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딴방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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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엇이라도, 그게 슬픔일지라도

<외딴방>
신경숙
문학동네

  이 글은 소설일까? 나는 생각해 본다. 소설이 맞다. 그래 그러니 소설로 나온 거지. 리얼리즘에 대한 당혹감. 거리가 느껴진다. 나 이전에, 14년 전에 그녀는 이 소설을 쓰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과연 이런 글이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신경숙 그녀는 누구일까? 나는 새삼스레 그녀에 대해 생각해 본다. 1990년대 한국 문단에 그녀를 빼면 누가 있을까. 그 시대를 떠올리면 남자는 윤대녕 여자는 신경숙, 이라고 조건반사처럼 떠오른다. 시처럼 섬세하고 아름다운 문체. 쉽사리 넘기기 힘든 고독이 바탕 된 이야기들. 7년 전 예술대학 면접 자리에서 난 신경숙 같은 소설가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작품은 겨우 2001년도 이상 문학상 수상작인 <부석사>를 읽어본 것이 전부였다. 나는 너무 무지했고 어렸다, 물론 지금도. 그래도 그땐 열정이란 게 존재했다라고 말해본다. 아마도, 지금 나는 열정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멀리 떨어진 곳에 불시착했다. 글을 쓰기 위해 내가 행하는 모든 것들이 원하고 원해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것을 ‘성숙’이라고 부를 수도 있고 ‘매너리즘’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대학에 입학해 그녀의 소설을 오랫동안 보지 않는다. 아, 김영하를 만났다.

  내게 글쟁이들은 동경이자 질투의 대상이었다. 나도 시골에서 태어나 좀 더 많은 경험을 했으면. 여러 작품들이 말해주는 천재적 감성들이 나를 조여 왔다. 나는 내 이야기를 할 게 없어. 너무나 평범해. 그때 아마 김영하가 나에게 위로였는지 모른다. 도시의 이야기를, 자극적인 소재를, 거칠 것 없는 탐미적인 소재들이 나의 롤모델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써야해. 그로부터 이렇다 할 이야기하나 만들지 못하고 수 없는 시간을 소설가들을 시기하는 데에 보냈다.

  『엄마를 부탁해』. 몇 달 전부터 책장에 꽂힌 상태를 유지하는 신경숙의 최근작이 내 눈에 들어온다. 밀레의 <만종>이 프린트 된 커버의 다홍색 책. 그 책이 대박을 터뜨렸다. 한동안 사람들의 입에 다시 한 번 신경숙, 신경숙이 오르내렸다. 지하철에서, 길에서, 버스에서 그 다홍색 커버가 자주 눈에 들어왔다. 아- 나는 오랫동안 그녀의 책을 보지 않는다. 대신 뒤늦게 들어온 책들을 읽었다. 감탄, 감탄. 요즘은 잘 쓰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어디 잘 쓰는 사람만 많겠는가. 어제 노래를 하는 친구와 마주앉은 자리에서 커피를 홀짝인다. 에어컨 바람이 시원하기만 하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랫말을 흥얼거리며 이승철, 김건모를 이야기한다. 요즘은 노래 잘 부르는 사람도 너무나 많다. 내게 90년의 기억에 신경숙은 없다. 단지 그녀의 화려한 전성기를 그저 몇 백만 부씩 팔렸던 기록으로 기억할 뿐이다.    

 

 

