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틀 같은 고시원방에서 짐을 싸던 나는 책상 한 쪽에 놓여있던 이 책을 집어 들었다.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 책의 제목에 나는 주저 없이 책장을 열었다. 지금 나는 그 누군가의 대화가 절실하기 때문이었다. 어수선한 마음을 다른 이에게 털어 놓기는커녕 내색조차 하지 못한 채 전전긍긍하는 날들을 보내고 있는 내 이야기를 털어놓을 심산이었다.
이 책은 뇌과학 박사인 저자가 소개해주는 책을 통해 자신만의 질문을 찾아 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한 바람을 담고 있다. 나는 저자의 유혹에 망설임 없이 손을 내밀었다. 틀에 짜인 생활을 하는 나에게 책은 세상과 소통하는 길로 지친 마음을 달래거나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을 때면 책을 손에 쥐곤 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까지 나는 책을 통해 내가 원하는 답을 찾기에 급급했었는데 오히려 저자는 답이 아닌 질문을 우선으로 하고 있어 마음을 반짝이게 했다. 심호흡을 하고 나에게 익숙한 세상과는 사뭇 다른, 저자의 세상으로 눈길을 돌린다.
‘삶의 가치를 고민하는 길에서는 장폴 사르트르의 ’닫힌 방‘을 통해 지옥은 다름 아닌 타인들로 쇼펜하우어의 ’함께 혼자‘살아야 한다는 것을, 배철원의 ’신의 위대한 질문‘을 통해 주어진 답의 형식에서 벗어나 남들의 답이 아닌 질문으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예니 에를벤배크의 ’매일마다 저녁‘을 통해 인생은 우연과 필연의 합작으로 존재의 끝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을,
더 깊은 근원으로 들어가는 길에서는 더글러스 애덤스의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통해 대답에 앞서 질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호르헤 루이스 보르해스의 ‘원형의 폐허들’ ‘픽션들’을 통해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점차 모호해지는 것처럼 두려움과 사랑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더 깊은 차원으로 들어가는 길에서는 세자르 히달고 교수의 책을 통해 복잡하고 다양할수록 더 많은 질서가 생기고 그 중심이 바로 책이라는 것을,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통해 무의미한 투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도.......
나는 내 마음을 들킨 것 같아 당황스러웠다. 지금까지 나는 실패와 위기의 순간이 오면 그냥 부딪치는 것으로 최선을 다했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나의 ,주위의, 세상의 탓으로 돌리곤 했다. 그리고나서 마지못해 선택을 하고, 다시 또 되풀이 되고. 그러다보니 지금은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는 것이다. 휴학을 하고 외무고시 준비를 해온 2년의 세월을 되짚어볼 겨를도 없이 마치 도망치듯 짐을 싸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다른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세상이 짜 놓은 판에 섯불리 발을 들여놓지도 못한 채.......
나다운 것은 무엇이고 지금의 나를 극복할 수 있을지 곰곰이 생각해본다.
또 하나, ‘장미의 이름’으로 저자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사실에 내심 즐거웠다. 물론 나는 그저 읽는 것으로 만족했던 것과는 달리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존재하지 않는 영원한 의미를 추구하는 이데롤로기들은 언제나 폭력과 불행의 시작이라는 것을 깨닫게 했다. 어차피 아름다웠던 장미가 암기는 것이 장미라는 이름뿐인 것처럼, 나도 모르게 책꽂이에 꽂혀있는 ‘장미의 이름’으로 눈길이 간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가슴 한구석으로부터 무엇인가 꿈툴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막연한 불안함 대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이 자리 잡는 것 같았다. 그 힘으로 마음을 다잡고 다시 대화를 시작했다.
삶의 의미 관한 이야기는 어감이 주는 묵직함만큼 자세를 고쳐 앉게 했다. 그리고 아직은 삶을 논하기에는 어리다는 생각으로 무심했기 때문에 들은 이야기를 차곡차곡 쌓아야겠다는 치기어린 결심도 갖게 되었다.
존재의 의미, 삶의 의미에 대한 답이 42라는 답에 허탈해졌다. 750년에 계산을 끝낸 깊은 생각이 찾은 답은 분명 42지만 그 역시 또 다른 질문을 찾아야 하는 것처럼 우리의 삶 자체는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인간은 무슨 일을 하든 반드시 실패할 수밖에 없으므로 인간이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설사 다음번에는 좀 더 나아진다고 해도 다시 실패하는 것뿐이라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우리 삶의 도처에 있는 이해할 수 없는 삶의 미묘함, 삶의 역리에 절망하지 말고 자신의 길을 묵묵히 가야 한다는 생각에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고 코끝이 싸아해졌다. 지금의 나를 보는 것 같아서.
나는 어려서부터 공부에 대한 욕심이 많아 주변의 기대도 컸다. 우등생에 모범생으로 자란 나에게 공부는 자존감을 세워주는 길이었는데 수능 때부터 공부로 발목을 잡히고 말았다.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원하는 대학교에 들어가야 한다는 의지로 네 번의 수능을 치르고 대학생이 되었다. 재수, 삼수, 사수까지 네 번의 수능을 치르고 대학생이 되고 보니 남들보다 늦었다는 조바심을 달고 살았다. 그래서 대학생활도 조기졸업을 목표로 학업이외에는 눈길도 주지 않는 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그동안 모른척 하고 있었던 내 꿈이 조금씩 되살아났고, 급기야 나는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고시공부를 시작했다.
나는 올해 29세로 대학교 3학년 때 휴학을 하고 외무고시 공부를 하고 있다. 이렇게 결심하기까지 나도 쉽지 않았지만 주변에서는 나보다 더 걱정을 하고 있어 부담이 되곤 한다. 다시 외무고시 시험을 준비하면 적어도 2년은 걸리기 때문에 다시 또 늦어진다는 사실이, 또 수능 때처럼 한 번에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안함에 망설이기도 했지만 지금 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 용기를 냈다. 젊음을 오롯이 책상 앞에 앉아 보내면서도 꿈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곤 했었다. 그렇게 2년을 보내면서 손에 쥐어지지 않는 결과에 나는 조금씩 지쳐갔고 몸은 물론 마음까지 지쳐 그만 두고 싶다는 생각에 짐을 싸게 된 것이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그려보았던 미래, 내가 바라는 미래는 어쩌면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안함은 자신을 무기력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런 나에게 저자는 삶의 두려움을 전율로 바꾸라고 조언해주었다. 내용보다는 색깔, 결론보다는 소리, 책의 교훈보다는 피부로 느끼는 전율을. 그 바탕을 세이어스 허니의 ‘베어울프’로. 진짜 나의 모습에 대한 생각을 프란츠카프카의 ‘변신’으로, 코앞의 사소한 문제에 연연하지 말고 폭 넓은 시야로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류츠신의 ‘삼체’로.
가슴 한 쪽에서 무엇인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나는 다시 짐을 풀기 시작했다. 무심했던 손길에 힘을 주어 그동안 널브러져있던 시간을 정리하며 막연한 불안함 대신 새롭게 시작할 힘이 느껴졌다. 그리고 깨닫게 된다. 내가 바라는 미래는 스스로 내가 미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나는 또 다른 나를 만나기 위해 ‘장미의 이름’을 손에 쥐고 에코와의 대화를 하기로 했다.
스물아홉 당당한 발걸음을 내딛는다. 자신감으로 중무장한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