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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을 시작하기 ㅣ K-포엣 시리즈 21
김근 지음 / 도서출판 아시아 / 2021년 8월
평점 :
끝을 시작하기
김근
축축한 폐허에서 실존의 그림자놀이 또는
그간 나를 이끌었던 알레고리들과의 마지막 숨바꼭질
하지만 이 세계에는 육체적 고통은 없고 오래전 왕으로 자처했던 자, 지각하는 자의 골치 아픔 같은 환상통이 근원적 두통처럼 자리하고 있다
머리 없는 자의 머리가 주절거리며 스스로 복제했던 세계를
혼자 만들어 혼자 부숴야하는 자의 숙명적인 뻐근한 감각만 계속되는 두통
세상은 길을 잃고 길을 찾고
그와 나는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폐허의 공동 주인
하지만 이제 정들었던 고향을, 고향의 집을, 빈 폐허의 자취를 애써
뭉그러뜨리며 떠나야 한다
끝을 시작하기는 그 끝과 에필로그에서 숨통을 트인다. 겨우
왜 그럴까 끝의 의식이란, 끝으로 가려는 의지는 몸의 감각보다는
머리 없는 자의 머리에 굳은 관념이, 머리가 없어졌으면 하는 바람과 의지로
작동해야 하는 것
손가락 없는 자물쇠 수리공이 머리를 강철에 대어 연마하는 황동뭉치처럼 사용하고
아우성만 가득한 침묵의 폐허에서 한동안 철가루 튀는 소리만 나고 있다
이 폐허는 침묵만이 가득하다
침묵은 무언의 아우성들이 서로의 이름을 달리 부르는 아우성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묘한 진공 상태를 이룬다
김근적 진공 상태는 이런 긴장의 에코로 빽빽하다, 뻑뻑하다.
목소리들은 서로의 이름을 달리 부르면서 마치 나는 알았던 것처럼 생전 첨 보았지만 어제까지 만져본 무언가에 대해서 잘 안다고 다퉈가며 주장하고 있다
폐허의 숲에서 내 머리를 찾는 에코들이 나를 둘러싸고 나는 그것들이 소환한 기억에 감싸이고 여전히 잃어버린 내 머리를 회상하고 있다
이제 떠나야 하는 것이다 떠남의 의식이 종결되었으니
시작이든 끝이든 끝이라는 이름의 시작으로
시작이라는 표지판의 끝으로 떠나야 하는 것이다
무성생식세포가 인공적인 자극을 받아 분열을 반복해 또 다른 개체로 나아가는 것처럼
무수한 나들, 그들로 이뤄진 나들은 그 자극이 작용하는 세계 밖으로
다른 자리와 다른 장소에서 나를 증식해야 한다
거기에 새로운 언어와 말이 나온다 말더듬이와 상처 입은자와, 부모 잃은 아이와 아이 잃은 부모, 불구의 몸을 기대는 달구지의 언어와 말들은 이제 내버려두고 떠나야 한다
나는 그에게 더러워진 옷을 벗겨 주고
머리 없는 나무에 닳고 닳은 마스크를 씌워 주고
떠나야 한다 지겹게도 떠나야 한다
아 마침내 손가락이 자라난다
나는 한참동안 간지러운 곳을 긁어주었던 그 손가락을 핥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