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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를 가로지르는 반역의 정신 COOL
딕 파운틴.데이비드 로빈스 지음, 이동연 옮김 / 사람과책 / 2003년 10월
평점 :
절판
요즘 뜨는 문화코드 중의 하나가 ‘쿨’인 것 같다. ‘쿨하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단지 쿨하다고 이야기되는 스타일에 대한 묘사일 뿐만 아니라 긍정적인 뉘앙스로 이야기되면서 가치평가를 포함하고 있다. 그렇다면 쿨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왜 갑자기 이렇게 ‘쿨하다’는 것이 대세로 떠오르는가? ‘쿨’이라는 것의 실체는 과연 있는 것일까? ‘쿨’이라는 실체와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쿨’한 인간들은 과연 일치하는 것일까?
‘쿨’에 대한 국내 연구는 아직 구체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다. ‘쿨’이라는 담론이 거세게 일어남에 따라 대중 매체 속에서 무차별적으로 사용되고 있고, 몇몇 저널들 속에서 간단한 세대 분석만이 이루어지고 있을 뿐이다. 이 책은 그 중에서도 원래는 스타일이나 사려깊음, 삶의 환희 등을 함축하던 쿨이 어떻게 1960년대 히피의 소비주의를 거쳐 이것이 미국의 상업문화로 변질되어가는가를 분석하고 있다.
쿨은 문화적 산물이 아니라 오히려 문화적 산물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를 의미하는데 파운틴과 로빈스는 쿨에서 중요한 것은 반항적인 성격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쿨은 반항적인 태도이며, 당대 주류문화에서 정당성을 얻지 못하거나 적용되기 어려운 신념을 표현. 쿨은 역설적 초연함 뒤에 반항심을 숨기고, 권위와 직접 대면하기보다는 권위의 원천과 거리를 두려고 하는 삶의 태도라고 이야기한다.
쿨의 개성은 세 가지로 표현될 수 있는데 첫째, 나르시시즘 둘째, 역설적 초연함, 셋째는 쾌락주의이다. 나르시시즘은 외양을 과장되게 드러내는 행위를 통해 느끼는 도취감이고, 1970년대 이후 서구 소비자본주의의 도래에서 비롯되었다. 역설적 초연함은 감정을 숨기기 위해 역설적으로 반대되는 행동을 취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위기 상황에서 권태로움을, 모욕적인 상황에서 즐거움을 표현하는 태도를 말한다. 끝으로 쾌락주의는 개인의 육체적 자율성을 극대화하려는 성향이다.
파운틴과 로빈스는 쿨의 흔적은 서아프리카 고대 문명에서 발견되며 이러한 태도는 노예무역에 의해 미국과 유럽으로 이전되어 보존되고 적응되어 현재적 쿨로 재현되었다고 주장한다. 서아프리카의 전통에 대한 연구에서 ‘이투투 itutu'라는 개념을 쿨로 번역한 것은 미술사가인 로버트 패리스 톰프슨인데, 쿨이나 이투투는 친화력 있고 정다운 성격, 싸움과 분쟁을 해소하는 능력, 관대하고 우아한 자질을 포함한다. 흑인이건 백인이건 젊은이들 사이에서 폭넓게 쓰이는 쿨이라는 말에 감추어진 태도가 서아프리카 문화의 흔적이며, 여러 세기를 거치며 수백만 가지의 미세한 방식으로 가감되고 변형되었다 해도 쿨한 태도는 아프리카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저자들은 ‘쿨’이라는 것이 이렇게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태도를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현대의 소비자본주의 사회에서 이투투가 ‘쿨’로 변용되면서 그 의미 또한 변용되었다. 