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직숍
레이철 조이스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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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음악을 듣기 시작했을 때, 유통되는 매체는 레코드판과 카세트테이프였더랬다. 세월이 흐르고 결혼을 할 무렵 레코드는 수백 장에 달했는데, 신혼살림 규모에 처치 곤란한 지경에 이르렀고, 이미 시장의 흐름은 LP가 아닌 CD의 시대였다. 턴테이블에 음반을 올리고 듣는다는 건 구석기 시대의 유물처럼 돼버렸고, 아무래도 레코드를 감상하려면 공간을 많이 차지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이 필요했고, 모은 레코드 역시 적잖은 공간이 필요했다. 시대의 흐름에 반항하느라 레코드와 CD로 동시에 신보가 발매돼도 한동안 CD를 사지 않고 레코드를 사며 버티기도 했으나, 결국 와이프의 잔소리와 물리적인 공간의 문제, 장강의 뒷물결에 떠밀려 몇 백 장의 레코드는 처분할 수밖에 없었다.

예전만큼은 아니라도 음악을 좋아하는 습성이 변한 건 아니어서 CD 컬렉션 역시 빠른 속도로 많이 늘었다. 다만 CD는 부담스러운 오디오 시스템이 아니라도 컴퓨터에서도 아쉬운 대로 들을 수 있고, 모은 CD 역시 레코드에 비하면 그다지 큰 공간이 필요하진 않다. 다만 과거 레코드로 샀던 추억의 명반들이 하나 둘 CD 수납장에 재등장하게 되었고, 이산가족을 다시 만난 소회에 젖기도 했다. 사라질 듯 여겨졌던 레코드는 끈질기게 소수의 음악팬들에 의해 명맥을 유지했고, 피지컬 CD는 아이돌 문화의 기념품같이 변한 디지털 시대에 오히려 레코드는 부활했다. CD의 존재감은 사라지고 레코드는 복권되는 시대, 명반이 복원돼도 CD가 아닌 레코드로 재발매되는 시대. 지난 세월 도대체 난 뭘 한 거지?

영국 작가 레이철 조이스의 2017년작 <뮤직숍>은 지나간 나의 음악 여정(!)을 반추하게 만든다.

쇠락한 동네에서 전혀 장사가 될 거 같지 않은 레코드 가게를 운영하는 프랭크가 소설의 주인공이다. 자개 옷장을 개조한 청음실을 구비하고, 오로지 레코드만을 취급하지만 소설의 대부분 사건이 벌어지는 1988년은 CD가 위세를 떨치기 시작하는 시기로 레코드는 애물단지가 되고 음반사들은 떠오르는 신세기 아이템 CD 판매에만 관심이 있다. 어린 시절부터 홀어머니 밑에서 LP 판을 아버지 삼아 자란 프랭크는 사랑에도 실패하고 오로지 음악에 기대어 세상을 사는데, 가게에 들른 고객들의 고민을 들어주다 적합한 음반을 추천하는 게 이곳의 자연스런 영업 방식이다. 그의 선구안은 소원한 부부 관계를 회복시키고, 불가능한 대출을 가능하게 만드는 신묘한 경지다.

시대의 변화에 아랑곳하지 않고 레코드 순혈주의를 고수하고, 개발의 떡고물에 흔들리지 않는 유니티스트리트 사람들은 아날로그 정서에 가치를 버리지 않는 희귀종이지만 서로가 서로를 지키는 깊은 연대감을 보여준다. 이 동네에 일사 브로우크만이라는 독일 이름을 가진 이방인이 등장한다. 그녀는 왜 늘 장갑을 끼고 절대 벗지 않을까?

우리는 지나치게 많은 연애담을 봐왔다. 소설로, 드라마로, 영화로...

남녀 주인공은 뭔가 그늘이 있고 사연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첫눈에 반하지만 과거의 무언가가 발목을 잡고 일단 위기가 닥친다. 우회로를 거치지만 결국엔 해피엔딩!

