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누나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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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결혼하면서 남편에게 부러움을 느낄 때가 종종 있었다. 그 중에서 남편을 포함한 삼남매의 우애는 내가 따라갈 수 없는 없는 어떤 장벽처럼 느껴질 때가 종종 있었다.

10분 차이 나는 쌍동이 언니가 전부인 내 빈약한 형제관계에 비해 누나도 있고 남동생도 있어서 여자란 이렇다 혹은 형제간의 대화란 이렇다 하는 변화무쌍한 그들의 화젯거리를 듣다보면 저절로 엄마미소가 지어지기 때문이었다.


그 중에서도 남동생으로서 누나를 대하는 모습이 좀 많이 생소하면서도 부러웠다.


 

시누이는 나와 동갑내기이다. 그러니까 신랑이 연하란 소리다. 그래서 그런지 문득문득 던지는 말들이 가끔 웃프기도 하다.

이를테면 시누이한테 '내가 누나를 봐서 여자들이 생각만큼 안 씻는다는 건 알았거든. 근데 저 사람이 누나보다 더 안 씻어.' 같은.

 

남자형제가 없다보니 그런 폭로를 장난스럽게 해대는 남편이 야속하기도 했지만 지나고 보면 다 장난이고 우스갯소리였다는 걸 안다. 그래서 마스다 미리의 <내 누나>를 보면서 남편이 나를 보는 눈이 혹시 저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씻는 얘기에 대해 운을 뗐는데 그에 대해 떠올린 부분은 <브래지어>라는 에피소드를 보고 나서였다. 띠지에도 인용된 브래지어에 대한 일화. 그걸 언제, 얼만큼 입고 빠는지에 대해 여자가 말하는 기간과 실제로 여자가 착용하는 기간에 대한 적나라한 고백 말이다.


어느모로 보나 범생이 티가 역력한 남동생 준페이에게 누나는 그런 면들을 숨김없이 명쾌하게 설명해 주고 있었다.

 

남자이기 때문에 날카롭게 보고 집어내는 부분이 있는데 영어를 잘 하고 싶다면서 말로 끝난다거나 꽃을 사도 집에 와서는 처치곤란으로 처박아두면서 꽃을 살 때의 표정만큼은 수줍은 소녀 못지 않은 모습 등을 표현해 낸 부분이었다. 물론 여성 작가이기 때문에 이처럼 섬세한 게 가능하겠지만 우리 신랑이 나에게 던지는 나에 대한 해석과 비슷해서 깜짝 놀랄 때가 있기도 했었다.


남동생이 집어낸 누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흡사 남편이 꼬집어준 내 단점같기도 하더란 말이다. 그래서 다 큰 남매는 같이 사는 게 아닌가?ㅎㅎ



손바닥이 맞닿았을 때 아무런 느낌이 나지 않는 남자와 어떻게 연애를 할 수 있겠느냐는 발언은 좀 당황스럽긴 했지만 공감이 가기도 했다. 여자의 마음을 흔드는 건 강한 남성미와 한 없는 배려심에 더해 가끔 스치는 피부와 피부간의 닿음에서도 감정이 묻어날 수 있으니까. 그 점은 경험상 안다.ㅎㅎ


누나​ 지하루의 무심한 듯 흘려보내는 말들이 의외 준페이에게 먹히듯 내 마음도 먹어들어갔다면 아마 이런 점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만 가끔 같은 여자로서도 지하루의 말을 이해 못할 때가 있긴 했다. 맨 마지막 장에서 해외근무후 집으로 돌아온 부모님께 의젓한 준페이의 행적을 다 말아먹고 막내동생으로 전락시켜 버린 지하루. 그 후 준페이가 모든 여자들이 누나같을까 하면서 전율하는 장면 같은.


그 부분은 누나를 갖고 있는 남동생인 남편한테 왜 그런지를 물어보고 해석해 달라고 해야 했다. 세상 모든 여자가 누나 같으면 안 되나? 저렇게 현명하면서 부담 없는 여잔데?

