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언젠가 말했지? 가난이 가진 원심력이 대단하다고. 근데 가난이 진짜 힘이 셀까? 가난은 낮은 데로 고여. 거길 빠져나오기위한 사다리가 누구에게나 있는 건 아닌 것 같아. 다행히 너한테는 사다리가 있어. 거길 오르지 말라고 하는 거 아니야. 그래도은강이 왜 점점 더 기울어지는지 그 이유를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지 말라고, 은강동 사람들을 폄하하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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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는 층수와 넓이로 타인과 자신의 부를 비교한다. 직선으로 이루어진 단순함이 그 비교를 가능하게 한다. 규격화된 창문의 디자인을 통해 남들과 다르지 않다는, 때로는 남들보다 낫다는 위로를 받는다. 더러는 시기와 좌절로 괴로워한다. 그러나 은강동은 타인과의 비교가 아니라 타인과의 어깨동무로 살아남았다. 슬픔이든, 기쁨이든, 노동이든, 공간이든, 무엇이든 나누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은강동이다. 그 가난을 모르는 이들이 쪽방 체험관 따위의 터무니없는 구상을 만들어 냈다. 가난은 진열대 위에 전시할 수 있는 상품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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