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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을 할인가에 판매합니다 - 신진 작가 9인의 SF 단편 앤솔러지 ㅣ 네오픽션 ON시리즈 1
신조하 외 지음 / 네오픽션 / 2022년 3월
평점 :
같은 휴머노이드와 공존하게 되는 미래를 상상해도 이토록 다른 세상이 펼쳐질 수 있을까 감탄하며 읽었다. 다채로운 SF 세계관을 한 권의 책에서 접하고 떠올려 볼 수 있어서 좋았다. 한 권의 책에서 이렇게 많은 SF 이야기를 읽어본 것은 처음이라 신선한 경험이었다.
무뇌증으로 태어났지만 ‘투명한 뇌’ 기술로 인해 변호사로 일하고 있는 「인간의 대리인」, 내 생각을 상대방에게 주입하여 그대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기계 ‘스키마 리셋터’로 실험을 하는 「스키마 리셋터」, 손녀를 찾으러 가는 도중에 휴머노이드 ‘올퓌’를 만나 애정을 느끼는 「나와 올퓌」, 아동학대를 당한 ‘영원’과 그의 후견인 ‘인피니티 2호’에 대해 연구하는 「영원」, 감정적 체험이 돈으로 거래되는 「감정을 할인가에 판매합니다」와 도덕을 사고 팔며 버전에 따라 도덕적인 사람으로 취급하는 「도덕을 도매가에 팝니다」, 인공자궁 기계 ‘움시스’를 통해 아이를 가진 대통령과 그 아이가 납치를 당하게 되는 「대통령의 자장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직업 없이 살아가고 직업을 가진 사람이 특수한 계층이 되어가는 「정신의 작용」, 프로그램 오류를 분석하다가 아내 ‘미래’의 장례식 영상을 보게 되는 「미래의 죽음」.
휴머노이드와 가상 기계가 등장하는 이야기는 먼 미래처럼 느껴졌다. 아직은 생생하게 떠오르지 않거나 실감하기 어려운 부분도 존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정을 할인가에 판매합니다」, 「도덕을 도매가에 팝니다」, 「대통령의 자장가」, 이 세 작품은 감정적 노동을 의뢰거나 남자도 인공 수정이 가능한 세상 등 가까운 미래처럼 느껴지는 상황들이 펼쳐져 있어서 더 이입하여 읽을 수 있었다.
9편의 소설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단편은 「도덕을 도매가에 팝니다」였다.
도덕을 버전에 따라 구매하면서 도덕적인 사람으로 취급한다는 설정이 인상적이었다. 이러한 설정은 미래와 가까웠지만, 도덕법을 위반하는 사람은 이마에 ‘도덕법 위반’이라는 글귀를 새기고 몸에 밧줄을 묶어 장작더미에 불을 붙여 화형시키는 모습은 과거의 마녀사냥을 하는 모습과 닮아있었다. 도덕법 위반을 한 자들을 벌하는 방식은 미래 같지 않아서 의아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는 듯한 소설이라 새로웠다.
아무리 SF, 미래지향적인 소설이지만 허황된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그 세상에서 공존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본질을 들여다볼 수 있어서 의미 있는 책이었다.
이쯤 되니 나는 정말 진지하게 의문이 들었다. 대부분 간단한 임신중절수술로 없애버리는 무뇌증 아이를 10개월 동안 품으면서 내 부모님도 저렇게 생각했을까? 현상 유지를 하면 어떻게든 되겠지, 라는? 가끔 엄마에게 이런 질문을 할 때면 엄마는 오히려 의아한 듯이 내게 묻곤 했다. 손가락이 하나 없었으면 그 이유로 너를 없애야 했니? 아니라고? 그렇다면 왜 뇌가 없다고 너를 버려야 하지? 그녀가 그런 식으로 되물으면 나는 할 말이 없어지곤 했다. 그녀의 변론은 지금 내 눈앞의 엘리트 변호사의 변론과 닮아 있다. 논리적으로는 흠결이 없지만 받아들이기에는 꺼림칙한. 그 앞에서 나는 ‘엄마, 하지만 나는 사실 당신의 자식을 조종하고 있는 해파리에 불과할지도 몰라요’라는 말을 차마 내뱉지 못했다. - P31
날이 밝아올 때쯤, 나는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금지 명령을 내리지 않겠다고 올퓌에게 말했다. 올퓌는 그저 씁쓸하게 웃었다. 세상이 돌아가는 법칙 전체를 바꿀 수는 없지만, 나만이라도 그런 불평등한 관계에서 탈피하고 싶었다. 애초에 내가 올퓌에게 정식으로 금지 명령을 내린 적도 없었다. 원래 진정한 관계에 강요나 강제 따위는 필요하지 않은 법이니까. - P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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