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인디언들이 잃어버린 단어 하나를 기억하고 있다. 퍼퍼위. 아메리카 원주민의 말인데, 퍼퍼위는 ‘버섯을 밤중에 땅에서 밀어올리는 힘‘을 뜻하는 단어다. 내가 이 단어를 발견한 것은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 출신의 로빈 월 키머러가 쓴 『향모를 많으며」라는 책에서였다. 이 단어를 만든 사람은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생명을 만드는 에너지가 우리를 감싸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런 것이 주변에 있다고 생각하면, 그런 것을 느끼기 시작하면더 잘 살 수 있다. 키머러가 만난 그녀 부족에서 증조할머니뻘 되는 위치를차지하는 원주인 할머니의 말에 따르면 언어는 그냥 말이 아니라 ‘세상을바라보는 방식‘이 담겨 있는 문화다. 인디언들이 사라질 때 세상(자연)을바라보는 가장 좋은 방식 하나가 사라져갔다. 가끔 아침 출근길에 공원에서
"퍼퍼위‘ 하고 속으로 한번 속삭여본다. 밤새 생명을 키운 보이지 않는 힘에조금 더 가까이 있고 싶어서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힘들과 함께 힘을 낸다.
- P211

나는 정혜윤이고 오늘 나는 박쥐다. 나는 니파, 사스, 코로나 바이러스의 원인으로 지목되었고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5천만 년 전에 지금 이 모습이 되었다. 내가 인간에게 다가간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나에게로 왔다.
그 뒤로 많은 것이 파괴되었다. 나는 서식지에 애정이 있었다. 고향을 떠날 때마다 마지막으로 한번 돌아보지 않기란힘들었다. 하지만 지금 나를 괴롭히는 것은 내가 혐오의 대상이라는 사실이 아니다. 니파 바이러스 때는 110만 마리의돼지가 사살되었다. 사스 때는 사향고양이가 끓는 물에 던져졌다. 코로나 때는 밍크와 천산갑이 죽임을 당했다. 나는돼지와 사향고양이와 밍크와 천산갑을 통해 세상을 이해했다. 인간은 책임 전가의 왕이다. 나는 인간의 눈에는 혐오.
의 대상일 뿐이지만 그러나 내가 무엇에 대해 책임져야 할지는 내가 결정한다. 며칠 전 새벽 나는 내 종족들의 곁을떠나왔다. 내가 사랑했던 밤꽃들의 향을 마지막으로 맡았다. 철새들이 길을 찾는 북극성을 바라보았다. 나 역시 길을 잃지 않기를 바라고 올바른 길을 가길 바란다. 나는 내본성을 거슬러 환한 대낮에 여기에 있다. 내가 하고 싶은말은 이것이다.
"나는 죽는다. 그러나 돼지와 사향고양이와 천산갑과 밍크와 그리고 다른 동물 누구도 더는 건드리지 말라!"
- P222

보르헤스는 미래를 위해서 모든 사람이 모든 아이디어를 내는 세상을 믿었다. 희망은 모든 사람이 새출발해야 한다는 생각 속에 있다. ‘이제는 더 이상 전과 같이 살기를 원치 않는 것‘, 이것이 이 시대 희망의 말이다. 우리를 둘러싼인간 조건은 절대 쉽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인간 조건은계속 가혹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의얼굴 속에서 사랑을 보고 싶다. 이 위험한 세상 한가운데서홀로 애쓰고 있는 사람은 늘 감동을 준다. 약간이라도 나아지려고 다시 시작하는 사람도 감동을 준다.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면서도 미래를 생각하는 사람도 감동을 준다. 자신이 맡은, 해야 할 일을 해내기 위해 가진 힘을 다 쓰는 사람도 그렇다. 나는 이런 것들을 사랑하면서 버티고 있겠다.
- P286

그들에게는 다른 숨은 이유 같은 건 없었다. 대가도 보상도 이유가아니었다. 그냥 그렇게 하는 게 살아가는 이유 자체였다. 다른 이유는 필요 없는 것, 이것이 가장 급진적인 사랑이다.
이런 자발성이 주체적인 인간을 만든다.
- P279