그런데 남편의 해석은 달랐다. 내가 본 건 수많은 여자들 중에 그래도 니 누나가 젤 낫다, 였다면 남편은 세상 모든 여자를 보는 기준이 누나가 되어버려서 다른 여자를 만나도 누나 같다면 싫을 것이란 뜻이란다. 흐흠. 알다가도 모를 해석이긴 했지만 대충 이해할 수 있는 심리상태이긴 했다.


그래서 오징어 다리 열개중 하나 없어졌다고 싸웠다던 유명한 모 남매의 유아틱한 이야기가 아니라 평범한 회사원 남매의 현실적인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내 누나>를 읽어보기를 강력 추천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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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살 전에 떠나는 엄마 딸 마음여행
박선아 글.사진 / 위즈덤하우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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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마음에 빚을 지고 살게 되는 경우가 있다. 약속한 일이나 선물을 하지 못했을 경우가 그런데 지난 12월에 선물받은 책에 대한 감상을 아직껏 작가에게 전달하지 못한 점은 백만배의 면구함으로 뻥튀기 되어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블로그 이웃이신 녹색희망님은 아이가 일곱살이었을 때 세계여행을 다니기 시작하셨던 분이다. 보통의 여행블로거와 다른 점은 아이를 대동하고 아이의 시선을 같이 녹여내는 글을 쓰신다는 건데 읽다보면 아이의 시선과 생각을 깊이 이해하는 부분에 감탄하기도 한다.


이전에 나왔던 <일곱살 여행>과 다르게 국내의 장터와 시장, 마을들을 돌아다닌 기록이 쌓여서 출간된 <열 살 전에 떠나는 엄마 딸 마음여행>

물론 블로그 이웃이어서 제주도 여행과 장터여행, 시장 여행 등에 대한 글을 이미 읽었었다.

그런데도 책으로 묶여진 두 사람의 알콩달콩 혹은 달콤캄캄한 여행기를 읽으니 새삼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 도시 아이를 어른답게 만들어주는 반면, 산촌은 아이를 더 아이답게 만들어 주는 것 같다. 내 아이가 더 아이다워지는 산촌을 그래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19쪽).


아이와 함께 시골마을과 장터를 여행하게 된 작가의 마음. 아이가 더 아이다워지기를 바라는 엄마로서의 마음이 물씬 느껴졌다.

항상 아이를 대동하고 국내 이곳저곳, 심지어 해외까지 무람하게 넘나드는 엄마로서의 작가를 보면 무슨 일이든 아이를 떼어놓고 다녀야 마음이 놓이는 나 자신을 반성하게 된다.

아이와의 여행은 물론 힘들지만 육아에 대한 철학으로 여행을 선물해주는 엄마의 마음을 알 것 같기 때문이다.


- 함께 여행을 하다보니 손양은 마냥 어리지만은 않은 열린 마음의 지혜로운 여행자였습니다. 그런 아이의 시선과 아이의 생각을 존중해주는 것이 정말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270쪽).


아이가 진정 잘 해낼 수 있는 게 여과없이 현상을 바라보는 일이라면 '여행'만큼 다양한 현상을 볼 수 있는 것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아이와 하는 여행이 주는 고단함이 다 생략된 것도 아니다. 나만 해도 두 아이를 데리고 시내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것만큼 고역스러운 게 없으니까.

작가도 아이와 함께 몇년간 계속된 여행이라지만 이골이 났다고 해서 결코 편해진 건 아니었을 것이다.


-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그날 손양과 그렇게나 맛있다는 가파도 정식을 맛볼 수 없었다. 가파도 민박집은 선착장의 정 반대쪽, 그러나 나는 아쉽게도 가파도에 한나절 잠시 머물다 가야 하는 여행자인데다 언제나 느려터진 여행 동반자 손양과 함께였기 때문에 시간 맞춰 정해진 목표물에 도착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218쪽).


그런데도 여행을 계속할 수 밖에 없었던 건 여행지에서 만난 인연, 사람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살고 있는 인구가 얼마 되지 않는다며 버스도 다니지 않는 방재마을의 할머니, 시장에서 채소를 팔면서 일본어 원서로 된 책을 읽는 할머니, 철산동 골목길에서 만난 푸근한 인심의 분식집 주인, 이곳저곳에 외갓집처럼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마음을 아이는 배우고 있었고 작가인 엄마 또한 배우고 있었다.




