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위한 철학수업 - 자유를 위한 작은 용기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5
이진경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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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삶을 위한 철학수업>은 문학동네 카페에서 연재가 거의 끝나가던 무렵에 보게 되었다. 당시 회사의 팀장과 사이가 좋지 못했고 그 관계가 틀어져 버리니 같은 팀원들도 모두 나를 안 좋아할 거라는 지레 짐작에 마음이 좋지 못했다. 그러다 하던 일까지 싫어졌고 꼭 내가 돈을 벌어야만 잘 살 수 있을까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한없이 서글퍼졌다.

하필, 그 때 본 챕터가 <돈과 자유_헝그리정신과 궁상>이었다.

 

 

- 확실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의 돈을 받으려면, 나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돈 주는 사람이 시키는 일을 해야 한다. 그래서 그 때 결심했다.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고 살려면, 돈을 적게 벌어야 하고, 그러려면 돈을 적게 써야 한다. 적게 벌고, 적게 쓰고, 나 하고 싶은 걸 하고 살자!

 

 

이 구절을 읽으며 그때 처음으로 결혼하고 지금껏 가족을 위해 하기 싫은 일을 십여년 간 해왔다는 걸 자각했다. 결혼 당시 학생이었던 남편은 지금은 혼자 몸으로도 어엿히 가계를 꾸려갈 수 있을 정도로 벌 능력이 되었으니 조금만 빠듯하게 살면 내가 굳이 벌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2. 한참 고민한 끝에 약간의 사고가 생겼던 것을 계기로 직장을 그만두었다. 그런데 직장문제를 정리하고 나니 이제부터 뭘 할까의 문제가 남았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도 부족하고, 꿈을 쫓기에는 나이가 좀 많은 게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스멀스멀 기어 올랐다.

주위에는 나처럼 늦은 나이에도 꿈을 꾸는 이가 없었다. 현실이 너무도 단단해서 그 균형을 맞추기에도 급급한 날들이 계속되어 절망스러웠다. 더욱더 힘들었던 건 스스로에 대한 확신마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때 다시 펼쳐든 <삶을 위한 철학수업>에서 그 해답을 어렴풋이 찾아낼 수 있었다.

 

 

-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갖지 못했다면, 아직 자신의 삶을 시작한 것이 아니다. ‘그들이 말하는 삶’을 살고 있을 뿐이다.

 

 

- 사실은 아무리 늦었다고 생각되는 시기라도 결코 늦지 않았다고. 우리는 언제든지 시작할 수 있다고. 그 시작과 함께 우리는 ‘나의 삶’을 비로소 시작하는 것이라고. 나의 삶을 시작하기에 ‘이미 늦었어’의 시제란 없는 것이라고. 아무리 늦었다고 해도 시작하지 않고 끝낼 순 없는 거 아니냐고. 말년에 그렇게 시작한다면, 다음 생에선 아마 제대로 나의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르는 거 아니냐고.

 

그러니까 나는 아직 내 삶을 시작도 못 해본 상태였던 것이다. 이미 오래전에 마음 속에 품고는 있었으나 시도하지 못했던 꿈에 대해 그때부터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공공연하게 꿈을 말하고 다녔다.

 

3. 다행스러운 건 그런 내 생각이나 꿈들을 지지해주던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동안 가족 외에도 같은 곳을 바라봐 주는 사람들이 생겼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맙고 행복했는지 모른다.

그러다 정말 어이 없는 사건을 계기로 마음으로 의지하던 사람들과 멀어지게 되었다.

분명, 내 의지로 관계를 끝낸 거지만 영원히 멀어질 마음이 없었고 누군가 잡아주길 바랐다. 그러다 결국 관계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다른 사람들의 침묵은 인정해 주면서 내가 힘들어서 스스로 고립된 것은 무시를 당하고 그대로 배척당하는 거냐며 나중에는 적반하장의 심정까지 들었다.

 

- 작은 충돌 하나만으로 마음을 닫고 적이 되어버리거나, 감정이 상하는 작은 사건 하나만으로도 우정을 접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이것이 우리가 사는 일상적 삶에서의 친구와 적의 관념이고,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친구와 만나고 헤어지는 통상적 장면임을 누가 부정할 수 있을까?

 

 

- 하지만 낯선 자, 아직 공동성도 믿음도 형성되지 않은 자에게 다가가는 것은 상처를 주고받을 위험을 동반한다. 이해보다는 오해의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우정을 시작하는 능동성이란, 이런 오해와 상처를 받아들이고 긍정하며 그에게 다가가는 것이다.

