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박완서 장편소설, 웅진지식하우스
❶ 자화상을 그리듯 쓴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기억력에만 의지해 써 보았다”는 작가의 고백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박완서는 단순한 회고담에 머무르지 않는다. 기억의 공백을 상상력으로 메우고, 불확실한 기억을 “각자의 상상력을 따른다”는 통찰로 전환한다. 결과적으로 이 작품은 한 사람의 이야기를 넘어 시대의 이야기를 함께 담아낸 자화상이 되었다. 독자는 박완서의 성장기를 따라가면서 동시에 한국 현대사의 굴곡진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❷ 어머니의 형상 ― 신념과 한계
작품의 한 축은 어머니의 존재다. 홀로 맏며느리의 위치에서 가부장적 전통을 거슬러 아들을 서울로 보내고, 딸에게 “신여성이 되라”고 다그치며, 물장수를 부러워할 정도로 교육을 통한 계급 상승을 꿈꾸었던 인물. 그는 가족의 생존을 위해 기지를 발휘했고, 억척스러움과 당당함으로 자녀들의 길을 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에게는 시대적 제약과 개인적 한계가 있었다. 민족적 자각과 저항보다는 눈앞의 생존과 체면에 더 치중했고, 자식 사랑은 때때로 잔혹한 이기심으로 변주되기도 했다. 작가는 이 복합적인 모성을 애증 어린 시선으로 그려낸다. 어머니는 강인하면서도 모순된 인물로, 전쟁과 분단의 격랑 속에서 한 가족의 운명을 이끌어갔다.
❸ 근현대사의 풍경 속에서
작품의 시간적 배경은 일제강점기에서 해방, 분단과 한국전쟁에 이르는 격동기다. 소녀의 눈에 비친 풍경은 “저녁노을이 피 흘리는 듯한 비애”에서부터, 일본어 강제 교육, 친일 혐의로 인한 마을 청년들의 분풀이, 좌익과 우익의 충돌, 전쟁 중의 생리 중단과 ‘벌레가 된 시간’까지 이어진다. 개인의 성장기는 곧 민족사의 상흔과 맞물리며, 기억은 역사적 증언이 된다. 작가는 ‘벌레 같은 시간’을 증언해야 한다는 예감 속에서 글쓰기를 결심하는데, 이는 문학이 ‘기억의 윤리적 형식’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❹ 문학적 의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한 소녀의 성장소설이자 개인의 내밀한 기억과 역사적 집단 경험을 증언하는 문학이다. 작가는 “소설이라 불러도 되는지 모르겠다”면서도 결국 소설이라는 틀을 선택한다. 이는 문학이야말로 불확실한 기억을 담아내고, 상실과 비애를 의미로 바꾸어내는 최적의 장르라는 믿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작가의 개인 이야기는 세대의 이야기와 겹치고, 어머니의 삶은 한국 여성들의 삶과 연결되며, 소녀의 성장 과정은 한국 근현대사의 아픔을 담고 있다. 그래서 읽을 때마다 박완서 작가 개인의 삶을 넘어 한 시대의 풍경을 떠올리게 되고, 동시에 기억이 문학으로 바뀌는 과정을 확인하게 되는 것 같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서 쓴 솔직한 후기입니다.
감수성과 기억력이 함께 왕성할 때 입력된 것들이 개인의 정신사에 미치는 영향이 이렇듯 결정적이라는 걸 생각할 때, 나의 그런 시기의 문화적 환경이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너무도 척박했었다는 게 여간 억울하지가 않다. 그러나 한편 우리가 밑바닥 가난 속에서도 드물게 사랑과 이성이 조화된 환경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엄마 덕이었다고 감사하는 마음이 생긴 것은 강경애의 소설을 읽고 나서였다.(p.209) - P209
자식의 안전을 위해 법에서 금하는 불온한 사상을 두려워하면서도, 자식이 위험을 무릅쓰고 하는 일이니만치 뭔가 위대한 일이라고 믿고 싶은, 가장 우리 엄마다운 이중성이었을까? 아니면 엄마도 임의로 할 수 없는 불길한 예감 때문이었을까?
모성애도 이념 투쟁의 영향을 받으면 이렇게 악몽이 되고 만다. 다시는 생각하기도 싫은 더러운 시대였다.(p.248) - P248
나는 밤마다 벌레가 됐던 시간들을 내 기억 속에서 지우려고 고개를 미친 듯이 흔들며 몸부림쳤다. 그러다가도 문득 그들이 나를 벌레로 기억하는데 나만 기억상실증이 걸린다면 그야말로 정말 벌레가 되는 일이 아닐까 하는 공포감 때문에 어떡하든지 망각을 물리쳐야 한다는 정신이 들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잊어버린 부분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 여러 군데서 개별적으로 당한 일들이 한 묶음으로 단순화돼 남아 있고, 구체적인 사건들을 추상적으로밖에 생각해 낼 수가 없다. 그건 몸으로 벌레처럼 기었을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폭력에 굴복당했다는 증거겠지만 어쩌랴, 그렇게 생겨 먹은 게 보통 사람이 안 미치고 견딜 수 있는 정신력의 한계인 것을.(p.293) - P293
그때 문득 막다른 골목까지 쫓긴 도망자가 획 돌아서는 것처럼 찰나적으로는 사고의 전환이 왔다. 나만 보았다는 데 무슨 뜻이 있을 것 같았다. 우리만 여기 남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약한 우연이 엎치고 덮쳤던가. 그래, 나 홀로 보았다면 반드시 그걸 증언할 책무가 있을 것이다. 그거야말로 고약한 우연에 대한 정당한 복수다. 증언할 게 어찌 이 거대한 공허뿐이랴. 벌레의 시간도 증언해야지. 그래야 난 벌레를 벗어날수가 있다. 그건 앞으로 언젠가 글을 쓸 것 같은 예감이었다. 그 예감이 공포를 몰아냈다. 조금밖에 없는 식량도 걱정이 안 됐다. 다닥다닥 붙은 빈집들이 식량으로 보였다. 집집마다 설마 밀가루 몇 줌, 보리쌀 한두 됫박쯤 없을라구. 나는 벌써 빈집을 털 계획까지 세워 놓고 있었기 때문에 목구멍이 포도청도 겁나지 않았다.(p.309) - P3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