"잘 자요‘는 무슨 뜻인가요?"
"잘 자요‘는 오늘의 가장 좋은 시도와 내일의 가장 좋은 시도 사이에서 잠드는 거예요."
- P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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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내 삶을 사랑하기 위해서 나에게 무엇이 필요한가는 중요한 문제다. 나는 발견되는 기쁨을 말하고 싶다. 자기를 사랑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 그것은 누군가에게 발견되는 것이다. 사랑받을 만한 어떤 것을 가지고 있음이 누군가에게 발견되는 것이다. 건강한 자기애는 감사와 사랑을 보낼 타인들이 곁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뜻이다. 내가 좋지 않게 행동하면 슬퍼할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뜻이다. 사랑과 믿음의 대상이 되는 것은 살면서 일어날 수있는 가장 좋은 일 중 하나다.
- 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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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 가루에서 세상을 보고
야생화에서 하늘을 보네
우리의 손바닥에서 영원을 보고
한 시간 속에서 영원을 보네 - P93

우리는 자연에게 위로를 구하지만 자연에게서 배우지는 못했다. 자연은 풍요로운 것이다. 우리도 세상을 풍요롭게 했으면 좋았을 뻔했다. 레이첼 카슨은 생명 그 자체가 기적이란 것에 깊게 감동받았다. 사랑하는 것이 위험에 처할때 두려움 없이 용기를 냈다. 그녀는 과학과 양심을, 과학과미래를, 과학과 사랑을, 과학과 용기를 결합시켰다. 우리가익히 아는 바 사랑은 손을 뻗는 것이고 팔을 벌려 안는 것이고 몸이 다가가는 것이다.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사랑은 실천이고 행동이고 창조다. 그녀에게 사랑한다는 것은곧 『침묵의 봄』을 쓰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는것들의 생명을 구했다. 꿈이 현실을 구했다. 그녀는 일생에걸쳐 자신의 사랑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지 않았다.
- P104

나는 처음에 당신을 하나의 이야기로 파악해보라고 제안했다. 그래서 이 이야기에는 숨은 질문이 있다. 당신에게는 끝까지 함께할 사람이 있는가? 끝까지 헌신할 만한 어떤것이 있는가? 끝까지 지켜주고 싶은 게 있는가? 상황과 이해관계에 흔들리지 않을 관계가 있는가?
이 사랑스럽지 않은 삶, 우리에게 살아갈 이유를 주는것은 우리가 사랑하는 그 무엇이다.
- P135

그리고 우리의 노트엔 애트우드의 단어가 아니라 부드러운 단어들이 가득 차야 할 것이다. 언제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멋진 보름달과 별을 위한 단어들, 상처받았지만 아직 남아 있는 아름다움에 대한 단어들, 우리의 다정함, 저마다 다른 웃음에 대한 단어들, 우리가 여전히 공유하고 있는가치에 대한 단어들, 우리 모두를 위해 창조될 새로운 커다란 단어들, 새로운 인간 가능성에 대한 단어들, 산산히 흩어진 우리를 묶어줄 단어들, 지금 우리에게는 그런 단어들이 필요하다. 우리는 이렇게 삶을 언어로 바꾼다. 창조는 이렇게 다시 시작된다.
- P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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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언젠가 말했지? 가난이 가진 원심력이 대단하다고. 근데 가난이 진짜 힘이 셀까? 가난은 낮은 데로 고여. 거길 빠져나오기위한 사다리가 누구에게나 있는 건 아닌 것 같아. 다행히 너한테는 사다리가 있어. 거길 오르지 말라고 하는 거 아니야. 그래도은강이 왜 점점 더 기울어지는지 그 이유를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지 말라고, 은강동 사람들을 폄하하지 말라고."
- P226

"사람들은 주변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잖아. 그런데그렇지 않다는 거지. 눈길의 가장자리가 더 빛나는 것을 볼 수 있듯이, 우리처럼 가장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더 잘 보고 더 빛날 수 있잖아." - P228

