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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고요한 노을이…
보리스 바실리예프 지음, 김준수 옮김 / 마마미소 / 2012년 11월
평점 :
절판
“좋네, 바스꼬프! 귀관에게 술을 마시지 않는 녀석들을 보내 주지. 그리되면 여자 문제로 말썽을 피우지도 않을 걸세. 그런데 말이야, 특무상사. 내가 미리 경고해 두겠는데 그놈들마저 제대로 장악하지 못하면 단단히 각오하라고.”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42년 5월의 독일-러시아 접경 북서부전선, 남자들은 모두 전장으로 불려가고 미망인들만 남아있는 러시아 마을, 열 두 채의 농가와 소방장비 보관창고가 전부인 제171대피역에 고사포사수로 다섯 명의 여성 병사가 투입되자 이를 맞이하는 특무상사 바스꼬프는 할 말을 잃었다.
“눈앞에 펼쳐진 뜻밖의 광경에 특무상사는 어안이 벙벙했다. 잠에 취해 얼굴이 늘쩍지근해 보이는 아가씨들이 집 앞에 이열종대로 늘어서 있었던 것이다... 눈을 깜박거려 보았지만 보이는 것은 여군 병사들뿐이었다. 그의 눈에 익숙한 병사들의 모습과는 달리 야전복 상의에 가슴이 볼록하게 튀어나와 있고 모양과 색깔이 다른 곱슬곱슬한 머리가 서로 뽐내기라도 하듯 뻔뻔스럽게 모자 밑으로 삐져나와 있었다.
백야가 이어지는 북구의 5월, 아침저녁으로 노을이 지는 러시아의 찬 공기와 늪지, 숲을 배경으로 전쟁과 여성을 깊이 있으면서도 무겁지 않게 다룬 이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편한 세상 만난 한 남성은 숙연해 지지 않을 수 없다.
고도로 훈련된, 영혼을 바짝 말려 양심의 새 틀에 맞게 완전히 개조된 전투기계 독일군 공수부대원들과 맞선 다섯 병사들의 모습은 가련하다. 20대 전후의 꽃잎같은 나이에 이미 보호받아야 할 여성으로서의 삶은 전쟁으로 완전히 파괴된 채 부대에 입소한다. 바스꼬프의 입과 생각을 빌어 그들을 ‘소풍나온 어린아이들’처럼 표현해 낸 보리스 바실리예프의 천재성이 없었다면 이 책의 주제는 안네의 일기나 쉰들러 리스트에 견줄 만큼 무거웠을 것이다. 전쟁은 여성이라는 나무를 송두리째 뽑아버린다. 그러나 여성은 전쟁보다 강하다.
다섯 병사를 표현하는 문장들은 거침없고 익살스럽다. 전쟁터라는 안개도 그들의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아름다움과 인간성을 덮지 못한다. 훈장까지 받은 특무상사 바스꼬프의 눈에 비친 여성 병사들의 모습은 말 그대로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질 않는다.”
“말갈기 같은 머리채를 허리까지 늘어뜨린 것도 있고 어디서 자빠져 있다 뛰어왔는지 머리칼이 부스스 흐트러진 것도 있다. 꼬락서니가 영락없이 꽁지 빠진 새 같다. 그 꼴에 실전 경험도 없으면서 무슨 역전의 용사라도 되는 것처럼 깝죽깝죽 으스대기만 하는 년들이다.“
“에그, 불쌍한 년들, 이 난리 통에 사내새끼들도 죽을 맛인데 너희들이야 오죽하랴...”
“병사의 걸음걸이가 영 신통치 않아 보였다. 적을 경계해야 하는데 젠까는 자신의 내면에서 울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 같았다. 애그, 저런 것들도 군인이라고.”
다섯 병사 각자의 삶은, 전쟁을 상상하면 떠오르는 흔한 모습으로 망가져있다. 결혼을 하자마자 군인인 남편이 죽었고, 장군인 아버지를 포함하여 가족이 통째로 몰살당했으며 직업훈련원에서 기술을 배우다 혼자 남았거나 아예 고아로 지내다가 군인이 된다. 전쟁을 통해 망가진 여성의 삶을 작가는 오히려 여군으로 무장시켜 살육의 전쟁터 전면에 내세운다. 잔인하다. 그러나 상상조차 무서운 전쟁터에서 그들은 희망을 놓지도 아름다움을 잃지도 않고 인간의 숭고함을 간직한 채 하나둘 사라져 간다. 젠까의 죽음을 ‘프리츠‘라 불리는 독일공수부대원들이 넋을 잃고 바라보는 장면에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전쟁의 허상과 생명의 소중함, 여성의 아름다움, 인간성의 복원 같은 복잡한 감동이 두서없이 쏟아져 내린다. .
특무상사를 흠모했던 리자는 늪에 빠져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도 믿음을 잃지 않았다. “나무들 위로 해가 서서히 떠오르면서 밝은 태양 광선이 늪 위로 비스듬히 내리쬐고 있었다. 따사로운 햇빛을, 내일의 약속처럼 참기 힘든 눈부신 햇살을 리자는 마지막으로 보았다. 찬란한 내일은 자기에게도 있을 거라고 최후의 순간까지 믿었다.”
총에 맞고 누워 서서히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리따는 자신이 다섯 병사를 죽음으로 내몰았다며 괴로워하는 특무상사를 위로한다. “아니, 무슨 그런 말까지... 하지만 뻔하잖아요, 전쟁인데.” 리따에게 자신의 삶과 목숨과 젊음은 그저 전쟁이기 때문에 빼앗긴 것이다. 안타깝지도 억울하지도 않을 만큼. 그러나 친정어머니에게 두고 온 젖먹이 아들, 고아로 남게 될, 또는 살아남을지도 불확실한 그 아들을 떠올리며 억장이 무너진다. 그러면서 죽는다.
그 아들이 커서 양아버지가 된 특무상사와 숲속의 무덤을 다시 찾았을 때, 제3의 화자는 자신의 친구에게 편지를 쓴다. 평온하던 그곳이 옛날의 전장이었음을 읊조린다. “노을이 질 때 여기는 죽은 듯이 고요하다네. 그동안 무심코 지냈는데 오늘에야 비로소 그걸 깨달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