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균 연령 60세 사와무라 씨 댁의 이런 하루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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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들어 처음 든 생각은 '40이 가까워졌구나'였다. 40대라니..

결혼생활 10년이 넘어가고 내가 낳은 아이들이 둘다 초등학생이니 그냥 봐도 40이 다가오는 건 자명한데 아직도 가끔 고등학생 때 마인드에서 더 크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자타공인 동안이기도 하고 그런 장점이 때론 약점이 되기도 해서 가끔 '학생~' 소리도 듣는 편이라 더 정체성이 헷갈리는 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다행히(?) 결혼을 했고 아이도 낳았고 나름 어른으로 대접받고 있는 형편이라 아직까지 독신으로 부모님과 함께 살아간다는 건 어떤지 잘 모른다. 혼자 자취를 했었던 경험을 비춰봤을 때 지금껏 결혼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부모님과 함께 살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긴 한다.

<평균연력 60세 사와무라씨댁의 이런하루>를 읽으면서 원래는 40세 독신여성과 연로하신 노부부의 아옹다옹한 일상을 기대했으나 오히려 내가 갖고 있는 정체성의 혼란을 같이 겪고있음을 발견했다. 아버지 사와무리 시로씨는 헬스클럽에 다니면서 헬스 트레이너만큼 상큼해지기를 꿈꾸고 할아버지 소리를 낯설어한다. 어머니 노리에 여사 또한 70이 다 되어가는 연세에도 엄마를 그리워하며 40세의 히토미의 생활은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았을 뿐 내가 겪고 있는 사회적, 신체적 변화를 직면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같은 연령대의 여배우가 탈모방지 샴푸 광고를 하거나 생일날 병원에 갔더니 차트에 40세라고 선명히 적혀 있더라는 일화. 생각도 마인드도 감정도 20대의 그것과 다를 바 없으나 편의점에 갈 때도 드라이를 하던 중학생 때와 출근하기 위해 역까지 자전거를 타고 가는 시간은 삶의 일부가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것만큼 나이를 먹은 티가 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기운 있을 때 지금 살고 있는 집의 문턱을 없애는 방법으로 리모델링을 한다거나 그런 김에 '만에 하나' 결혼할지도 모르는 따를 위해 2세대 주택으로 개조해야 하나? 아님, 본인들이 죽고 난 후에 혼자 2세대 주택에 살고 있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동시에 하는 어머니, 기운 있을 때 미리 영정사진을 찍어둔다는 아버지의 서글픈 준비성은 밋밋한 캐릭터에 덧입혀져 짠한 감동을 주기도 한다.

본인의 가족을 만들었던 그렇지 않았던 혼자 해야 할 일이 있음을 툭 던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마스다 미리의 만화를 보는 내내 내 나이 밑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어른들만의 고민, 생활, 황혼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달까?


왜냐면 나도 곧 40이 될 테고 70이 되는 부모님을 가질테고 그분의 황혼을 바라보며 혼자 준비해야 할 일에 대해 생각하게 될테니 말이다. 또 한편, 노처녀가 된 딸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크리스마스 이브를 즐기고 싶어 들뜬 부모님의 순수한 모습을 보면서 같이 공감할 수 있는 시간의 소중함도 알 수 있었다.


이런 걸 하나하나 알려주니 마스다 미리가 동네 '큰언니'같다는 느낌이 드는 건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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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의 마스다 미리 여행단 활동을 마치고 두번째 서포터즈였던 마스다 미리 여자공감단 5기.

<여자라는 생물>을 미션 도서로 받았는데 이미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주부로서 살아온지 10년차가 되어보니 여자라는 자각보다는 그냥 '여자사람'이라는 자각이 더 컸다. 그런 나를 나무라듯 얘기해 주었다.

- 몇 살이 되어도 여자이고 싶다.

  얼핏 들으면 좀 멋있는 대사지만, 가만히 들어보면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나이를 먹을수록 다른 생물로 변신하는 인간이 이 세상에 있는 것 같은 표현이다. <여자라는 생물> p. 150


 나는 사람 둘을 낳고 남은 거죽, 껍데기가 아니라는 걸 나에게는 내가 가장 소중한 '여자'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원래는 마지막 미션이라 다른 누군가에게 사랑고백을 하고자 했다. 아직 한글이 서툰 우리 딸일 수도, 나랑 십분 차이나는 쌍둥이 우리 언니일 수도 있었다. 둘 다 사랑하는 여자들이지만 결론은 나 자신도 사랑하는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 안에 마스다 미리가 심어놓은 많은 공감점을 오직 나만이 느낄 수 있고 줄기차게 요구하는 게 자신을 사랑하라는, 세상 다 그런 것이니 심각해지지 말라는 그러면서도 유난스레 긍정적일 필요도 없다는 것을 알려주었으니까.

