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개의 고양이 눈 - 2011년 제44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개정판
최제훈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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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편의 중편으로 구성된 소설집의 제목이 <일곱개의 고앙이 눈>인거 같은데 이게 장편소설이라니! 다소 의아했다. 

내가 보기엔 작가가 <일곱개의 고양이 눈>이라는 4번째 단편을 먼저 쓰고나서(혹은, <파이>를 먼저 쓰고) 거기에 등장하는 짜투리 인물들을 재활용한 게 <여섯번째 꿈>이고 거기에 디테일과 구라를 섞은 것이 <복수의 공식>이리라.


어쩌면 이 책은 그럴듯한 장르물 혹은 미스터리를 쓰는데 실패한 작가가 돌연(?) 세헤라자드니 송충이 같은 멕거핀을 활용, 이야기, 서사의 근원들을 키치적으로 변용, 영화적인 방식으로 재편집해서, 실패한 미스터리보다 더 처참한 "이야기의 해부와 그 시작에 관한 이야기"로 방향을 전환한 후, 남은 재료들을 그럴듯하게 윤색한 것에 가깝다고 느껴진다. 


장르적 속성이나 쾌감과는 무관하게 꽉 짜여진 밀실에서 차례차례 인물을 죽이는 <여섯번째 꿈>의 엉성함-무의미한 죽음의 나열 뒤에 이어진 <복수의 공식>은 앞이야기의 등장인물들의 몇몇 디테일을 보여주면서 서로 보완하며 그들을 조금이나마 입체적인 인물로 만든 듯하다. 그래서 그들의 죽음과 복수가 각자의 트라우마와 연결되고, 연거푸 등장하는 도플갱어 혹은 쌍둥이 모티브와 연관되어 있음을 (강박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하지만 그리 촘촘하게 얽혀있지도 않고, 이러한 보완과 상호 엮임의 노련한(?) 결과인 저 인물들이나, 그 주변 인물들이 판에 박힌 장르적 인물(킬러, 사시준비 법대생과 미모의 대학생 등등) 그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밝혀지면서, 이런 종류의 부연설명이 지닌 현란한 의장이란,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데 필요한 재료였음을 그런 강박만을 반복적으로 확인시켜주기에 다소 쓸쓸한 뒷맛을 남긴다.  


해서 순식간에 여섯명은 잊혀지고, <파이>에서 살아남은 "종이로 살인한다"(참 기발하고 놀랄만한 표현이다!)는 일본어 번역가만 희미하게 남아서, 맵시종 거미의 비유를 우걱우걱 삼키며, 재역전된 세헤라자데 (<여섯번째 꿈>을 쓴 일본 작가 이름, 세카이 라코)로 다시 등장한다. <파이>의 장점은 소설이나 이야기의 그것이 아니라, 이야기의 영화적 표현 방식에 있다. (활자를 먹어치우듯 탐닉하는 여자와 번역가 남자의 우울한 옥탑방 생활이란 얼마나 이상적이며 작위적인가?)  


작가는 <일곱번쨰>에서 또다시 비급 장르적 요소들을 소환시켜 스스로 이야기를 쓰고 상상하기를 좋아한다는 점만을 강조한다. 

아주 만족스럽게 이야기를 쓰는 듯하지만, 작가 스스로가 유희와 이야기에 관한 기발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서 스스로 폐쇄회로에 갇힌 것은 아닌가? 싶다(하지만 반전은 여기서 끝나지 않으니, 정여율의 기상천외한 죽음 변죽 타령(샛강모텔과 같은 의도적인 문구를 무시하다니!)과, 책뒤표지에 평론가들의 상찬은, 이런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류에 대한 평단의 갈증이 징후적일만치 과대평가되었다고 느껴졌고, 문제는 일반 독자들 역시 최제훈의 이야기가 "우리 문학의 발견" 따위의 지위까지 오르내릴정도의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고 얼추 믿고 있다는 것이다.) 


런 저런 등장인물이 저마다 작가를 대변해 폐쇄회로(미로?) 나 스스로 죽이는 늑대사냥, 일곱번째 고양이 눈같은 것을 통한 글쓰기의 비유를 늘어놓았기 때문에, 닳고닳은 어떤 장르물의 인물과 구조를 차용해 단지 "실험적 글쓰기라는 형식을 빌린" 이야기론 같은 것에 불과한데 이것이 장편소설이라니 별 믿기지 않은 것이다. 


설사 작가나 책속의 번역가가 의도한 바가 "완벽한 미스터리"라고 쳐도 이런 것들은 아무리 늘리고 변용하고 온갖 의장과 장치들을 영화적으로 구성하고 배치하고 다 가져다 쓴다 해도, 하나의 완성된 장편소설로 옮겨질, 번역될 어떤 꺼리도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완벽한 미스터리란 최제훈이 이 소설에서 다루고 있는 모든 것들의 반대지점에 있기 때문이다.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의 모든 에피소드를 시청하고 나서, 부부생활과 사랑에 대해 모든 걸 알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과연 존재할까? 그리고 그가 결혼을 하고 나서 느끼는 어떤 부질없음과 쓸쓸함이 있다면, 그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최제훈이 쓰지못한, 하지만 추구했던 바와 아마도 조금은 비슷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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