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선 도로를 사이에 두고 아파트와 80년 넘은 판자촌이 공존하는 동네. 우리 동네가 없었다면 돈이 부족해 집을 구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고시원이나 쪽방으로 떠밀려 갔을 것이다. 이곳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고, 떠났던 사람이 돌고 돌아 다시 이 골목으로 스며들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이 동네가 사라지지 않고 살아남으면 좋겠다. 이 도시에도 수찬이처럼 갈 데가 없어진 사람들이 깃들 곳이 필요하다. 언니는 대학교 3학년 때 통학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며 월 30만 원짜리 고시원에 들어갔었다. 그러나 석 달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잠들지 못할 만큼 소란한고시원에서 정작 말을 섞을 사람이 없었다고 했다. 알람 소리, 휴대 전화 진동 소리, 심지어는 트림과 방귀 소리까지 들리는데, 사람들의 얼굴은 볼 수 없는 게 너무 외로웠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그나마 얼굴을 보고 대화를 나눠 본 사람은 관리인뿐이었다는 말에 나도 울컥했다. 언니가 그랬다. 익명이 편할 줄 알았는데 고립이 더 힘들다고, 어쩌면 수찬이가 이 빌라를 선택한 게 다행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P99
어느 날 4학년 때 짝과 둘이 과학실 청소를 하게 되었다. 그 아이가 말했다. 내가 어떤 집에 사는지, 내가 얼마만큼 가난한지를잊으라고, 엄마 아빠가 없다는 것도 잊고, 나를 향한 반 아이들의시선도 외면하라고 했다. 무슨 말이든 못 들은 척,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라고, 자기도 그렇게 하니까 괜찮아졌다고 했다. 나는 그아이가 알려 준 대로 나만의 성을 쌓으며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중학생이 되면 좀 나아질 줄 알았던 학교생활은 여전히 만만하지 않았다. 힘들 때마다 이상하게 배가 고팠다. 아무리 먹어도 허전한 마음이 채워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먹는 순간은 그 헛헛함과불안이 사라졌다. 물론 이제는 그렇게 먹지 않는다. 그 대신 자꾸만 사고 싶은 게 생긴다. 나는 정민 언니도 나와 비슷할 거라고 생각한다. 언젠가는 언니에게 내 얘기를 들려주고 싶다. 가정집 아이도 슬픔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 P127
란 언니와 이렇게 길게 이야기를 나눈 것은 처음이었다. 언니와나는 생각보다 공통점이 많았다.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존재가 한명 더 생긴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지우는 내가 사람을 너무 잘믿는다고 걱정하지만 나는 나쁜 사람보다 착한 사람이 더 많다고생각한다. 그 착한 사람들이 다 나처럼 가난하고 힘이 없는 게 문제이긴 하다. 그래도 마음이 통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고만고만한 사람들의 숫자가 늘면, 그것도 힘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 P162
소풍을 갈 때만 해도 다시 못 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엄마의 흔적은 집 안 곳곳에 남았고 엄마에 대한 기억과 그리움은 내온몸에 새겨졌다. 그러나 다시는 엄마의 몸을 만질 수도,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었다. 엄마가 사라진 자리에는 바닥이 보이지 않는 우물이 생겼다. 외할머니가 그 우물을 메워 주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메울 수 없었다. 그 우물의 끝없는 어둠과 슬픔은 아무리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채워지지 않고, 좋은 옷과 신발로도 가려지지 않았다. 그래도 외할머니가 곁에 있어서 우물에 빠지지않고 지금까지 잘 자랐다. 엄마의 글을 읽으며 열여덟살 엄마의 꿈, 그 꿈을 내가 이루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꿈을 이루면 어쩌면 내 안의 우물을 메울수 있을지 모르겠다. 엄마의 소박한 꿈이 내게로 이어지는 느낌이 든다. -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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