 

 

얼마전에 구입한 마스다 미리의 에세이 <잠깐, 저기까지만>. 여행단 때 구매한 책인데 여행에 관련된 사진은 한 컷도 들어가있지 않지만 마스다미리의 감회, 그곳에서 먹었던 숙소, 음식, 에피소드와 소소하게 들어갔던 경비 등.

평소 여행 한번 하려면 내가 늘 염려하는 그런 항목들이 나열되어 있었고 그 사이사이에 여행의 의미를 깨알같이 적어넣기도 해서 좋았다.

 

 

 

- 이러니 좀처럼 목적지인 메밀국수 가게에 도착하질 못한다. 마치 딴 길로 새는 초등학생 집단 같지만, 다른 게 있다면 "빨리 와!"하고 야단치는 선생님이 없다는 점이다. <잠깐, 저기까지만>

​어찌 하다보니 올해에는 여러곳으로 여행을 다닐 수 있었다. 아이들이 없이 혼자 몸으로 여행을 가보니 학생 때 느꼈던 것처럼 짜여진 일정에 대한 부담감이 들었다. 아마 자유여행을 간다 해도 원래 고지식하고 유연하지 못한 내 습성상 제대로 여행을 즐기지 못할지도 모른다. 마스다 미리는 그런 나에게 '야단치는 선생님이 없다'고 여유롭게 즐겨도 된다고 다독이는 것 같았다. 

 

스무 살 이후 처음으로 아르바이트를 해서 먹고 싶은 음식을 사먹었을 때, 테이블에 셋팅되는 음식들 중 원치 않는 반찬은 먹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해방감을 느꼈던 적이 있었다. 그 기억은 오래도록 강렬해서 지금은 아이를 키워야 하는 진짜 어른이 되었음에도 아이들 앞에서 과감히 밥에 든 콩을 골라낼 정도다.

여행에 대해서도 이제는 스스로에게 혹은 일정에 너무 쫓길 것 없이 좀 여유롭게 돌아봐야 하겠다 싶다. 나만 그런게 아니라 마스다 미리도 그랬으니까. 그렇게 해서 잘못될 건 없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좀더 용감해지는 나, 좀더 독립적인 나에게도 사랑한다 고백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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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해서 비슷한 사람 - 양양 에세이
양양 지음 / 달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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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신춘문예 시즌이 다가오자 소싯적에 글 좀 썼다는 나도 마음이 들썩이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글을 쓰며 살고 싶은 건 여전히 유효한 꿈이지만 대체 그걸 어떻게 쓰는지 아직도 감을 못 잡고 있는지라 노트북을 펴고 한글 창을 띄우면 하염없이 펼쳐진 하얀 여백을 쳐다보기만 할 뿐이다.

최근에 우연한 기회에 내가 어떤 감성적인 글을 쓰기가 부족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절박하고 무지하다보니 블로그에 끄적인 내 글을 봤다는 사람에게 어떻더냐 물었고 소설과는 거리가 먼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잠시 수긍했지만 며칠간 울고 싶은 마음이 든 건 어쩔 수가 없었던 것 같다.

 

 

 

그러다 우연히 받아든 <쓸쓸해서 비슷한 사람>은 읽는 내내 감성 박약의 내 자신을 여지없이 꼬집어 주었다.

 하다체로 시작하다 습니다체가 되었고 갑자기 나오는 시와 단문들.

소설이든 시집이든 산문이든 이건 이거, 저건 저거 식의 정돈된 편집과 글쓰기 스타일에 길들여진 탓인지 에세이집이라는 명명하에 이글 저글 아무거나 되는대로 흩뿌린듯한 글들을 주워 모아놓은 듯한 이 책에 먼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작가인 양양의 생각과 라이프스타일이 녹아든 글에서 팔십퍼센트의 감성을 걷어내고 이십퍼센트의 삶을 읽어내려는 습관 때문에 읽기가 힘들기도 했다. 이쯤되자 내가 벌써부터 글에 대한 편견을 가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글이란 상대방의 마음을 울리는 데서 시작되는 거니까.

편견을 걷어내고 읽기 시작했을때 드디어 양양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시간, 그녀의 공간, 그녀의 사람과 인연들에 대해서.

- 기다리는 것 외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지.

  그저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거야.