- 어린 손양이 자라 청소년이 되고 어른이 되는 어느 날, 찐빵 두 개에 어린 소녀처럼 배시시 웃던, 버스도 오지 않은 어느 산골 마을의 할머니 동네를 기억하겠지. 아마도 그 기억 덕분에 다름으로 같아지는 세상을 꿈꾸게 될 것이고, 다름으로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 또한 기억해 내지 않을까. 볼 것 없는 방재마을은 지금 당장 보다는 먼 훗날에 어린 손양에게 많은 것을 보여주게 될 것이다(81쪽).

 

- 심심해서 책을 보신다는 할머니의 책을 손양과 들여다보다가 더욱 깜짝 놀랐다. 할머니는 일본어 소설을 읽고 계셨다. 정확히 따지면 조금은 서글픈 이야기일 수도 있다. 할머니의 연령대로 보아 분명 일제 강점기에 학창 시절을 보내셨을 테니... 개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본말을 배웠을 것이다. 그래도 광복 이후 지금까지 그 문자를 잊지 않고 문학적 취미로 키우신 할머니의 노력은 역사적 비극과는 상관없이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102쪽).


- 떡볶이 2인분에 2,000원. 어묵 두 개에 400원. 배불리 먹어도 2,400원이다. 손양이 떡볶이를 하도 맛나게 먹어 1인분 더 추가하려 하니 주인 아주머니 왈, "뭐 하게. 더 먹으면 과하다. 나중에 또 와. 나중에 또 와서 먹으면 되지. 잘 먹으니까 예쁘다. 우리 아가!"(180쪽)


이런 대접을 받으며 자란 손양은 어른의 친절을 가감 없이 받아들이는 지혜로운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라면서, 그 때 다니던 회사에서 여행 경비에 대한 자기계발비를 쓸 수 있도록 지원해 주면서 가족여행을 몇 번 다닌 적이 있다. 여행의 목적은 단순히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아침을 맞는다는 것이었다. 첫 여행지는 산정호수였고, 두번째가 안면도였고, 그 다음은 산음 자연휴양림이었다. 그리고 설악산 케이블카를 타기 위한 한 가지 목적으로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이런 단순한 이유만 가지고도 여행이 성립될 수 있을까? 의심이 들었는데 이에 대해서도 작가는 명쾌한 해답을 주었다.

 

- 여행을 특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아마도 평생 여행이 주는 남다른 경험을 즐기지 못한 채, 지루한 일상의 파동 없는 삶을 지속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오래전부터 여행이 내 취미고, 특기고, 소망이 되어버린 그 흔적들을 돌이켜보니, 여행은 그저 가볍게 나서는 것, 그 자체였던 것 같다. 그냥 집 밖을 나서는 것, 그냥 어제의 내 마음을 내려놓고 나서보는 것, 그냥 조금의 설렘만을 안고 내 동네 밖으로 딱 한걸음만 나서보는 것, 고작 한걸음 밖인데도 내가 알던 세상과는 전혀 다른 세상을 만나기도 하는 것, 거기서 오른쪽으로 한 바퀴 돌다보니 내가 살던 풍경과 똑 닮은 곳을 만나기도 하는 것, 그래서 울고 웃고 뜨거워지고 차가워지곤 하는 내 마음의 파동을 다시 만나는 것, 그것이 여행이었던 것 같다(182쪽).

 

 세상에서 여행만큼 정답 없이 의지대로 되는 것도 없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남들과 똑같은 풍경을 보기 위해 떠나는 길이 결코 여행은 아닐 것이다. 자기만의 길을 가는 것도 여행이 될 것이고 그때그때마다 주어진 상황대로 나아가는 길도 여행길의 첫걸음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아직도 아이와 함께하는 여행은 혼자서 할 자신이 없다. 작가처럼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시장을 찾아다닐 자신도 아직 없다. 그렇지만 여행에 대한 철학에 대해서는 분명 배워야 할, 얻어 가져야 할 무엇이 있었다.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 아이의 내면이 단단해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는 것이었다.

