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의 내일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3
하라 료 지음, 문승준 옮김 / 비채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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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축은행에 2인조 강도가 들었다. 손님들을 인질로 잡고, 제일 처음으로 한 일은 당연하게도 핸드폰 압수! 그런데 한 사내가 자신은 핸드폰이 없다고 한다. 요즘 같은 세상에 무슨 말도 안 되는...

"휴대전화는 갖고 있지 않아."

"이봐,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양반이 괜히 애먹이지 마. 요즘 세상에 휴대전화가 없다고? 신주쿠 중앙공원에 사는 노숙자도 전화기는 있어."

"갖고 있지 않은 건 어쩔 수 없지. 몸수색이라도 해보지 그래?"

현대판 코미디의 주인공, 탐정 사와자키다.


<지금부터의 내일>은 일본 하드보일드를 이끄는 하라 료의 탐정 사와자키 시리즈 시즌 2의 두 번째 장편인데, 전작 <어리석은 자는 죽어야 한다> 발표 이후 무려 14년 만에 소개되는 신작이다. 아무리 과작의 작가라지만 시리즈의 오랜 팬들은 기다리다 지쳐 쓰러질 지경이다. 가뜩이나 46년생 작가의 나이도 적지 않은데 말이다.

탐정 사와자키 시리즈를 처음 접하는지라 전작들과의 연속선상에서 논할 수는 없지만, 시리즈의 매력이 무엇인지, 사와자키란 어떤 인물인지, 왜 탐정 사와자키가 일본 하드보일드를 대표하는 캐릭터인지 이 한 편으로 체감하는데 크게 부족하진 않다.

이미 세상을 떠난 파트너 이름을 그냥 사용하는 '와타나베 탐정 사무소'를 홀로 지키는 탐정 사와자키는 휴대폰을 쓰지 않으며, T·A·S라는 고색창연한 전화응답 서비스를 애용한다.(아직도 일본엔 이런 서비스가 존재하긴 하나?)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절대 신뢰할 수 있는 탐정이란 평판을 얻고, 상대가 누구든 기본적으로 반말이 편하며, 안락의자 탐정과는 은하수만큼이나 떨어진 몸으로 움직이는 뚜벅이 탐정이고, 경찰이나 야쿠자 양쪽 모두에게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는 인물이다. 그렇다고 무시당하는 존재는 아닌지라 경찰과는 적당히 공존하며, 야쿠자는 새로운 사무실에 화환 정도는 보내는 관계다. 그런데 대관절 폭력단이 왜 50대 탐정에게 이전 축하 화환을 보내는지 그것도 의문이긴 하다. 이들은 도대체 무슨 관계인 걸까.

「의뢰인 A가 B의 신상조사를 사와자키에게 의뢰한다. 조사를 시작하자마자 B는 사망한 인물이라는 게 드러나고, A는 진짜 A가 아니라 A를 사칭한 인물이었다. 진짜 A는 다른 사건에 연루되어 행방불명이고.. 」

일단 드러나는 기본 플롯이 흥미를 끈다. 은행강도, 신원이 불분명한 시체, 전통의 고급 요정, 서로 대립하는 폭력단 파벌, 어디선가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나는 청년 실업가, 은행에서 발견된 거액의 비자금... 도무지 연결고리를 찾기 힘든 사건으로 탐정 사와자키는 뛰어든다. 이미 받은 수임료를 정확히 정산하기 위해.


<지금부터의 내일>에는 현대 추미스에서 주로 나오는 잔인하고 과장된 살인을 비롯한 강력 범죄는 거의 없다. 일어난 어수선한 사건조차 수학 공식처럼 정확한 답안이 제시되지 않는다. '대략 이런 거 아니겠어?'하고 구렁이 담 넘어가듯 지나가는데 이는 곧 탐정 사와자키의 스타일이자 하라 료의 방식일 것이다. 디지털 시대에 역행하는 뼛속까지 아날로그 정서를 장착한, 쇠락한 건물 2층에서 존재하지도 않는 파트너 이름을 내건 탐정 사무실을 운영하며, 아직도 전화응대 서비스를 애지중지하고, 거친 직업이지만 신사적인 방식을 동경하는 이 시대의 마지막 '낭만 마초'가 등장하는 이 소설은 본격물도, 사회파 미스터리도 아니다.

하드보일드 문학이나 필름 누아르 영화에서 봐온 정통 탐정의 어둡고 쓸쓸하지만, '강한 자엔 강하고 약한 자엔 약한' 유전자는 탐정 사와자키에게 제대로 발견된다. 잘 알려진 바대로 하드보일드물 중에서도 하라 료가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건 레이먼드 챈들러가 창조한 탐정 필립 말로인데, 이번 작품으로 "챈들러의 <기나긴 이별>에 필적하는 대표작으로 만들고 싶다"라는 야심을 밝힌 바 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독자들에게 도착한 새로운 탐정 사와자키 시리즈는 다시 또 언제 만나겠냐는 경건한 마음으로 줄어드는 페이지를 아쉬워하며 분위기에 취해서 읽어야 한다. 탐정 사와자키가 창조해내는 뭔가 아스라한 정서와 복고풍 분위기는 이 작품의 처음과 끝이다. 당신이 흡연자라면 담배가 생각날 것이고, 비흡연자라 하더라도 캔맥주 한 캔 정도는 이야기에 젖어드는데 좋은 동반자가 되리라.

아무래도 '사와자키 월드'에 귀순해야 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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