​  

 - 봄은 내 작은 마당이 진가를 발휘하는 시간이었고, 그 좋은 볕에다 초록 식물들을 데려다 두고 함께 살았다. 여름은 밤이 좋아 모기와 다투어가면서 밖에 앉아 있었다. 가을에는 방에 누워 창문 틈으로 귀뚜라미 소리 들었고, 겨울에는 막을 수 없는 매서운 웃풍 때문에 이불에서 나오기가 싫었다. 이불 속에서 따뜻한 것들을 그리워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이러했는데, 그렇다면 나의 하루하루는, 매일의 바스락거리는 시간들은 ……. 이제 그 시간들과 작별인사를 나누어야 한다.

-기차는 상해 남역을 출발하여 서른일곱 시간을 달릴 것이라 했다. (중략) 내 여행은 목적지에 도착해서부터가 아니라 목적지를 향해 가는 그 길 위에서부터였으니까. 그러니까 내가 가려는 곳은 여기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저기이다.

- 그 밤은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어떤 연으로 만나 그 밤에 그렇게 서로 웃었을까. 나는 소녀가 그날의 나를 웃게 하기 위해 국밥집에서 기다리고 있던 천사는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감성의 근원을 파고 들어가면 주로 고향이나 가족에 대한 추억이 근원인 경우가 많았다. 어린 시절에 뛰놀던 논두렁이나 보릿대를 태우는 불에 콩을 구워먹던 추억을 나도 가지고 있지만 양양의 에세이에 묘사한대로 외할머니의 넓은 등에 업히거나 엄마가 한여름에도 보일러를 돌려 뽀송하게 만든 이불을 덮고 잔 기억이 내겐 없다. 내가 가진 반쪽짜리 감성은 그래서 누구를 설득하지도 이해시키지도 못하나 보다. 결혼하지 않고도 조카에게 애틋할 수 있고 해줄 이야기가 많은 이모인 양양에 비해 나는 친자식들인 내 아이들에게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던가 비교도 하게 된다.

그리하여 내가 배울 것은 양양의 감성일까? 추억일까? 점점 헷갈려지기도 한다.


 

 

하지만 깨닫는 것은 그녀나 나나 시간을 좀더 내가 쓰고 싶은대로 쓰며 살고 싶어하다는 공통점이 있다는 거였다. 그녀는 노래를 만들고 글을 쓰는 일에 좀더 많은 시간을 들이고 싶어하고 실제로도 그렇게 하고 있다. 그게 비록 돈이 안되고 유명해질 수 있는 게 아니지만 삶의 질이라는 건 결국 가난도 품위있게 감내할 용기를 주는 거니까.

책 안에 삽입된 그림들 중 마지막 그림이 마음에 들었다. 커피집이나 우리집 책상에 내가 잘 올려놓는 커피잔과 휴대폰, 그리고 지갑(?). 여기에 책 한 권만 더 있다면, 아이들이 아직 학교에서 일과를 하고 있는 오전 시간대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이를 먹으니 알 수 있는 몇 가지가 있는데 채소를 좋아하게 된다는 점, 여행길의 고단함을 여행지보다 더 좋아하게 된다는 점, 불필요한 것에 마음쓰지 않게 된다는 점이다. 작고 소박하고 낙천적인 삶이 행복해지는데 더 도움을 줄 거라는 걸 양양 또한 꽤나 두툼한 이 책에 그대로 나열해 놓았다.

 

- 아주 적게 벌고 번 만큼만 먹으며 산다. 매일이 특별할 것도 없고, 어떤 날은 나를 잊기도 한다. 부탁하면 손을 내밀어주는 좋은 사람들 덕분에 셀 수 없이 많은 도움을 받았고, 고마움과 미안함만큼 마음에 부끄러움과 슬픔도 그득 쌓였다. 그럼에도 나는, 행복하다고 말하는 날들을 가졌다.  이루기 위해 살지 않고 느끼기 위해서 하루를 살고 있다.

 

그러고 보니 이 여자. 나와 같은 나이였다. 비슷하게 무심하고 비슷하게 심심했다. 그러면서도 예민하고. 그래서 더 친근감이 들었나보다. 감성을 글로 배울 수 있다 치면 나는 동갑내기 이 여자, 쓸쓸해서 비슷했던 양양에게 배웠다고 우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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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라는 생물
마스다 미리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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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요즘 우스갯소리로 '남자들은 곧 죽어도 모르는 여자의 심리'라는 게 나온다. 이를테면 립스틱 색깔이 변했다거나 1-2cm 정도 커트를 하고 드라이를 했는데 남자친구가 못 알아봐준다거나. 그러면 삐진 여자를 달래기 위해 남자는 무조건 미안하다는 말로 그 상태를 모면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같은 여자인 나도 다른 여자들 옷차림이나 헤어스타일 달라진 걸 잘 눈치 채지 못하는데 둔감한 남자들의 눈이야 오죽할까? 싶다.