 

집 밖으로 나 혼자만이 아닌 아이와 함께 한 걸음을 뗄 용기를 내보라고 도닥이는 역할을 이 책은 해주고 있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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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치게 산문적인 거리 - 용산 걸어본다 1
이광호 지음 / 난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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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호, <지나치게 산문적인 거리>는 가볍게 읽고 넘기기에는 좀 어려운 책이다.

사실 나같은 범인은 이해하기 쉽지 않은 사유가 곳곳에 녹아있고 일상적인 의미의 산책이라 하기에는 묵직한 걸음걸음이 족족 부담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 이 책은 용산이라는 장소의 특정성에 글쓰는 산책자인 '나'라는 익명의 실존이 돌아다닌 흔적이다.

 

- 용산과 세월호 사이의 서로를 마주보는 비극의 연대기와 '국가'의 참혹함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만 했다. 무력감과 죄의식은 오래고 익숙한 것이나, 한 시대의 애도는 한 개인의 애도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어떤 글쓰기는 피할 수 없이 애도의 제의가 될 수밖에 없다. 예정된 망각과 마비와 자기기만으로부터 끈질긴 애도를 지키는 것은 문학적인 동시에 정치적인 기다림의 문제이다.

 

 

 

 

고등학생 시절, 어쩌다 보니 경기도 부천에서 명동까지 학교를 다녔다. 그때는 급행전철이 없었기 때문에 스무개가 넘는 역을 일일이 정차했다가 서울역에서 내리는 완행열차를 탔었다.

그 때, 1년에 한번 꼴로 있었던 철도청 파업 때문에 간간이 다니던 전철에서 거의 초주검이 되어 서울역까지 향하고 있을 때 남영역 광고판에 붙어있던 농심 라면 봉지들을 보며 한숨을 쉬던 기억이 있다.

또 어떤 겨울 밤. 전철을 타고 가다 속이 안 좋아서 남영역에 내려 토한 적이 있었다. 스크린 도어도 없었던 그때, 한밤중에 양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적막을 견디던 기억이 난다.

 

- 철길 옆에 서 있는 광고판에는 광고라고 쓴 한자 밑에 시골 사람들로 보이는 한 쌍의 중년 남녀의 그림이 있다. 그 뒤에 무섭게 올라가고 있는 거대한 주상복합 빌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 70년대풍의 광고판은 남영역이 내재한 어색한 농담과 같다.

 

얼마전 <지나치게 산문적인 거리>에 묘사된 광고판을 찾으려고 가봤더니 광고판은 전부 흰색으로 덧칠되어 있었다. 다만, 중고등학생 시절 몇번씩 보며 지나치던 농심 라면의 봉지모양은 들뜬 페인트를 뒤집어쓴 채 흔적만 내보이고 있었다.

 


 

 

아이가 발레수업을 받는 50여분동안 나는 바깥에서 기다리는 일이 잦았다. 다른 엄마들처럼 나도 4인치짜리 스마트폰 화면에 코를 박고 있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다 TV를 잘 보지 않게 되면서 인터넷 정보도 금방 흥미를 잃었다. TV가 줄 수 있는 호기심은 TV와 소원해지는 순간 사그라들었다. 그 자리를 다행스럽게도 책을 보며 채울 수 있었다.

한 글자, 한 문단을 허투루 읽을 수 없었던 <지나치게 산문적인 거리>. 설탕이 안 들어간 줄 알고 샀던 커피에서 단 맛이 나 당황스러웠지만 그런대로 마시면서 읽어내려 갔다.

 

- 어떤 장소가 제의적인 공간이 되는 것은 우연에 기댄 것이다. 스쳐지나가던 골목길과 육교와 작은 공원과 카페가 어느 순간 가벼운 마음으로 지나치지 못하는 장소가 되는 순간이 온다. 그 순간이 만들어지는 것은 오로지 사람의 의지는 아니다.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만드는 것은 우연이라는 이름의 사소한 운명들이다. 그 우연들에 운명이라는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겠지만, 어떤 우연들은 삶을 일거에 다른 시간으로 돌려놓고 되돌아오지 못하게 만든다. 그 우연들의 의미를 찾아낸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삶은 피할 수 없이 잔혹해 보인다.