   가슴이 얼마나 아리던가. 그녀의 소설을 읽는 일이란 게. 스무 살, 소설을 읽다 너무 잘 써 눈물까지 흘렸다는 영문과 누나의 말을 떠올린다. 어떻게 책을 읽고 운다는 거지? 그녀는 영문과인데. 나는, 나는 문예창작학과잖아. 삐뚤어진 열정은 지금 생각하면 사소한 것들 마저 전부 질투했다. 왜 내겐, 그런 감수성은 없는 거지. 오히려 나는 슬픈 드라마를 보고 눈물을 잘 흘렸다. 그러나 책은,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그녀는 이 책을 쓰면서 몇 번이나 눈물을 훔쳤을까? 오랫동안 묵혀뒀던 기억들을 더듬어 가는 일 년이란 시간동안 그녀의 소설은 완성이 되었겠지. 어쩌면 흐릿한 기억이 아니라 영원토록 지워지지 않는 것들을, 마치 없던 것처럼 삭제하고 싶었던 나날들을 퍼내는 일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낯선 서울이 준 이물감 때문에 웃어도 웃어도 절대 행복할 수 없었던 5년간의 기억을, 임금님 귀가 당나귀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뱃속으로 꾹꾹 눌러 담아야 했던 사내처럼, 그래서 결국은 배가 부풀어 오르는 화병을 견디다 못해 숲에 가서 외친 것처럼 글로 풀어내야 했는지도 모른다.

  400페이지가 넘는 제법 두툼한 책을 읽고 있노라면 그녀의 첫 장편 『깊은 슬픔』이 생각난다. 아니 ‘깊은 슬픔’이란 바로 이런 것이겠지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그 책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그저 이러한 이야기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하는 짐작을 할 뿐이다. 
  외딴방. 서른 몇 개쯤 고만고만한 크기의 방들이 오종종 늘어선 가리봉동의 공장단지 동네에서 그녀는 공순이였던 기억을 끄집어낸다. 박정희를 넘어서 전두환 정권 세대로 이어지는 기간 속에 최하층의 이미지들이 가져다 준 슬픔들이 그녀의 침착한 문장에 써내려진다. 
  과연 저런 이야기들을 경험한 사람만이 글을 쓰는 거야. 질투보다 경외감에 가득 찬 내가 생각한다. 나는…… 나는 뭐지? 환상. 새로운 것을 찾아 갔다. 오랜 시간 그 안에서 떠돌았다. 고민하고, 고민하고, 고민해도 슬퍼지기만 했다. 
  그녀는 이 소설을 쓰기 위해 한동안 맴돌았다. 많은 갈등이 있었던 것이다. 잊혀 지지 않는 기억을, 지워버리고 싶어 괴로움에 나날이었던 시간을 솔직히 끌어내는 이 소설이 그녀에게는 치유가 되었을까? 숲 속에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치고 나서야 속이 시원해진 사내처럼 그녀도 더 이상 고통에서, 자신의 주위를 살아 움직이듯 떠돌던 희재 언니의 기억들 속에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나는 결국 책이 끝날 때까지 아무것도 짐작하지 못한다.

  그래도, 적어도 그녀는 인정했으리라. 그 시간을, 자신의 주위에 존재했던 사람들을, 종로에서 수원행 열차를 타면 갈 수 있는 가리봉동 역을, 그리고 그 좁디좁은 외딴방을. 열다섯부터 희재 언니의 사건이 일어나기 까지 지냈던 그 때의 기억들을.

  ‘자신을 인정하자……’ 나는 두려웠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미 거짓으로 만들어진 나의 이미지들이 한순간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그녀에게, 그 슬픔의 시간 속에 가족이 존재했고, 외사촌이 존재했고, 공장의 동녀들이 존재했고, 최홍이 선생님이 존재했고 그리고 기쁨이자 고통이었던, 썰물이자 밀물인 그녀, 희재 언니가 존재했다. 누군가와 함께 할 수 있어서 그녀는 그 시간을 이겨냈을지도. 나 역시 가족을 떠올려 본다. 나도 그녀처럼 모든 걸, 인정하리라. 나의 존재를, 내 모습을 단지 평범하게 폄하했던 것, 나를 있는 그대로 포장했던 모든 것들을 버리고 인정하리라. 그녀의 치유법이 내게 깊은 슬픔 속에 싹을 틔운 한 줄기 희망처럼, 제주도의 반짝이는 모래 빛의 모든 것들처럼 힘을 준다. ……그리고 난 오랫동안 마음으로 많은 소설들을 통해 울음을 터뜨렸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기억에 남는 문장  