이러한 로맨스 작법은 <뮤직숍>의 주인공인 프랭크와 일사의 러브 라인에서도 충실히 재현된다.

레코드 가게를 배경으로 하는 닉 혼비의 <하이 피델리티>를 떠오르게 하는 이 소설의 진짜 주인공은 음악 그 자체다. 과거나 현재나 프랭크는 음악의 세계에서 살고, 거기서만 존재 가치가 있는 인물이다. 그런 그가 음악을 편애할 리가 없다. 클래식부터 펑크, 소울, 록, 재즈 모든 장르를 아우르고 리스트는 비발디, 제플린, 10CC, 아레사 프랭클린, 섹스 피스톨스 등 방대하다.

프랭크의 가게는 장르별, ABC 순이 아닌 '정서와 뿌리가 같은 음악들'로 느슨하게 배열되어 있단다. 그런 장관을 현실의 음반 가게에서도 볼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프랭크는 일사에게 음반이 들어 있는 가방을 건넸다. 《월광 소나타》와 마일스 데이비스의 《카인드 오브 블루》, 비치 보이스의 《펫 사운즈》앨범이 들어있었다." - P 194

더블 앨범처럼 소설은 ABCD 네 개의 면으로 구성됐다. C면을 읽고 D면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21년의 세월이 필요하다. 그러나 소설의 엔딩은 강산이 두 번 바뀌는 기다림을 보상하고도 남는다. 나로서는 전혀 예측하지 못한 황홀경이었는데, 장면이 머릿속에서 그려지면서 음악을 잃어버린 프랭크에게 감정이입이 되다 보니...!


음악의 광대한 바다에 빠졌던 청춘기를 거친 독자라면 간만에 만나는 '음악의, 음악에 의한, 음악을 위한' 소설이다. 스트리밍의 시대에도 굳건히 레코드를 지킨 분들이라면 만족할 만한 소설이요, 영화 제작자라면 판권 확보가 시급한 작품이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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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로메다의 나무들
장수정 지음 / 로에스미디어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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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숲해설가로 일하는 장수정이 쓴 수필집으로 2013년부터 2018년에 걸쳐 매달 한 편씩 신문에 기고한 숲 에세이들을 발표순으로 엮었다.

기승전'숲'이라고나 할까. 춘천이 고향인 저자는 세상 모든 일을 숲의 생태계에 대입해서 생각하는 사고를 지닌 듯하다. 숲을 구성하는 다양한 동·식물, 나무, 곤충들이 그녀의 한없는 애정에 힘입어 글 속에서 생명을 얻는다. 글로 만나는 자연도감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인데, 일반인들은 구분하기도 힘들고, 접하기도 어려운, 설사 접한다 하더라도 그런 아름다운 이름이 붙어 있는지 모를 생명체들이 끝없이 소환되고 에세이의 주인이 되며, 저자의 감정이입의 대상이 된다.

귀룽나무, 쑥버무리, 사스래, 애기똥풀, 풀색꽃무지, 사향제비나무, 쇠무릎, 쇠비름...

모든 사물에는 이름이 있겠지만 참 다양하고 아름답다. 실제로 저자도 관련 도감을 보면서 계속 지식을 업데이트한다고 한다. 세상은 아는 만큼 애정도 생기는 법 아니던가. 아니, 애정이 있어야 알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일까. 하여간 비단 직업 때문이 아니라도 숲 생태계에 대한 저자의 무한 애정은 매 페이지 행간마다 배어있다. 급기야 은날개녹색부전나비 애벌레를 가져와 날개가 돋는 장면을 집에서 목격하기도 한다.

여기다 국문과 출신이라 그런지 구사하는 단어의 범위가 넓다. 저자의 소설 <검은 숲의 사랑>에서도 느꼈지만, 언어 구사력이 남다르다. 어휘의 폭넓은 활용과 섬세한 묘사로 숲 생태계에 대한 사랑을 약간의 일상에 덧붙여 이야기하는 책이 바로 <안드로메다의 나무들>이다.