 

원치 않게 단 커피를 마셔야 하는 지금, 아이의 발레교습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지금. 거듭된 우연을 찾아야 할 필요를 원래 느끼지 못했으나 왜 되는 일이 없냐고 갑자기 한탄하고 싶어졌다. 이 더운 날 왜 나는 에어컨도 안 나오는 이곳에서 살 찔까봐 설탕을 줄이고 있으면서도 버리지 못하고 단 커피를 마셔야 하는가? 같은.

 

그 의미를 찾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자기 신념대로 전쟁터에 나가 이슬처럼 사라져버린 젊은 목숨들이 '전쟁기념관'이라는 거대한 비석 안에 봉인되어야 하는지 그 의미를 찾을 수 없는 것처럼.

 

- 삶이 갖고 있는 악의에는 치유법이 없었다. 다만 '돌이킬 수 없음'을 이해하는 것만이 유일한 지혜였다.

 


 

초등학교 때 나는 시골에서 살다가 서울로 전학을 왔다. 초등학교야 고만고만하게 사는 아이들이 모여 학교를 다니던 시기였으니 그런 걸 몰랐는데 중학교에 들어가니까 문득 깨닫게 된 게 있었다. 바로 '빈부격차'.

 

부모님은 원래 시골 사람들이었고 현금이 나가는 걸 좋아하지 않는 분들이라 중학생 여자 아이 둘에게 늘 회수권만 두장씩 쥐어 학교에 보냈다.

 

어느날 어찌하다 같이 다니던 친구가 물주라며 어떤 여자아이를 잡더니 여덟이나 되는 친구들의 밥을 사게 했다.

그 친구는 너무나 호기롭게 지갑을 열었고 아무렇지 않게 밥값을 계산했다. 그 아이는 부자구나, 생각한 것도 잠시. 다른 아이들의 지갑에도 만원짜리 지폐가 여러장씩 들어있다는 걸 그 날 알게 되었다.

 

- 어떤 장소에서 벗어난다 하더라도 그곳의 시간으로부터는 벗어날 수 없다. 너의 장소를 벗어난다 해도 너의 부재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원래부터 돈 쓰는 규모나 사는 방식을 다르게 배워온 아이들 속에 시골에서 자랐고 회수권만 달랑 두 장 들고 다니면서 지갑도 없는 나같은 아이는 동떨어진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최근에 집안 사정으로 어쩔 수 없이 재택업무를 알아보고 면접을 보던 날, 공사 건물이라 에어컨도 나오지 않는 대기실에 앉아 책을 읽었다. 결핍이라는 주제는 용산에 내재되어 있는 빠른 속도만큼이나 존재감이 커지는 부분일 것이다.

 

- 이 유서 깊은 달동네는 단기 체류하는 젊은 외국인들과 제3세계로부터 온 비정규직 이주 노동자들이 함께 거주해왔다. 한남동의 '장기 체류자들'과 비교한다면, 해방촌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단기 체류자들'은 이 동네가 오래 머물 수 없는 시간의 이름이었음을 말해준다.

 

- 사람은 어디서든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 가파른 골목 위에 세워진 '의식주'의 공간들. 이 계단이 식민지 시대 일본의 전쟁 군인들을 기리던 호국 신사로 올라가는 길이었다는 것은, 이 거리의 잊힌 비밀에 속한다. 희미하고 좁은 골목에서 나온 등이 굽은 할머니가 폐지를 줍는 시간, 데이트하는 젊은 연인들이 손을 잡고 계단을 오르내린다.

 

- 폐허는 공간 너머의 시간이 있다는 것, 공간이 될 수 없는 시간이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서울, 특히 용산구와 중구(내가 살던 곳이다) 일대는 시간의 흐름이 촘촘하다는 느낌이 든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간격도 좁고 집과 집 사이의 간격도 좁다. 넒은 운동장은 고등학교나 가야 볼 수 있고 한적한 곳은 잘 찾아보기 어렵다.

 

지금 살고 있는 인천의 택지개발지구는 그에 비하면 좀 느슨한 느낌이 든다. 이제 막 개발이 되고 있어서 유입되는 사람들도 적고 이른 아침에 출근하는 일군의 사람들이 빠져나가면 한낮에는 도로에 다니는 차량도 적은 편이다.

