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십사
백가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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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흠의 소설집 <사십사>를 펼치고 <한박자 쉬고>, <더송>, <흰 개와 함께하는 아침>, <아내의 시는 차차차> 를 내리 힘겹게 읽고서 마침내 더이상 책을 읽기 싫은 맘이 들었다. 

비루한 것의 카니발이라는 어느 평론가의 평론집 제목이 생각나면서 이건 "비루한 것들의 소극" 정도로 정리될 듯하다. 

비루함은 차고넘쳐 호수에 떨어지는데 이상하게 튀어오르는 물방울이 하나도 없는 다른 의미에서 비현실적인 독서라는, 이걸 왜 읽고있냐는 생각이 계속 들었기 때문이다. 물고리도 물결도 일으키지 못하고, 호수는 고요하다. 그게 바다로 흘러들어가길 바라는것도 요원한 일이리라. 

40대 중년 남자의 비루한 삶은 주위 어디를 둘러봐도 특별하지 않고 사사로운 일상이다. 그걸 대변하기 위해 썼나 싶지만, 나는 그 사사롭고 치졸하고 의미없이 생각 없이 사는 삶들이 과연 그럴까? 과연 그렇게 보이는 것일까? 에대해 목격자 이상이고 싶지만, 작가는 목격한 순간 끝을 내버린다. 그 이후가 없다. 사사로움을 사사롭게 다뤘다고 그게 승격되는 것도 아니고, 피상적인 인식의 덧없음과 치정의 난잡만을 무한정 주입할 뿐이다.   


<한박자 쉬고>의 전형적인 피해자와 가해자의 현재 위치가 전복된 것에서 오는 통렬한 비의나 소시민적 무력감은 너무도 흔한, 범람하는 부류의 익숙한 정서여서 인상깊을 수가 없다. 차라리 가해자의 심리를 위악적으로 뇌까렸으면 어떨까? 

<더송>은 <흰 개와 함께하는 아침> 처럼 인간이 되지 못한 미숙한 성인이 개로 대비되는 약자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식의 허접한 중년의 내면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매사에 눈치만 보고 삶의 적극성이란 단어에 눈감아버린 허접한 인물들은 또다른 이유들로 허접한 인간들에게 비난을 받고 화를 내고 또 어울린다(인물 구성이나 대사의 활용이 매우 진부한 축에 속한다). "죽음"이란 지나치게 가벼운 의미를 남발하여 어떤 전환점도 될 수 없다. 이 허접한 인간들을 어디로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다. 제자리를 맴도는 소설 

<아내의 시는 차차차>도 그렇다. 시라는 현재의 세속화된 허세의식으로써의 무한에의 세속화된 낭만에의 열정 역시 별 불경스런 대상도 못되고 그 허접하고 비루한 삶의 닳고 닳은 표식에 머문다. 즉 백가흠의 세계에서 보여지는 남루한 삶의 초극이나 지표로써 등장하는 통속성의 상징들은 매번 싫증나는 서사와 인물의 반복으로 그렇고 그런 이야기의 범주를 절대 벗어나지 않는다. 

궁요지책인가 소재에 헛헛함인가? 더는 어떤 궁금함도 일어나지 않는다. 과연 그럴까? 이게 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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