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것들의 과학 - 물건에 집착하는 한 남자의 일상 탐험 사소한 이야기
마크 미오도닉 지음, 윤신영 옮김 / Mid(엠아이디)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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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미국에 두서너 달 장기 출장을 간 적이 있습니다. 현지 회사에서 아파트를 구해준 덕분에 편히 잘 지내다가 어느날, 원인 모를 이유로 화장실 변기가 갑자기 막히는 바람에 식은 땀을 흘렸던 적이 있었습니다. 볼 일을 이미 다 본 상태라 어떻게든 난감한 상황은 해결은 해야겠는데 혼자서 끙끙대다가 하는 수 없이 관리사무소에 전화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다행히 변기를 넘치지는 않은-미국 화장실은 왜 배수구조 없이 카펫을 깔아두는 지-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지만, 그냥 'out of order'라고 얘기하기에는 제 상황이 워낙 심각해서 하는 수 없이 당시 미국에서 살던 매형에게 전화로 상황을 설명했더니 껄껄 웃으며, 'clog'이라는 단어-평생 못 잊을 단어지요-를 가르쳐주더군요.

책을 보니, 저자는 그보다 한 두 단계 등급이 높은 참담한 상황을 겪었더군요.
저자가 무슨 심경의 변화를 겪었는지, 이 책이 미국에 출판될 때는 '화장지' 부분은 빠졌답니다. 미국 사람들 문화와 맞지 않을 것 같아서 뺐다는 얘기도 있는데, 글쎄요. 미국 사람들도 밑은 닦고 살텐데 말이죠. 어쩌면 5장 경탄할 만한 거품에서 소개되었던 경험이 미국에 대해서는 자기검열을 확대해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저자인 마크 미오도닉은 영국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의 교수로 학내에서 학제간 연구를 주도하는 Institute of Making의 소장을 맡고 있습니다. 이 연구소가 하는 일의 범위가 자유 그 자체입니다. 분자를 만드는 사람에서부터 빌딩을 만드는 사람까지, 인조 피부에서 우주선을 만드는 사람까지 관심분야도 고고학 등의 인문학에서 화학, 건축학을 넘나들고 자체내에 2000개 이상의 물질을 모아둔 Materials Library와 마음먹은 물질이나 제품을 전문 기술자의 도움을 받아가며 제작이 가능한 Makespace를 운영하기도 합니다.

책에 나오는 모든 물질은 저자가 자기집 지붕위에서 찍은 사진에서 한꺼번에 동시 등장을 합니다. 먼저 저자가 사물들을 하나씩 설명하겠다고 얘기할때만해도 이 사람의 "덕후 기질(혹은 물질성애자)"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저만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해봅니다만 이런 일상적인 물건들은 하물며 그 물건들을 이루는 재료들은 그 존재 자체를 너무도 당연시하게 여기게 됩니다. 실제로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정말 다양한 뒷이야기들과 각계각층의 사람들의 수많은 노력이 보이지 않거나, 혹은 애써 우리가 외면해왔던 게 사실 아닌가요?
처음에 책 전체의 주제를 한꺼번에 보여주는 그 한 장의 사진을 볼 때는 저는 영국에서 제일 높다고 하던, 사진의 오른쪽 배경에 보이는 "The Shad"만 보았습니다.
덕후의 책들로는 <연필깎기의 정석>도 있고, <눕기의 기술>도 있었고, <문구의 모험>도 있었지요. 남들이 생각하기에 별것 아닌 것들로 책이 한 권이 나올 정도로 할 얘기가 많은 사람들이 더러 있다고 생각하며 재미있게 읽어보겠다고 읽었습니다.
그런데, 책을 읽고보니 이번엔 좀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되더군요.

제가 생각하는 좋은 책의 기준은, 순전히 제 기준으로, 그 책 혼자서 완전히 새로운 시각이나 관점을 주거나, 제대로 된 정보로 저를 업그레이드시켜주거나, 아니면 다음 책으로의 연결을 잘해주는 책입니다. 이 책은 세 가지 모든 경우에 해당합니다. 그렇다고 절대 '재미'가 없는 책은 아닙니다. 개인적인 에피소드로 시작해서 물리학과 생물학과 어쩌면 천문학까지 넘나드는 것이 전혀 부담스럽지 않고, 한번에 끝까지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리듬까지 갖고 있습니다.

출판사에서 소개하는 빌 게이츠 아저씨의 서평(아저씨는 '화장지' 에피소드는 못 읽어보셨겠네요)처럼 과연 더 이상 제 주변을 둘러싼 사물들이 전과 같이 느껴지질 않게 되었습니다.
사실 읽고나니 위의 책들의 미시적인 면들외에도 최근 읽은 척하는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의 빅 히스토리 관점이나 <우리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의 '롱 줌long zoom' 역사이나 심지어 <코스모스>와도 통하는 것 같습니다.