 

내가 살고 있는 인천의 한 타운의 거리와 용산의 거리는 간격이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이곳으로 이사 온 뒤 무언가를 키우는 일의 평범한 위로를 포기할 수 없어 작은 화분을 사들인 적이 있다. 죽은 식물을 화분에서 뽑아내고 새로운 식물을 옮겨 심는 일이 반복 될 때마다, 생명의 사소함과 죽음의 평범함에 대해 무감해졌다.

 

푸석한 흙밖에 남지 않게 되는 빈 화분들의 무덤과 잘 일궈진 땅을 임대해 간간이 나오는 소작물로 여름을 날 수 있는 우리 동네. 용산과 우리 동네는 아마 그 정도의 간격이 있을 것이다. 시간의 느슨함 또한 결국은 사람이 하는 일일 것이므로.

 

그러나 내가 살던 곳도 결국은 사람의 손을 탈 준비를 하고 있다. 올해 임대했던 텃밭은 점점 좁혀오는 포크레인과 개발의 바람을 타고 내년에는 임대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햇빛 뜨거운 날 조그마한 풀뱀이 토마토 잎사귀 밑 그늘에 쉬러 들어갈 만큼 깨끗한 환경도 조금 있으면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풀뱀의 안위 따위 다 잊힐 것이다.

 

용산에서는 고작 그늘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투쟁하던 사람도 죽인 일이 있었으니까..

 

- 사람들은 왜 망루에 오르고 타워크레인에 올라가는가? 혹은 왜 망루에서 불타 죽어가거나 타워크레인 위의 칼날 같은 바람 속에 혼자 서 있어야 할까? 이곳은 말을 박탈당한 사람들의 장소이다.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다만 작은 한식당과 호프집과 복집을 생계의 수단으로 삼았던 사람들과, 의식주의 공간을 빼앗긴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도 잘 아는 철거민들이었다.

 

이리 보면 <지나치게 산문적인 거리>는 비장함마저 감도는 느낌이 든다. 해방촌과 청파동, 서부이촌동과 남일당 터, 후암동과 이태원 등. 어쩔 수 없이 세월의 풍파를 겪어야 했고 거기서부터 출발해 한남동과 동부이촌동의 부촌을 형성했던 사람들의 기록이 나오지만 아직까지 현재진행형인 사람들도 그곳에 남아 있다는 걸 끊임없이 상기시켜 준다. 결코 가볍게 읽을 수 없는 이유다.

 

그래서 작가는 이리 얘기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 애도는 완결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기다림이다. 나는 너라는 부재 속에 대기한다.

 

산책이란 사유하는 것이고 일상이란 살아가는 문제일 것이다. 사유가 빠진 일상은 껍데기만 남기 마련이겠지만 가볍지 않은 일상에서도 다행스런 부분을 찾아내기 위해 산책을 한다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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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위한 철학수업 - 자유를 위한 작은 용기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5
이진경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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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삶을 위한 철학수업>은 문학동네 카페에서 연재가 거의 끝나가던 무렵에 보게 되었다. 당시 회사의 팀장과 사이가 좋지 못했고 그 관계가 틀어져 버리니 같은 팀원들도 모두 나를 안 좋아할 거라는 지레 짐작에 마음이 좋지 못했다. 그러다 하던 일까지 싫어졌고 꼭 내가 돈을 벌어야만 잘 살 수 있을까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한없이 서글퍼졌다.

하필, 그 때 본 챕터가 <돈과 자유_헝그리정신과 궁상>이었다.

 

 

- 확실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의 돈을 받으려면, 나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돈 주는 사람이 시키는 일을 해야 한다. 그래서 그 때 결심했다.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고 살려면, 돈을 적게 벌어야 하고, 그러려면 돈을 적게 써야 한다. 적게 벌고, 적게 쓰고, 나 하고 싶은 걸 하고 살자!