 

<우정과 자유>챕터를 읽으며 답답한 심정을 자각할 때 갑자기 눈물이 터져나왔다. 아직 무르익지 않은 우정을 나는 시험한 거나 다름 없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때의 감정들, 좋았던 시간들을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어. 나이 먹어서 만난 사이가 다 그렇지, 뭐.’하면서 치부하고 싶지는 않다. 그저 공동성도 믿음도 완전히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타인의 이해가 필요한 치부를 성급히 드러냈기 때문에 오해를 사고 관계가 틀어진 것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다만, 이런 오해를 밝히고 상처를 받아들이며 다시 다가갈 능동적인 용기가 아직 내겐 없다.

4. 그러다 생각했다. 회사에서 팀장과 사이가 나쁘다고 생각했을 때 혹시 그 사람을 오해한 게 아니었을까? 내 마음에 적대감을 심고 그 사람을 대한 건 아니었을까? 그 사람은 나에게 여러번 손을 내밀었는데 쌀쌀맞게 손등을 쳐낸 건 나였던 게 아닐까? 그렇다면 관계가 틀어진 원인은 역시 나 때문이었구나 하는.

관계에 대한 이런 틀어짐이 지금껏 여러번 있었던 거라면 그 원인이 나에 대한 자존감이 제대로 세워져있지 않아서였을 거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 돈도, 학벌도, 명예도, 다른 어떤 것도 자긍심을 흔들지는 못할 것이다. 오직 자기가 세운 기준만이 자기를 흔들 것이다. 그러나 그 흔들림은 ‘자 그럼 다시 한번’ 하며 자신이 긍정할 수 있는 곳을 향해 스스로를 일으켜세우고 새로 시작하도록 촉발할 것이다.

 

 

- 자존심은 약한 자들이 자신의 약함을 가리기 위한 방어기제고, 자긍심은 강한 자들이 스스로 갖고 있는 힘에 대한 긍정이다. 전자는 남을 향한 것이라면, 후자는 자기를 향한 것이다.

 

무슨 일을 하든 잘 안될거라는 부정적인 가치관이 강한 나에게 이진경 샘은 자존감을 넘어선 자긍심에 대해 이야기한다. 잘 안 될수도 있지만 자신에게 집중하여 긍정할 수 있는 곳을 향해 스스로 길을 찾고 나아가라고. 어쩌면 틀어진 인간관계를 회복하거나 새로운 인연을 만드는 능동적인 용기도 낼 수 있을 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5. 삶에 대해 가장 크게 가지고 있는 문제가 세가지였다. 돈, 관계, 자존감. 셋다 살면서 가장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지만 가장 자신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래서 <삶을 위한 철학수업>에서는 ‘돈 쓰는 법’에 대해 알아야 자유할 수 있음을 배웠고, 우정에 대해서는 능동적인 다가감에 대해 알았다. 자존감을 넘어선 자긍심을 가져야 어떤 세파에도 흔들리지 않는 강자가 될 수 있음도 알았다. 그런 조건을 다 충족할 수 없더라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갖지 않은 삶은 아직 시작도 못해 본 삶이라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덧붙여, 한가지 더 배운 것이 있다.

 

 

- 물론 그런 이들 역시 사랑하는 이가 떠나거나 죽는 고통이 피해가지 않을 것이며,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게 뜻대로 되지 않아서 고뇌하는 시간 또한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삶을 걸 만큼 좋아하는 것이 있다면, 그걸 두 번 긍정할 수 있다면, 이런 고통이나 불행은 지나가는 불행, 작은 고통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책을 읽다 교회의 신앙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교회에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집안이 잘 되고 자녀들의 앞날이 밝아지며 삶이 편안해진다고 외친다.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존재가 거대한 스폰서가 되어버린 느낌이 들기도 한다.

스스로에 대한 자긍심과 돈과 우정에 대한 능동성, 자신이 살고 싶은 생을 시작한다 해도 교회에서 외치는 그런 평안함은 아마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삶은 그대로 힘들 것이고 관계는 계속 틀어질 수도 있으며, 하고 싶은 일을 시작해도 뭔가 나아지는 게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겁먹지 말고 자긍심을 버리지 말고 살라는 현실적인 충고를 던져주며 수업은 끝이 났다. 이제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 결정하는 건 온전히 내게 남겨진 과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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