저자의 이런 대단한 숲 사랑은 집안 내력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산림과에 입사해서 퇴직도 그곳에서 했다고 하니 2대에 걸쳐 산림에서 일하는 셈인데, 아무래도 아빠의 뒷모습은 딸에게 크나큰 영향을 미친 모양이다.

책의 가독성이 좋다고는 못하겠다. 문장이 눈에 쏙쏙 들어오는 편은 아니다.

책에서 벌어지는 많은 일들이 내게는 동떨어진 다른 세상의 일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감정이입할 에피소드가 적은 건지도, 그만큼 내 감성이 메말라서 일 수도 있지만 여하튼 읽는 재미가 크진 않았다.

아들이 입대하던 날을 다룬 '연병장 풍경'과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 감상문 '아다지오를 듣는 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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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의 내일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3
하라 료 지음, 문승준 옮김 / 비채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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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축은행에 2인조 강도가 들었다. 손님들을 인질로 잡고, 제일 처음으로 한 일은 당연하게도 핸드폰 압수! 그런데 한 사내가 자신은 핸드폰이 없다고 한다. 요즘 같은 세상에 무슨 말도 안 되는...

"휴대전화는 갖고 있지 않아."

"이봐,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양반이 괜히 애먹이지 마. 요즘 세상에 휴대전화가 없다고? 신주쿠 중앙공원에 사는 노숙자도 전화기는 있어."

"갖고 있지 않은 건 어쩔 수 없지. 몸수색이라도 해보지 그래?"

현대판 코미디의 주인공, 탐정 사와자키다.


<지금부터의 내일>은 일본 하드보일드를 이끄는 하라 료의 탐정 사와자키 시리즈 시즌 2의 두 번째 장편인데, 전작 <어리석은 자는 죽어야 한다> 발표 이후 무려 14년 만에 소개되는 신작이다. 아무리 과작의 작가라지만 시리즈의 오랜 팬들은 기다리다 지쳐 쓰러질 지경이다. 가뜩이나 46년생 작가의 나이도 적지 않은데 말이다.

탐정 사와자키 시리즈를 처음 접하는지라 전작들과의 연속선상에서 논할 수는 없지만, 시리즈의 매력이 무엇인지, 사와자키란 어떤 인물인지, 왜 탐정 사와자키가 일본 하드보일드를 대표하는 캐릭터인지 이 한 편으로 체감하는데 크게 부족하진 않다.

이미 세상을 떠난 파트너 이름을 그냥 사용하는 '와타나베 탐정 사무소'를 홀로 지키는 탐정 사와자키는 휴대폰을 쓰지 않으며, T·A·S라는 고색창연한 전화응답 서비스를 애용한다.(아직도 일본엔 이런 서비스가 존재하긴 하나?)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절대 신뢰할 수 있는 탐정이란 평판을 얻고, 상대가 누구든 기본적으로 반말이 편하며, 안락의자 탐정과는 은하수만큼이나 떨어진 몸으로 움직이는 뚜벅이 탐정이고, 경찰이나 야쿠자 양쪽 모두에게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는 인물이다. 그렇다고 무시당하는 존재는 아닌지라 경찰과는 적당히 공존하며, 야쿠자는 새로운 사무실에 화환 정도는 보내는 관계다. 그런데 대관절 폭력단이 왜 50대 탐정에게 이전 축하 화환을 보내는지 그것도 의문이긴 하다. 이들은 도대체 무슨 관계인 걸까.

「의뢰인 A가 B의 신상조사를 사와자키에게 의뢰한다. 조사를 시작하자마자 B는 사망한 인물이라는 게 드러나고, A는 진짜 A가 아니라 A를 사칭한 인물이었다. 진짜 A는 다른 사건에 연루되어 행방불명이고.. 」

일단 드러나는 기본 플롯이 흥미를 끈다. 은행강도, 신원이 불분명한 시체, 전통의 고급 요정, 서로 대립하는 폭력단 파벌, 어디선가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나는 청년 실업가, 은행에서 발견된 거액의 비자금... 도무지 연결고리를 찾기 힘든 사건으로 탐정 사와자키는 뛰어든다. 이미 받은 수임료를 정확히 정산하기 위해.