 

 

이 구절을 읽으며 그때 처음으로 결혼하고 지금껏 가족을 위해 하기 싫은 일을 십여년 간 해왔다는 걸 자각했다. 결혼 당시 학생이었던 남편은 지금은 혼자 몸으로도 어엿히 가계를 꾸려갈 수 있을 정도로 벌 능력이 되었으니 조금만 빠듯하게 살면 내가 굳이 벌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2. 한참 고민한 끝에 약간의 사고가 생겼던 것을 계기로 직장을 그만두었다. 그런데 직장문제를 정리하고 나니 이제부터 뭘 할까의 문제가 남았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도 부족하고, 꿈을 쫓기에는 나이가 좀 많은 게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스멀스멀 기어 올랐다.

주위에는 나처럼 늦은 나이에도 꿈을 꾸는 이가 없었다. 현실이 너무도 단단해서 그 균형을 맞추기에도 급급한 날들이 계속되어 절망스러웠다. 더욱더 힘들었던 건 스스로에 대한 확신마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때 다시 펼쳐든 <삶을 위한 철학수업>에서 그 해답을 어렴풋이 찾아낼 수 있었다.

 

 

-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갖지 못했다면, 아직 자신의 삶을 시작한 것이 아니다. ‘그들이 말하는 삶’을 살고 있을 뿐이다.

 

 

- 사실은 아무리 늦었다고 생각되는 시기라도 결코 늦지 않았다고. 우리는 언제든지 시작할 수 있다고. 그 시작과 함께 우리는 ‘나의 삶’을 비로소 시작하는 것이라고. 나의 삶을 시작하기에 ‘이미 늦었어’의 시제란 없는 것이라고. 아무리 늦었다고 해도 시작하지 않고 끝낼 순 없는 거 아니냐고. 말년에 그렇게 시작한다면, 다음 생에선 아마 제대로 나의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르는 거 아니냐고.

 

그러니까 나는 아직 내 삶을 시작도 못 해본 상태였던 것이다. 이미 오래전에 마음 속에 품고는 있었으나 시도하지 못했던 꿈에 대해 그때부터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공공연하게 꿈을 말하고 다녔다.

 

3. 다행스러운 건 그런 내 생각이나 꿈들을 지지해주던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동안 가족 외에도 같은 곳을 바라봐 주는 사람들이 생겼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맙고 행복했는지 모른다.

그러다 정말 어이 없는 사건을 계기로 마음으로 의지하던 사람들과 멀어지게 되었다.

분명, 내 의지로 관계를 끝낸 거지만 영원히 멀어질 마음이 없었고 누군가 잡아주길 바랐다. 그러다 결국 관계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다른 사람들의 침묵은 인정해 주면서 내가 힘들어서 스스로 고립된 것은 무시를 당하고 그대로 배척당하는 거냐며 나중에는 적반하장의 심정까지 들었다.

 

- 작은 충돌 하나만으로 마음을 닫고 적이 되어버리거나, 감정이 상하는 작은 사건 하나만으로도 우정을 접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이것이 우리가 사는 일상적 삶에서의 친구와 적의 관념이고,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친구와 만나고 헤어지는 통상적 장면임을 누가 부정할 수 있을까?

 

 

- 하지만 낯선 자, 아직 공동성도 믿음도 형성되지 않은 자에게 다가가는 것은 상처를 주고받을 위험을 동반한다. 이해보다는 오해의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우정을 시작하는 능동성이란, 이런 오해와 상처를 받아들이고 긍정하며 그에게 다가가는 것이다.

 

<우정과 자유>챕터를 읽으며 답답한 심정을 자각할 때 갑자기 눈물이 터져나왔다. 아직 무르익지 않은 우정을 나는 시험한 거나 다름 없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때의 감정들, 좋았던 시간들을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어. 나이 먹어서 만난 사이가 다 그렇지, 뭐.’하면서 치부하고 싶지는 않다. 그저 공동성도 믿음도 완전히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타인의 이해가 필요한 치부를 성급히 드러냈기 때문에 오해를 사고 관계가 틀어진 것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다만, 이런 오해를 밝히고 상처를 받아들이며 다시 다가갈 능동적인 용기가 아직 내겐 없다.

