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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의 친전 -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
차동엽 지음 / 위즈앤비즈 / 2012년 10월
평점 :
‘저들을 데려가려거든 나를 밟고 가시오’ 1987년 6월, 명동성당으로 피신한 민주투사들을 내놓으라며 찾아온 경찰에게 시대의 어른 고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당당히 말씀하신 한마디다. "나를 밟고 가시오. 그리고 내 뒤엔 신부들이, 그 뒤엔 수녀들이, 그 다음에야 당신들이 찾으러 온 대학생들이 있을 것이오. 밟고 가시오..."
늘 정의의 편에서 약하고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보듬어 주셨던 고 김수환 추기경의 사신을 ‘친전’이라는 이름으로 엮은 책이 출간됐다. 추기경님은 일생을 정의롭게 사셨고 한시라도 남에게 부담이 되지 않고자 하셨다. 거동이 불편해지고 낙상사고가 나고 하던 말년에 이르러서도 이 뜻은 굽힘이 없으셨다. 그나마 오랜 지인 신치구 퇴역장군과 조카사위 김호권 박사가 일주일에 한 번 산책을 시켜주고 말벗이 되어주는 것만을 받으셨다. 그렇게 큰 사랑 주셨으면 작은 도움 하나쯤 눈감고 받으실 법도 한데도 말이다.
이 책을 엮은 ‘무지개원리’의 저자 차동엽 신부는 서문에서 추기경님이 30년간 불면증을 알아오셨으며 그 원인이 세상에 대한 그분의 소명의식에서 비롯된 것임을 설명하고 있다. 추기경님은 스스로 “내 가슴은 늘 세상의 아픔으로 멍들어야 한다. 멍이 꽃이 될 리 없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으로 나는 늘 세상의 고통 속에 있어야 한다.“라고 생각해 오셨다는 것이다. 신치구, 김호권님의 손을 빌려 작성된 추기경님의 유지, 그 애절한 마음을 ‘우선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전하던 것’을 차동엽 신부가 엮은 책이 이 책이다.
서정적인 사진과 그림, 붉은 색으로 선명하게 수록된 추기경님의 육성이 차동엽 신부의 빛나는 엮음을 통해 생생하게 다시 태어났다. 가슴속 멍울과 고통을 짐처럼 지고 살다가신 추기경님의 유지가 이토록 아름답고 의미깊은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었다. 한 순간도 약하고 가난한 사람을 외면하지 않으신 시대의 어른, 망실과 몰염치의 시대를 거치며 더욱 어른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진다. “사회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이 바로 나로부터 버림받은 사람일 수 있습니다.”
69년 8월, 사제가 되신 직후, 어느 수련회에서 추기경님이 한 여고생에게 써주신 글귀가 선종후 인터넷을 통해 공개되었다. 최악의 시기를 보내던 그 여고생이 40년을 보관해 오던 빛바랜 메모지, “장마에도 끝이 있듯이 고생길에도 끝이 있단다.”
목차 ‘진리는 평이하다’에 소개된 ‘참평화를 얻으려면 골고루 나눠야 한다’는 말씀은 지난 무상급식 논란에서부터 최근의 복지논쟁까지 한국사회의 추잡하기까지 한 대립들을 반성하게 한다. “한자 平和(평화)를 잘 살펴보십시오. 벼(禾), 즉 밥이 모든 입(口)에 골고루(平) 들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참평화를 얻으려면 고루 나눠야 합니다. 가진 것뿐 아니라 기쁨과 슬픔, 고통도 나눠야 합니다. 결국 서로 사랑하는 것이 평화의 지름길입니다.”
윤동주의 ‘별헤는 밤’을 좋아하며 “서시도 좋아하지만 감히 읊어볼 생각을 못했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운 게 많아서 그런 것 같다.”고 말씀하신 추기경님의 육성을 옮기며 차동엽신부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이란 대목에서는 멋진 포즈로 당당하게 하늘을 우러르기까지 하지 않았던가”라며 자기반성을 하는데 두 분 다 아름답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서시’라는 제목조차 잊고 살지 않는가, 우리는, 지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