그런데 살다 보니까 약간의 변화도 잘 눈치채지 못하는 둔감한 사람이 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학교때부터 쭉 여중, 여고 여대를 나오고 여자들만 잔뜩 있는 회사에서 근무를 했는데도 도무지 여자들의 눈치, 기분을 거의 맞출수가 없었던 것이다.

내 감정기복이 심한건 알았지만 스스로 제어를 하지 못할 정도로 화가 날 때도 있어서 회사원일 때는 투덜이로 소문이 났었는데 주변 사람들의 감정에 대해서는 그닥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마스다 미리의 <여자라는 생물>은 여자로 서의 유년기, 청소년기, 성인기, 중년의 나이에 이르기까지 생각해오고 경험해왔던 점들을 에세이로 풀어놨다. 가벼운 그림체와 똑똑 떨어지는 단문으로 읽기 쉬울 줄 알았건만.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하니까 두 장을 못 넘기고 밑줄을 긋고 태그를 붙여야 했다. 이를테면,

 - 가끔 언제까지나 '그 시절'인 채로 살고 있는 40대의 옛날 미인을 만나다. 바에서 누가 말을 걸더라. 20대로 착각하더라, 푸념처럼 자랑한다. 아이구야, 싶다. 그러나 그걸 어이없어 하는 얼굴로 흘려듣는 젊은이를 보면 화가 난다.

 이봐, 이 사람은 당신들 나이 때는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인기가 많았다고. 고교시절에는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군림했던 사람이란 말이야! p.132

- 몇 살이 되어도 여자이고 싶다.

 얼핏 들으면 좀 멋있는 대사지만, 가만히 들어보면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나이를 먹을수록 다른 생물로 변신하는 인간이 이 세상에 있는 것 같은 표현이다. p.150

이제 삼십대 중반을 넘어 사십을 바라보는 연차가 되다보니 이런 문구들이 와 닿았다. 사회 세태도 그렇지만 이제 막 날개를 펴고 싱싱하게 활개치고 다니는 젊은 애들 눈에야 체형도 달라지고 턱선이 무너져가는 우리같은 기성세대의 옛날이야기가 웃겼을 수 있다.  TV에서 나이든 배우들의 젊었을 때 사진을 계속 보여 주면서 배도 나오고 주름도 자글자글한 그 모습과 대비를 시키는 게 불편한​ 것도 같은 맥락일지 모르겠다. 나이 먹는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사회현상이 한 몫을 하는걸까? 아니면 삶이 각박하다는 걸 남자보다 여자가 더 빨리 깨달아 아는 걸까?

- "시끄러워!! 너희들만 탄 전철인 줄 알앗!! 바보들앗."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의 느낌으로 5, 60대쯤 되는 남성이었을까. p.76

- ​아주 복잡한 백화점 지하에서 쇼핑을 하다가 앞에서 걸어오던 남자와 서로 피하는 상황이 되었는데,

 " 으이구, 거치적거려!"

 하고 큰소리로 하는 말을 들었다. p. 83

그러니까 여자가 나이를 먹으면서 못 쓰게 되는 건 스스로 망가지는 게 아니라 사회가 그리 만들었다는 걸 우회해서 보여주기도 한다. 사회에서 남자들과 동일한 경쟁을 하다보니 듣지 않아도 될 소리를 듣거나 겪지 않아도 될 사건을 경험하게 되는 걸지도 모르지만 이런 심각한 눈길을 받지 않으려는 듯 마스다 미리는 이에 대해 '원한 맺힌 숫자(4나 9같은)만 나란히 있는 로또를 사려고 한다'로 유쾌하게 감정을 표현한 듯 하다.

아무리 그래도 책을 읽어나가며 마음이 편안할 수는 없었다. 우리나라나 일본이나 남성우위인 건 마찬가지인 듯한 문화 때문에. 바나나를 먹을 때 덥석 베어먹지 말고 우아하게 숟가락으로 떠먹어야 한다든지, 바비큐 준비의 재미있는 일을 남자들이 다 해먹다가 뒷정리는 여자들이 도맡고 검도를 배울 때는 차와 물수건을 사범에게 가져다 주는 일을 여자아이들과 그 엄마들이 했다는 일화가 아무리 담백하게 표현되어 있어도 기분 좋게 읽고 넘기기 힘들었다. 문제가 있었다는 걸 알았기에 마스다 미리도 그런 에피소드를 끼워넣었을 것이다. 아무것도 몰랐던 시기의 어리숙함이었으니 성장이 중요하다고 말이다.