4. 그러다 생각했다. 회사에서 팀장과 사이가 나쁘다고 생각했을 때 혹시 그 사람을 오해한 게 아니었을까? 내 마음에 적대감을 심고 그 사람을 대한 건 아니었을까? 그 사람은 나에게 여러번 손을 내밀었는데 쌀쌀맞게 손등을 쳐낸 건 나였던 게 아닐까? 그렇다면 관계가 틀어진 원인은 역시 나 때문이었구나 하는.

관계에 대한 이런 틀어짐이 지금껏 여러번 있었던 거라면 그 원인이 나에 대한 자존감이 제대로 세워져있지 않아서였을 거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 돈도, 학벌도, 명예도, 다른 어떤 것도 자긍심을 흔들지는 못할 것이다. 오직 자기가 세운 기준만이 자기를 흔들 것이다. 그러나 그 흔들림은 ‘자 그럼 다시 한번’ 하며 자신이 긍정할 수 있는 곳을 향해 스스로를 일으켜세우고 새로 시작하도록 촉발할 것이다.

 

 

- 자존심은 약한 자들이 자신의 약함을 가리기 위한 방어기제고, 자긍심은 강한 자들이 스스로 갖고 있는 힘에 대한 긍정이다. 전자는 남을 향한 것이라면, 후자는 자기를 향한 것이다.

 

무슨 일을 하든 잘 안될거라는 부정적인 가치관이 강한 나에게 이진경 샘은 자존감을 넘어선 자긍심에 대해 이야기한다. 잘 안 될수도 있지만 자신에게 집중하여 긍정할 수 있는 곳을 향해 스스로 길을 찾고 나아가라고. 어쩌면 틀어진 인간관계를 회복하거나 새로운 인연을 만드는 능동적인 용기도 낼 수 있을 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5. 삶에 대해 가장 크게 가지고 있는 문제가 세가지였다. 돈, 관계, 자존감. 셋다 살면서 가장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지만 가장 자신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래서 <삶을 위한 철학수업>에서는 ‘돈 쓰는 법’에 대해 알아야 자유할 수 있음을 배웠고, 우정에 대해서는 능동적인 다가감에 대해 알았다. 자존감을 넘어선 자긍심을 가져야 어떤 세파에도 흔들리지 않는 강자가 될 수 있음도 알았다. 그런 조건을 다 충족할 수 없더라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갖지 않은 삶은 아직 시작도 못해 본 삶이라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덧붙여, 한가지 더 배운 것이 있다.

 

 

- 물론 그런 이들 역시 사랑하는 이가 떠나거나 죽는 고통이 피해가지 않을 것이며,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게 뜻대로 되지 않아서 고뇌하는 시간 또한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삶을 걸 만큼 좋아하는 것이 있다면, 그걸 두 번 긍정할 수 있다면, 이런 고통이나 불행은 지나가는 불행, 작은 고통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책을 읽다 교회의 신앙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교회에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집안이 잘 되고 자녀들의 앞날이 밝아지며 삶이 편안해진다고 외친다.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존재가 거대한 스폰서가 되어버린 느낌이 들기도 한다.

스스로에 대한 자긍심과 돈과 우정에 대한 능동성, 자신이 살고 싶은 생을 시작한다 해도 교회에서 외치는 그런 평안함은 아마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삶은 그대로 힘들 것이고 관계는 계속 틀어질 수도 있으며, 하고 싶은 일을 시작해도 뭔가 나아지는 게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겁먹지 말고 자긍심을 버리지 말고 살라는 현실적인 충고를 던져주며 수업은 끝이 났다. 이제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 결정하는 건 온전히 내게 남겨진 과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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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는 원래 논밭이었던 곳을 주택지로 개발한 곳이에요. 그래서 마치 타운하우스처럼 조성되어 있는데 아파트 단지 뒤쪽으로 아직도 밭이 있어요. 구립도서관을 지나 아파트단지 뒤쪽으로 뺑 둘러진 길을 주로 저녁시간에 걷는데 그쪽에 제가 친구랑 돌보는 텃밭도 있거든요. 산책을 하면서 텃밭에 나가 상추, 고추, 오이 등을 다 자란 놈으로만 따서 오면 그걸로 저녁식탁에 올리기도 하고 유기농이라 그 자리에서 쓱쓱 닦아 베어먹기도 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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