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비에서 양반으로, 그 머나먼 여정 - 어느 노비 가계 2백년의 기록
권내현 지음 / 역사비평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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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똥이(介叱同), 갑돌이(甲乭), 돌쇠(乭金), 마당쇠(麻堂金), 강아지(江牙之), 도야지(道也之), 송아지(松牙之), 두꺼비(斗去非), 더부사리(多夫沙里), 개부리[개불알](介不里), 넙덕이(汝邑德), 작은년(自斤連), 작은노미(自斤老未), 개노미(介老未)


조선시대 양반들이 그들의 노비들에게 붙여줬던 이름이다. 개똥이, 갑돌이까지는 애교로 보아 넘긴다 해도 강아지, 돼지, 심지어 개부리, 개노미에 이르면 아무리 노비를 천대했기로소니 어찌 이리 불렀을까 어안이 벙벙해지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은 조선 후기 17~19세기, 신분적 제약에서 벗어나 양반을 꿈꾸었던 수봉이란 노비 가계의 열망과 도전과정을 흥미롭게 추적한 책이다. 저자는 경상도 단성지역 호적대장을 사료로 해 원래 노비였던 수봉이 어떻게 평민으로 면천(免賤)하는지, 그리고 그 후손들이 다시 5~6대에 걸쳐 어떻게 중인, 궁극적으로 양반[幼學]가문을 지향해갔는지 보여주고 있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1678년 호적에서 수봉은 심정량이란 양반의 사노비였다. 그런데 수봉의 아들인 김흥발의 1717년 호적을 보면 김흥발은 물론 수봉은 평민으로 신분이 바뀌었다. 수봉의 6세손인 김정흠의 1858년 호적에 이르면 이 가계에서 노비나 평민의 흔적은 더는 찾아볼 수 없으며 그야말로 양반의 호적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저자는 한 노비 가계의 혈통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당시 시대를 읽을 수 있는 여러 흥미로운 모습들을 많이 보여주고 있다. 이를테면 각자의 사회경제적 필요에 따라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부유한 양반 남성과 그렇지 않은 평민 여성의 재혼, 노비들이 또 다른 노비를 소유하고 신분상승을 도모하는 과정에서 성과 본관을 획득하는 모습 또는 반대로 그것을 바꾸는 양태, 동성동본을 회피하고 양자를 들이며 동성촌락을 이루는 것과 같이 양반문화를 모방하는 모습들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자료의 제한과 호적이라는 자료의 특성상 속 시원히 밝혀주지 못하는 부분들이 없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단점이라기보다는 역사적 진실의 한 단면에 빛을 비추려 애쓰는 역사학적 작업의 가치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불완전한 호적대장에서 수봉의 흔적을 좇는 저자의 서술을 따라가다 보면 마치 퍼즐을 풀거나 또는 추리소설 읽는 것 같은 긴장감을 느낄 수 있다.


책의 서문은 18세기 한 노비가 죽자 그 주인이 그를 묻고선 삼한 땅에 명문가 많으니 다음 세상에는 그런 집에서 나게나라고 읊조렸다는 일화로 시작한다. 아마 양반으로 태어나지 못했던 이 땅의 수많은 평민, 천민들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신분관념이 거의 사라졌다고 해도 좋을 오늘이지만, 여전히 우스갯소리나마 전생에 왕자, 공주, 양반이었을 거야.” 라는 말은 들어봤어도 그 반대의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사실 우리 대부분은 평민, 천민의 후손이었을 것임에도 말이다. 우리 혈통(?)을 비하하고 자괴감을 갖자는 말이 아니다. 다만 지금 우리가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누리는 신분적 평등을 당연시하기에 앞서 그것을 갈망했던 사람들과 그들의 수백 년에 걸친 노력이 있었음을 한 번쯤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권력/경제력의 편중·고착으로 오늘날 또 다른 특권신분층이 형성되고 있지 않은지를 경계하는 저자의 마지막 메시지도 같은 맥락에서 새겨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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