<지금부터의 내일>에는 현대 추미스에서 주로 나오는 잔인하고 과장된 살인을 비롯한 강력 범죄는 거의 없다. 일어난 어수선한 사건조차 수학 공식처럼 정확한 답안이 제시되지 않는다. '대략 이런 거 아니겠어?'하고 구렁이 담 넘어가듯 지나가는데 이는 곧 탐정 사와자키의 스타일이자 하라 료의 방식일 것이다. 디지털 시대에 역행하는 뼛속까지 아날로그 정서를 장착한, 쇠락한 건물 2층에서 존재하지도 않는 파트너 이름을 내건 탐정 사무실을 운영하며, 아직도 전화응대 서비스를 애지중지하고, 거친 직업이지만 신사적인 방식을 동경하는 이 시대의 마지막 '낭만 마초'가 등장하는 이 소설은 본격물도, 사회파 미스터리도 아니다.

하드보일드 문학이나 필름 누아르 영화에서 봐온 정통 탐정의 어둡고 쓸쓸하지만, '강한 자엔 강하고 약한 자엔 약한' 유전자는 탐정 사와자키에게 제대로 발견된다. 잘 알려진 바대로 하드보일드물 중에서도 하라 료가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건 레이먼드 챈들러가 창조한 탐정 필립 말로인데, 이번 작품으로 "챈들러의 <기나긴 이별>에 필적하는 대표작으로 만들고 싶다"라는 야심을 밝힌 바 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독자들에게 도착한 새로운 탐정 사와자키 시리즈는 다시 또 언제 만나겠냐는 경건한 마음으로 줄어드는 페이지를 아쉬워하며 분위기에 취해서 읽어야 한다. 탐정 사와자키가 창조해내는 뭔가 아스라한 정서와 복고풍 분위기는 이 작품의 처음과 끝이다. 당신이 흡연자라면 담배가 생각날 것이고, 비흡연자라 하더라도 캔맥주 한 캔 정도는 이야기에 젖어드는데 좋은 동반자가 되리라.

아무래도 '사와자키 월드'에 귀순해야 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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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지나간 세계
아사다 지로 지음, 이선희 옮김 / 부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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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사다 지로의 <칼에 지다>는 내 인생 소설 중 한 편이다.

국내 최신간으로 소개되는 <겨울이 지나간 세계>는 2016~17년 마이니치 신문에 연재되었던 소설로 일본에선 <OMOKAGE>란 원제로 2017년에 단행본 출간되었던 작품이다. 원제와는 다르지만 <겨울이 지나간 세계>라는 국내 출간명은 작품의 이미지를 제대로 형상화한 문학적인, 박수쳐 주고픈 작명이다.

이 소설은 칠순이 된 작가의 깊은 연륜이 사골 국물처럼 진하게 우러나오고 여기에 '아사다 지로'표 감동이 첨가된 또 하나의 수작이다. "몰락한 명문가의 아이가 소설가가 되는 경우가 많다"라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문장을 읽고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아사다 지로! 도쿄의 큰 부잣집 아들로 태어난 아사다의 집안은 망했는지 모르지만, 우린 이래서 오늘도 뛰어난 이야기꾼 아사다 지로의 신간을 읽는다. 참 다행이다.

「한 남자가 있다.

다케와키라는 이름의 이 남자는 평생 한 눈 팔지 않고 직장인으로 성실하게 살아왔고, 집과 직장만을 지하철로 통근하는 무미건조한 인생을 살았다. 65세 정년퇴임 환송식까지 마치고 마지막 퇴근을 하던 중 그는 지하철에서 뇌출혈로 쓰러지고, 신비한 기억 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

대기업 임원으로 어느 정도 성공한 직장 생활을 한 다케와키. 아내와 외동딸 가족을 둔 단란한 가정사는 타의 모범으로 언뜻 겉보기에는 불행의 그림자가 전혀 비추지 않는 듯하지만, 생사의 기로에서 그는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여행을 다른 세상인 이세계(異世界)로 떠나 미지의 인물들을 만나고 과거의 기억을 소환한다.

