에서 이미 탈실재화(derealization)의 폭력을 겪은 것이다.(…) 비실재하는 사람들에게 폭력이 가해진다면, 폭력의 관점에서 볼 때 폭력은 그 사람들의 삶을 해체하거나 부정하는 데 실패하는 것이다. 그들이 삶이 이미 부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상하게도 살아남아 있기에 다시 (또다시) 부정되어야 한다. 그들은 언제나 이미 상실된 상태이거나 아니면 아예 "존재했던" 적이 없기에 애도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리고 그들은 이렇게 죽어있음(deadness)의 상태로 끈질기게 계속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므로 죽여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애도하는 귀는 그러므로 불가능을 애도한다. - P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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