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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있는 리플리 ㅣ 리플리 5부작 1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김미정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10월
평점 :
1.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영화를 통해서였다. 르네 클레망의 <태양은 가득히>, 안소니 밍겔라의 <리플리>, 히치콕의 <열차 안의 낯선 자들>, 토드 헤인즈의 <캐롤>까지. 인상 깊게 본 서사의 원작이 하이스미스라는 한 줄기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반가웠고, 언젠가 그 이야기들의 원작을 한번 읽어봐야겠다는 막연한 소망을 품고 있었다.
영화 태양은 가득히와 리플리에 대해 내가 지금까지 갖고있는 이미지는 빛나는 지중해의 파도, 잘생긴 청년들(디키와 리플리)의 하얀 리넨 셔츠, 요트 놀이, 속마음이 비치지 않는 리플리의 살인, 그 이후 숨막히는 긴장감 속 수습들 그런 것이었다. 시각적인 면과 스릴에서는 충분히 만족스러운 체험이었지만 소설 속에서 1인칭 시각의 리플리는 어떻게 묘사되는지 내내 궁금했다. 다만 하이스미스가 한국에서는 그리 대중적이지 않아서 그런지 10년 넘은 판본밖에 없는 것이 조금 아쉬웠다(물론 그 판도 영화 관련 책을 많이 내주시는 좋은 출판사에서 냈다). 그러던 차에 이번에 너무나 아릅답게 재출간된 리플리 시리즈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2. 스튜디오 워크룸의 디자인으로 세련되게 완성된 표지는 5권을 모두 모으면 “Ripley”의 글자를 보여주고 있고, 페이지 넘버링과 서체마저 범죄스릴러 소설에 적합하게 아름답다. 영화들이 1권의 내용 정도만 담고 있을 정도로 1권만으로 충분히 완성된 이야기지만, 이렇게 5권이 모였을 때 전체적인 모양새를 갖추고 있으면 소장 욕구를 자극할 수 밖에 없다. 260쪽 정도의 볼륨이지만 손가락을 딱 걸칠 정도의 타이트한 여백(내 취향이다)을 잡고 있기도 했고, 리플리의 내밀한 심리 묘사를 한자 한자 읽다 보면 400쪽 정도의 책을 읽는 듯한 밀도가 있었다. 을유문화사 책으로는 비코팅 표지를 자주 접했는데 책의 긴장도를 반영했는지 코팅 표지로 내놓은 것도(손에 땀이 많은 편이라) 개인적으로는 만족스러운 지점이었다.
3. 재능 있는 리플리는 소소하게 사기나 치고 한량처럼 살던 톰 리플리가 디키 그린리프의 부자 부모님의 의뢰를 받아 미국으로 디키를 데려오기 위한 임무를 받아 유럽으로 떠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톰은 디키가 유럽에서 ‘돈 많은 백수’로 잘 살고있는 모습을 보며 강한 질투감을 느낀다. 심지어 생각처럼 디키를 미국으로 돌려보내겠다는 임무 수행은 어려워 보이던 차에 디키의 옷장에서 옷을 꺼내입고 흉내내는 장면마저 들키게 된다. 톰은 엉망이 되어버린 관계를 수습해보고자 이별여행을 기획한다. 그리고 요트 위에서 디키의 삶을 자신이 빼앗을 수 있다는 충동과 망상에 사로잡혀 그를 죽이고 만다. 그 뒤에는 디키의 행세를 하며 서명을 위조하고, 디키의 친구들과의 연락을 따돌리며 자신은 디키가 되고, 톰은 결백함을 유지하려는 온갖 노력을 다한다.
4. ‘리플리 증후군’은 현실 세계를 부정하고 허구의 세계를 진실로 믿고, 거짓말을 일삼는 반사회적 인격장애라고 한다. 누구나 현실 세계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욕구가 있을 것이다. 자기 나름의 노력도 하고 취향도 있다고 생각은 하지만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굴레를 벗어나기에는 역부족이라고 느낄 때 그 마음은 한계에 달할지도 모른다. 이야기 초반부의 톰 리플리는 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이 리플리가 될 수 있는 욕망의 씨앗 정도는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톰이 그 가치를 알고 있는 비싼 것들에 대해 일일이 소중함을 느끼지 않고 당연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디키에 대해 열등감을 느끼면서.
5. 영화 추격자 이후로 쏟아졌던 사이코패스 살인자의 연쇄살인 이야기는 이제 흔한 이야기가 되었다. 평범한 마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살인자의 맥락 없는 이야기는 살인 장면의 공포와 스릴에 초점을 둔다. 그런 와중에 1955년에 출간된 리플리를 다시 읽는 의미는 어디에 있을까.
그저 사이코패스 살인기의 측면에서 보면 이 책을 덮으면서 ‘아, 이 과정을 통해 톰 리플리라는 나쁜 놈이 결국 성공했구나’ 하는 소감이었다. 하지만 해설을 읽으면서는 다른 깨달음을 얻었다. 후속작 없이 끝내도 깔끔한 1권만의 이야기로 만든 영화를 봤기 때문에 전체 5부작 속의 톰을 고려하지 못한 것이다. 톰은 디키를 찾아 유럽으로 오고, 살인을 저지르고, 수습을 하는 과정을 통해 일련의 변화를 하게 된 것이었다. ‘리플리 증후군’을 앓는 톰이 계획된 살인과 도피를 성공적으로 완수하는 살인의 과정이 아니라, 질투심, 열등감처럼 평범한 작은 감정에서 시작한 마음이 현실을 부정하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세상만을 믿어버리는 전환의 과정을 섬뜩한 내면묘사를 통해 느낄 수 있는 것이 이 소설의 묘미라고 생각한다. 이야기는 계속된다. 행복한 커플이 결혼식을 올리는 엔딩을 맞이하더라도 인물들의 삶은 끝나지 않는 것처럼.
톰 리플리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고, 앞으로는 자신이 얻었다고 생각하는 현재를 유지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다음 권을 읽는 순간이 기다려진다.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