다케와키에게는 아들 하루야가 있었으나, 어린 나이에 저세상으로 보낸 아픈 기억이 원죄처럼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다. 그리고 거의 아는 사람이 없지만, 그는 부모가 누군인지 모르는 고아다. 이름도 독지가의 성과 프로야구 선수의 이름을 조합해서 만들었고, 12월 15일이라는 생일조차 명확하지 않다. 사실 그는 이러한 태생적인 불행을 한마디 불평 없이 견디며, 묵묵히 자기 가족이란 울타리를 만들어내며 고분분투했던 거다.

'지하철 인생'이라고 요약할 수 있는 그의 인생사는 이세계 여행을 통해 지하철이 갖는 커다란 의미가 다시금 드러난다. 그리고 출생의 비밀이라는 풀리지 않던 매듭을 풀게 된다.

소설의 주인공 다케와키는 1951년생이다. 아사다 지로 역시 '51년생이니 주인공의 설정이 우연만은 아닐 터이다.

<겨울이 지나간 세계>는 '51년생들과 그리고 전후에 태어난 그 윗세대('전후세대'로 칭할 수 있겠다)에게 전하는 소설가의 따뜻한 정종 한 잔이다. 술잔과 더불어 깊은 공감과 따뜻한 위로가 함께함은 물론이다.

전후세대는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는 경우도, 있기는 했으나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경우도 많았기에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바로 일본의 고도성장기, 경제부흥을 이끌었다.

"남들에게 말할 수 있는 고통은 뻔할 뻔자다. 그런데 남들한테 말할 수 없는 고생이라면······. 나도 그 정도는 알고 있다." - P 41

"시시한 이야기가 너무나 귀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 P 230~231

'이야기'를 '인생'으로 바꿔 보자는 게 저자의 의도는 아닐는지. 시시한 인생은 없다!

"하지만 65년 만에 끝나서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 인생의 행복과 불행의 양이 똑같다면 내게는 아직 15년이나 20년쯤 행복한 시간이 남아 있어야 한다." - P 237

저자의 동년배인 이들에게 아사다가 꼭 전하고픈 한마디.

"당신은 참 열심히 살았어요." - P 101

 

"따분함은 참 좋다. 삶에 아무런 영향이 없는 것들을 생각하는 시간. 오직 사고와 상상만 하는 비생산적인 시간. 옛날 인류는 풍요로운 시간을 주체하지 못하며 살다가 우아하게 눈을 감았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런 일들은 나태함이 되고 비생산적인 행위가 되었으며, 사람들은 자유로운 사고와 상상을 봉쇄하며 살게 되었다. 아무리 수명이 늘어났다고 해도 그런 인생은 너무나, 그런 죽음은 너무나 빈곤하지 않은가." - P 192

 

어느덧 인생의 후반전을 뛰는 사람들, 특히 남성 독자라면 <겨울이 지나간 세계>를 통해 아사다 지로가 선사하는 "BRAVO, MY LIFE & YOUR LIFE!"에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오르는 격한 공감을 피할 수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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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일 365일 1
블란카 리핀스카 지음, 심연희 옮김 / 다산책방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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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표지에 표시된 홍보 문구 "2020년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본 넷플릭스 영화 원작 소설"이 눈길을 확 끈다. 영화 <365일>의 원작 소설이라... 도대체 무슨 내용이길래 이토록 많은 이들의 선택을 받았을까?

여주인공 라우라의 시선으로 소설은 진행된다.