 

  오랫동안 글쓰기의 열망이 사라진 건 아닌가 하여 고독한 나날들이었다고, 쓰겠다는 말만으로 일생을 보내게 되는 건 아닌가 하여 종일 우두커니 앉아 있는 날이 많았다고. 
  그의 고독  

  나는 푸른 새벽에 그가 오 년 만에 문예중앙에 발표한 옛우물, 을 읽었다. 고독을 헤치고 돌아온 그는 물방울이 묻은 산호 같았다. 소설 쓰는 자의 주눅듦과 두려움이 만들어낸 것이 옛우물이라면, 그 주눅과 두려움은 소설 쓰는 자의 필요조건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다시 인간의 한데를 더듬으며 남루했던 여자들을 신화속으로 데려가고 있었다. -P231

  어디에 가서 앉아야 할지 모를 어설픔이 남긴 마음의 상처. 세월이 이렇게 많이 흘러서도 사람 많은 곳에 가야 할 일이 생기면 맨 먼저 생각하게 되는 것. 그곳에 가면 내 자리는 있을까. 어설퍼질 것 같으면 안 가게 돼버리는 성장하길 멈춘 무의식. -P257  

 

 

  “그렇지 않아. 잊지 않고 있으면 할 수 있어. 꿈을 잊으면 그걸로 끝이야. 언제나 꿈 가까이로 가려는 마음을 거두지 않으면 할 수 있어. 가고 또 가면 언젠가는 그 숲속에 갈 수 있을 거야. 거기까지 못 가도 그 근처엔 가 있을 거라구.” -P258

 

  나의 외사촌은 늘 나는 사진 찍는 사람이 될 거야, 라고 했다. 내가 언제나 나는 글 쓰는 사람이 될 거라고 했듯이. 외사촌의 발랄함이나 나의 우울은 그곳에 살면서도 늘 그곳 사람들과 자신들이 다르다고 생각한 데어서 솟아나왔는지도 모른다. 외사촌과 나는 그곳에 오래 머무를 생각이 없었다. 벌써 나의 외사촌은 떠났고 나도 떠날 것이다. -P331


  엄마의 가족을 격려하는 방식은 그 집의 낡은 부엌에서 음식을 만드는 일이다. 엄마는 가족들 사이에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이 발생할 적마다 그 집의 재래식 부엌으로 들어갔다. 집안의 남자들. 사랑하지만 이따금 완전히 이해하기는 힘들었던 아버지와 장성해가는 아들들이 엄마를 실망시킬 적에도 엄마는 힘없이 부엌으로 갔다. 엄마가 뭘 아느냐고 대드는 딸에게 놀랐을 적에도. -P342

  어떤 일들을 글로 옮기다 보면 많은 부분들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 무엇을 드러냄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들이 간략하게 축소되어버리는가 하면 어렴풋했던 부분들이 방대해지고 길어진다. 내가 쓰는 글인데도 내 마음대로 되지가 않는다. 끊임없이 솟아오르거나 끊임없이 사라져버리는 순간들 때문에. 그래도 이제부터는 어떤 얘기를 하든 그 얘기가 오로지 나 자신만을 향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P389

 

  이제 내 가슴속을 떠나 그녀가 어디로 가는지. 그곳이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소용돌이나 퇴적물이나 정적 속은 아닐 것이다. 내 가슴에 소망스런 다른 이야기들이 이렇게 솟아나고 있으니. -P405

 

  끝끝내 숨어버리는 것들을 억지로 끌어낼 순 없었다. 그러나 내가 애착하는 것들은 끝끝내 숨어버리는 것들이다. 쉽게 끌려나오지 않고 숨어버리는 것들의 진실이 언젠가는 삶을 다른 각도로 바라볼 수 있는 심미안이 되어 돌아올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디에서 어떤 삶을 살고 있든 문학은 그 진실의 고귀함을 잊지 않을 것이라고. P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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