아파트는 층수와 넓이로 타인과 자신의 부를 비교한다. 직선으로 이루어진 단순함이 그 비교를 가능하게 한다. 규격화된 창문의 디자인을 통해 남들과 다르지 않다는, 때로는 남들보다 낫다는 위로를 받는다. 더러는 시기와 좌절로 괴로워한다. 그러나 은강동은 타인과의 비교가 아니라 타인과의 어깨동무로 살아남았다. 슬픔이든, 기쁨이든, 노동이든, 공간이든, 무엇이든 나누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은강동이다. 그 가난을 모르는 이들이 쪽방 체험관 따위의 터무니없는 구상을 만들어 냈다. 가난은 진열대 위에 전시할 수 있는 상품이 아니다.
- P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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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선 도로를 사이에 두고 아파트와 80년 넘은 판자촌이 공존하는 동네. 우리 동네가 없었다면 돈이 부족해 집을 구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고시원이나 쪽방으로 떠밀려 갔을 것이다. 이곳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고, 떠났던 사람이 돌고 돌아 다시 이 골목으로 스며들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이 동네가 사라지지 않고 살아남으면 좋겠다. 이 도시에도 수찬이처럼 갈 데가 없어진 사람들이 깃들 곳이 필요하다. 언니는 대학교 3학년 때 통학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며 월 30만 원짜리 고시원에 들어갔었다. 그러나 석 달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잠들지 못할 만큼 소란한고시원에서 정작 말을 섞을 사람이 없었다고 했다. 알람 소리, 휴대 전화 진동 소리, 심지어는 트림과 방귀 소리까지 들리는데, 사람들의 얼굴은 볼 수 없는 게 너무 외로웠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그나마 얼굴을 보고 대화를 나눠 본 사람은 관리인뿐이었다는 말에 나도 울컥했다. 언니가 그랬다. 익명이 편할 줄 알았는데 고립이 더 힘들다고, 어쩌면 수찬이가 이 빌라를 선택한 게 다행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P99

어느 날 4학년 때 짝과 둘이 과학실 청소를 하게 되었다. 그 아이가 말했다. 내가 어떤 집에 사는지, 내가 얼마만큼 가난한지를잊으라고, 엄마 아빠가 없다는 것도 잊고, 나를 향한 반 아이들의시선도 외면하라고 했다. 무슨 말이든 못 들은 척,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라고, 자기도 그렇게 하니까 괜찮아졌다고 했다. 나는 그아이가 알려 준 대로 나만의 성을 쌓으며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중학생이 되면 좀 나아질 줄 알았던 학교생활은 여전히 만만하지 않았다. 힘들 때마다 이상하게 배가 고팠다. 아무리 먹어도 허전한 마음이 채워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먹는 순간은 그 헛헛함과불안이 사라졌다. 물론 이제는 그렇게 먹지 않는다. 그 대신 자꾸만 사고 싶은 게 생긴다. 나는 정민 언니도 나와 비슷할 거라고 생각한다. 언젠가는 언니에게 내 얘기를 들려주고 싶다. 가정집 아이도 슬픔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 P127

란 언니와 이렇게 길게 이야기를 나눈 것은 처음이었다. 언니와나는 생각보다 공통점이 많았다.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존재가 한명 더 생긴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지우는 내가 사람을 너무 잘믿는다고 걱정하지만 나는 나쁜 사람보다 착한 사람이 더 많다고생각한다. 그 착한 사람들이 다 나처럼 가난하고 힘이 없는 게 문제이긴 하다. 그래도 마음이 통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고만고만한 사람들의 숫자가 늘면, 그것도 힘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 P162

소풍을 갈 때만 해도 다시 못 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엄마의 흔적은 집 안 곳곳에 남았고 엄마에 대한 기억과 그리움은 내온몸에 새겨졌다. 그러나 다시는 엄마의 몸을 만질 수도,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었다. 엄마가 사라진 자리에는 바닥이 보이지 않는 우물이 생겼다. 외할머니가 그 우물을 메워 주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메울 수 없었다. 그 우물의 끝없는 어둠과 슬픔은 아무리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채워지지 않고, 좋은 옷과 신발로도 가려지지 않았다. 그래도 외할머니가 곁에 있어서 우물에 빠지지않고 지금까지 잘 자랐다. 엄마의 글을 읽으며 열여덟살 엄마의 꿈, 그 꿈을 내가 이루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꿈을 이루면 어쩌면 내 안의 우물을 메울수 있을지 모르겠다. 엄마의 소박한 꿈이 내게로 이어지는 느낌이 든다. -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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