재료 얘기를 한참 듣다보면 그래서 우리는? 이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지요.
<사피엔스>를 둔 여러 논란이 있지만 저자 유발 하라리는 책을 마무리하면서 "이제 곧 우리의 욕망이라는 것도 공학적으로 해결하게 되겠지만, 진짜 중요한 질문 하나는 "우리가 무엇이 되고자 하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원하고 싶은가?"일 것이다."라고 화두를 던집니다.
어쩌면 두 질문 모두 '무엇(들)을 가지고'가 그저 생략되기에는, 그런 '사소한 것들'의 전혀 사소하지 않은 결정적인 도움없이는, 공허한 얘기일 수 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사소한 것들'을 그냥 있다 퉁치고, 나만, 그리고 우리만 생각하는 것은 사피엔스의 교만이고 무지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에서 나왔던 "유리 덕분에 우리는 세포와 미생물이라는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 내려가고, (거울을 통해 우리 자신을 성찰하고), 스마트폰으로 전세계를 연결했을 뿐 아니라, 우주의 초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었다"가 이번 책에서 어떻게 버무려져있는 지 확인하는 것도 재미있었습니다.

재료를 대하는 자세에서 저자는 미시 세계-멋진 신세계로서의 마이크로 파라다이스-를 이해하는 스케일에 대해서 상세히 설명하고, '좌석 업그레이드 비용'이라는 맛깔나는 비유도 들고,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형식에서도 영화 대본의 형식도 과감히 도입을 합니다.

리사 렌들 누님의 <천국의 문을 두드리며>에서 나온 얘기입니다만,
물질은 러시아 마트료시카 인형처럼 단순히 비슷한 구성 요소가 그저 더 작은 스케일로 되풀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고, 만지는 모든 면모를 세부사항을 두고만 볼 것인가, 아니면 다른 우선 순위에 따라 전체적인 '큰 그림'을 먼저 볼 것인가는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니지요. '적절한' 스케일을 고르는 문제입니다. 리사 렌들 누님도 예를 들었지만, 뉴욕의 레스토랑을 찾으려고 미국 전국 지도를 펼친다거나, 레스토랑의 위치를 알아보려고 그 건물의 평면도를 펼쳐볼 필요는 없는 것이지요.

저자의 말장난 수준도 그야말로 '수준급'이고 여러 분야에 걸친 해박한 지식도 읽을 재미를 더해줍니다. 예를 들면, 다이아몬드와 관련해서는 영화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에서 마릴린 먼로가 불렀던 노래('다이아몬드는 여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친구')를 인용을 하는 것이지요.

제가 즐겨 신고 다니는 운동화 밑창의 'Gel'도, 테니스 라켓, 스쿼시 라켓에 쓰여있던 Titanium도, 어금니 자리에 박힌 임플란트도 재료의 관점에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다음 작품을 위해 저자가 아껴둔 재료도 많을 것 같습니다. 총과 펜에 동시에 쓰이는 텅스텐도 그중의 하나일 것 같습니다. 저자의 영국식 농담을 흉내내면 재료의 관점에서는 펜이 총보다 강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얘기도 나올 것 같습니다. 같은 텅스텐이라는 관점에서 재료 자체에는 정치적인 의미는 없으니깐요.

물론, 저자의 주장중에서 강철과 관련하여 일본 사무라이 검이 산업혁명까지 '가장' 강한 강철이라는 부분에서는, 굳이 한일감정을 들먹이지 않아도, 다마스쿠스 검(Damascus Blade)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이 아쉽기도 합니다.
"탁구공만은 셀룰로이드로 만든다"는 것도 이미 탁구공마저 플라스틱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저자가 미처 확인을 못한 부분이겠구요.
오히려 Acknowlegement에 나온 결혼 25주년 은혼식을 15주년(동혼식)에 사용한 것은 애교로 보고 넘어가야겠지요.

트위터에서 어느 분이 "우리 모두 독립적이고 평등한 시민 1인이라는 사실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동등하게 선량하고 동등하게 사악한, 동등하게 현명하고 동등하게 미련한"이라던데 그 글귀는 우리 사회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발전한다는 것은 이렇게 사소한 것들을 애정하는 덕후들도 품어내는 사회의 다양성에서 출발하는 것은 아닌가 혹은 오히려 덕후를 장려하는 사회가 되어야 된다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무관심과 소외의 결과가 어느 분야에서건 악순환을 만듭니다. 사소한 것들에 대한 관심이 그리고 이런 책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다시 더 좋은 책을 만들게 되는 선순환으로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부디 이 책 '사소한 것들의 과학'이 대박났으면 좋겠습니다. 굳이 책 팔아서 자전거값 월부를 갚으려 한다던 농반진반의 김훈 선생의 말을 떠올리지 않아도 "사람들아 책 좀 사가라"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미쳐도 곱게 미쳐라"는 말도 있고, <미쳐야 미친다> 라는 책도 있지요. 어쩌면 이렇게 곱게 미치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아마 저자의 영향이 이미 제게 '미쳤기' 때문일 겁니다.

저자는 편지를 쓸 때도 마지막에 평범하게 'Sincerely yours'대신 'Materially yours'라는 표현을 쓴다고 합니다.
그렇지요. 칼 세이건 아저씨가 얘기했듯이 우리 자신이 바로 재료(starstuff)입니다.
그러고보니 원서 제목인 'Stuff Matters'사이에 Really!를 넣어보고 싶고, 우리말 제목인 '사소한 것들의 과학'이 재료를 두고 하는 말인지, 우리를 두고 하는 말인지 곰곰히 생각하게 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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