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내셔널 부커 상 최종 후보까지 올라 역주행했던 압도적 서사에 최고의 몰입감을 주었던 <고래>의 천명관 작가가 10년 만의 신작을 선보였다. 신작이 나오기 전 올해 가장 기대되는 거장의 귀환을 소개하는 어느 영상에서 소설 제목도 알 수 없었던 천명관의 소설을 뽑았는데 그 영상을 보고 그날이 언제 오나 무척 기대했다.
<아코디언>은 1950년대 서울을 배경으로 한다. 전쟁이 끝난 후 부모를 잃은 고아들이 모여 사는 판자촌 앵벌이들의 생존기를 다루고 있다. 주인공 동이는 의사였던 아빠가 전쟁이 터지자 군의관으로 차출된 뒤, 결국 돌아오지 않고 엄마마저 떠나가 버려 결국 혼자 남아 앵벌이로 살아간다. 동이처럼 부모가 없는 아이들이나 눈이 먼 아이, 한 쪽 팔이 없는 아이, 소아마비 아이, 앉은뱅이 아이 등 장애가 있는 아이들이 모여 양목사 (아이들은 그를 아버지라고 부른다.)의 명목상 보호 아래 앵벌이를 하여 그에게 돈을 바치고 있다. 이 양아버지랑 사람은 아이들이 불쌍하게 보여 돈을 더 많이 받기 위해 겨우 한 끼만 먹기고 조금만 규칙을 어겨도 매질을 하고 거기에 마약까지 먹여서 아이들이 정신과 몸까지 파괴하면서 돈벌이로 아이들을 극한의 고통으로 몰아넣는다. 아이들이 이 늪과 같은 곳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지,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데 시대가 시대인지라 어느 하나 이들의 삶에 도움을 줄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오직 아이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 줄 뿐...
악이 떠난 자리에 봄이 오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악이 들어와 더 혹독한 겨울이 되는 법. <고래> 만큼의 압도적인 매운맛 서사는 아니지만 소설에서 대체 불가한 이야기꾼 작가의 필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전개라 쉽게 책을 덮을 수 없다. 단숨에 읽을 수 있는 몰입감과 끝을 알 수 없는 긴장감과 마음이 저려오는 아픈 서사와 한 문장 한 문장에서 느껴지는 힘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인간다움이란? 삶이란? 이런 원초적 질문을 던지는 소설이었다.
"아코디언을 치는 동안, 슬픔과 고통은 깊은 깨달음으로 정화되고 안개처럼 뿌옇게 가려졌던 진실은 거울처럼 선명해졌다. 그렇게 동이는 글자가 아닌 소리를 통해 벽 너머의 세상으로 통하는 길을 더듬더듬 찾아가고 있었다."P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