피터 스턴스는 사람들이 ‘쿨’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감정적으로 감싸줄 무엇이 필요할 때, 난처한 상황에 처해 자신의 전 감성을 보호해야 할 때”라고 이야기하는데, 만약 전통적인 아프리카적 쿨의 의미가 노예제 속에서 존속되었다면 그들의 고달픈 삶으로 인해 쿨이 크게 변형되었다고 말한 패터슨의 지적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파운틴과 로빈스는 과거에 쿨은 사회적 일탈과 반항의 표현으로 나타났지만 지금은 그 반항적 지위가 힘을 잃으면서 후기소비자본주의의 지배적 윤리가 되었다고 말한다. 패터슨이 지적한 것처럼 쿨은 고도 경쟁사회가 만들어낸 우울과 불안에 대한 방어기제로서 작동하고 있으며, 쿨이 사회적 위기 앞에서 유연한 기제로서 작용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 같다. 걱정은 변화에서 생겨나며, 이 걱정을 치료하는 것이 바로 ‘쿨’이다. 파운틴과 로빈스가 문화혁명과 신자유주의 경제혁명을 동시에 가능케 한 것은 쿨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과도한 해석일 수도 있겠지만,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조류의 일종으로서 쿨을 이해한다면 일리있는 해석으로 보인다. 파운틴과 로빈스는 쿨은 서구 사회에 자리잡은 오랜 모순인 노동의 필요와 유희 욕구 간의 심리적 구조가 명확히 해소되었다고 제안하고 있으며, 기존의 노동 윤리와 단절함으로써 모든 관점을 커버할 수 있고, 거친 메시지는 이제 쿨이라는 유연한 노동개념으로 대체되었다고 말한다.
우리 사회에서 쿨이라는 문화적 코드는 어떤 실체가 있다기보다는 무차별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 같다. 그 원래적인 기원과 어원을 살펴보더라도 어떤 특정한 현상이나 실체라기보다는 삶에 대한 태도를 표현하는 말인 것 같다. 쿨이라는 한 글자 속에는 ‘냉정한’, ‘쌀쌀맞은’, ‘침착한’, ‘천박하지 않은’, ‘세련된’, ‘도시적인’,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등의 수많은 의미가 담겨있다. ‘핫’이라는 코드가 선호되는 시대와 ‘쿨’이라는 문화적 코드가 선호되는 시대가 다르듯이 ‘쿨’이 내포하는 함의는 고도의 선진자본주의의 도시에서 이루어지는 소비자본주의를 전제로 할 때 이해가 가능하다.
그러나 파운틴과 로빈스가 ‘쿨’이 원래의 반항적인 의미를 잃고 소비자본주의 시대의 유연한 기제로서 작용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한 것처럼, 현재 형성되어 있는 ‘쿨’이라는 담론은 원래적인 ‘쿨’이 아니라 스타일만 쿨한 가짜 ‘쿨’인 것 같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담론의 하나로서 쿨은 ‘역설적 초연함’을 잃고 상품을 판매하는 외판원처럼 기능하고 있다.
무엇이 쿨하고 무엇이 쿨하지 않은 것인가? 쿨하다고 여겨지는 특정 형태는 장소나 시간, 세대에 따라서 변할 것이다. 누가 쿨한 것을 결정할 것인가? 쿨을 둘러싸고 다양한 계층과 지위의 사람들에게 불균형은 존재하지 않는가? 원래적인 ‘쿨’이 그대로 재현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며, ‘쿨’의 가치는 매우 매력적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 사회에서 진행되는 ‘쿨’에 대한 담론은 그저 이미지일 뿐이거나 대중매체 속에서의 재현인 것 같기도 하다. 게다가 저자들이 지적하는 대로 ‘쿨’이라는 것이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기보다는 그것에 대해 역설적인 초연함을 가장하여 세련되게 포장하는 태도이며, 또한 소비자본주의가 앞세우는 정서적 무기라고 한다면 그 씁쓸함도 떨치기는 힘들다.
아, 읽다보니 책 속에 여러 다른 분석이 나오던데 그것들도 함께 번역되면 참 좋겠더군. 이 사람들 말만 들어서야 믿을 수가 있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