「호텔에서 성공가도를 달리다 남자 친구 마틴과 함께 이태리로 여행을 떠난 라우라는 신비한 마성의 섹시남 마시모에게 납치당한다. 그가 라우라에 꽂힌 이유는 매우 특별하지만, 당사자인 라우나에게 마시모는 정체 모를 유괴범일 뿐이다. 이 남자는 돈을 그야말로 물 쓰듯 써대고 주변 모든 인물들 위에 군림하는 젊은 폭군이지만 치명적으로 섹시하고, 침대에선 여성에게 평생 잊히지 않는 섹스를 선사하는 짐승남이다. 영화 <대부>를 비롯한 다수의 갱스터 장르물에서 이탈리아 마피아의 총 본산으로 묘사되는 코사 노스트라(시칠리아 마피아)의 카포파미글리아(capofamiglia_마피아 가주)가 바로 '돈' 마시모다. 결국 365일의 이야기 구조는 "말하자면 포르노 장면이 곁들여진 마피아 영화 같은 삶이 될 것이다."(P 341)」

 

솔직히 라우라에 대해선 그다지 할 말이 없다. 운명의 변화구를 만난 미모의 젊은 여성이란 점 외에는. 이 운명이 행운이냐 불운이냐는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아마도 대부분 독자들은 행운이라고 그녀를 질투하지 않을까. 섹스에 적극적이란 점 외에 그녀는 별다른 특장점이 안 보이고, 선택지도 거의 없다.

반면 '포식자' 마시모는 언급할 부분이 많다. 시칠리아에 거점을 두고 있긴 하지만, 그의 패밀리는 사업을 안 하는 지역을 말하는 게 더 쉬울 정도인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고 부유한 이탈리아 마피아 조직이고, 5개 국어에 능통한 젊은 수장인 마시모는 고위직(!)임에도 불구하고 서슴없이 살인을 저지르며, 제트기나 초호화 요트, 슈퍼카를 소유하고 명품으로 온몸을 휘감고 미국 드라마 「다이너스티」의 세트장과 비슷한 대저택에서 살지만 늘 생명의 위험을 느낀다. 그는 원하는 것은 그게 무엇이든 얻어내고, 타인을 지배하는 명령에 익숙하며, 본인의 말을 거역한다는 건 상상하기 힘들다. 사랑하는 연인이라도.


<365일>의 배경은 마피아 패밀리가 제공하는 상상을 뛰어넘는 럭셔리 라이프스타일, 이제는 합법화된 패밀리 비즈니스를 운영하는 '마시모 월드'지만, 주된 향신료는 끝까지 밀어붙이는 거친 섹스다. 일반인들은 알 수 없는 마피아의 세계, 럭셔리 명품도 매력적인 배합 요소이긴 하지만 그거로는 부족하다. 사람이 하는 일이니 이 정도 강도의 섹스를 일상생활에서 영위하지 말란 법은 없겠으나, 그 수위는 사뭇 19금을 초월한다. 비교 대상으로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를 언급할 정도니, 29금 이상의 자극을 원하는 독자들은 이 대목에선 환호할 만하다. 유기농도 좋지만, 언제나 불량식품은 필요하다.

"허리의 반동이 어찌나 심하던지 온갖 종류의 오르가슴이 홍수처럼 차례대로 나를 덮쳤다. 눈사태처럼 몰아치는 절정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난 하릴없이 이를 갈고 말았다. 엉덩이에 부딪치는 남자의 허벅지 소리가 귓가에 박수소리처럼 들려왔다." - P 333

럭셔리가 기본값인 마피아 월드와 거칠고 격한 섹스의 향연이 배합된 <365일>이 거둔 소설과 영화의 글로벌한 성공은 이런 자극과 판타지로 대리만족을 얻는 다수 대중의 존재를 입증한다. 여기서 남성이 철저히 밤낮으로 지배하는 세계에 던져진 무개념 인형처럼 묘사된 여성에 대한 페미니즘 차원의 비판은 논하지 말자. 그런 분들은 안 보고 안 읽으면 된다.

이 소설은 전체 3부작 중 첫 편에 해당되기에 독자적인 마무리를 맺지 않는다. 감질나는 이야기는 다음 편 <또 다른 365일>로 이어진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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