- 하지만 그 무렵의 우리는 아무것도 몰랐다.

 본격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먹는 맛있는 파스타를 몰랐다. 결혼하지 않고 사는 법을 몰랐다. 어째서 여자가 바나나를 덥석 베어먹으면 안 된다고 했는지 어른들의 진의도 몰랐다. 구운 바나나에 아이스크림을 곁들이는 디저트가 있다는 것도 몰랐다. 어른이 된 뒤에야, 여러 가지 사실을 알게 되고 깜짝 놀랐다. p. 107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 세상물정을 안다고 할만큼 속물이 되고 나니까 갑자기 두려운 것이 있었다. 곧 닥쳐올 중년기의 내 신체에 대해서. 지금도 달라진 체형으로 인해 힘든데 중년이 되면 더 힘들어진다고 한다. 이를테면 복부와 허리에 찐 군살들. 폐경이 되면 다른 내장에 붙어 있던 지방들도 복부에 집중되고 골밀도도 낮아진다던데 언제 생긴지 모를 요통과 관절통이 그때 더 심해지는 건 아닌가 싶은 걱정들 말이다. 같은 연배의 사람들을 만날 때 그런 이야기를 주로 하는데 일본인 미리상도 그건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 최근 같은 또래의 여자 친구들과 밥을 먹는 일이 점점 즐겁다.

 뱃살은 물론 어깨결림이 심해졌네, 피부가 건조해졌네, 기미가 늘었네 그런 얘기만 하는 어른들을 그동안 차갑게 보았지만, 막상 우리가 해보니 가벼운 자학도 즐거웠다.

- 폐경 후, 여자가 여자가 아니게 된다면 대체 무엇이 되는 거지?

 생리가 왔을 때, 열한 살의 나는 '여자가 되었다'고는 느끼지 않았다. 거기에 있는 것은 사실 뿐이었다.


예전같지 않은 신체를 가끔 망각할 때가 있는데 가끔 올라가보는 체중계나 혼자 욕실에 들어가 벗은 몸을 봤을 때의 두루뭉술한 몸통을 확인할 때마다 내가 변해가는구나 혹은 늙어가는구나 하는 걸 느낀다. 가끔 그런 문제로 우울했는데 폐경이 와서 체형이 변하고 움직임이 둔해지고 몸살도 자주 앓더라도 '그냥 사실이구나' 라는 간단한 처방을 내려주는 미리상. 이 때문에 그녀의 에세이를 보면서 위안을 받는 여성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마스다 미리의 책은 이번이 두번째지만 아마도 그녀의 토닥임을 느끼며 위안을 구하는 대열에 나도 합류하게 될 것 같은 예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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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도를 사랑한다 - 경주 걸어본다 2
강석경 지음, 김성호 그림 / 난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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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에 재수를 하던 시절, 대학교에서 잠시 아르바이트를 했던 적이 있다. 그때 난(蘭)을 처음 봤는데 물을 주다가 빛깔이 누렇게 변해버린 난초 잎을 두개 가위로 잘라버린 일이 있었다.

난초를 직접 키우시던 교수님 허락 없이 벌인 일이었는데 이걸 왜 잘랐냐는 그분 물음에 '산 것과 죽은 것이 어떻게 같이 있나요?' 하고 되물었었다.

내가 잘라버린 난초잎의 밑둥은 그대로 뿌리가 박혀 있었으나 점점 말라 죽어갔다. 그렇지만 난 아직도 내가 난을 잘랐기 때문에 말라 죽은 건지 아니면 원래 잘랐어도 되는 거였는지 잘 모르겠다.


- 산 자와 죽은 자가 인류의 가족으로 더불어 있다니. 고분들은 인고의 시간을 견디며 이지러지기도 하고 주검은 어느덧 대지로 돌아가 둔덕 같은 자연 자체가 되어 있었다.


강석경의 경주에 관한 에세이집 <이 고도를 사랑한다>의 프롤로그 부분에 나온 문구를 읽다가 문득 생각난 에피소드다.


경주 하면 고등학교 1학년 때 수학여행을 다녀왔던 적이 있었다. 4박 5일의 일정동안 불안정한 초여름 날씨를 입증하듯 비다 오다 그치다를 반복했고 차로만 이동하던 덕분에 버스 안에서 내내 잠만 잤다. 차를 세워서 거닐었던 해변가가 문무대왕능인지도 몰랐고 석굴암을 오르던 산길은 틈틈이 내려주던 빗물 때문에 뻘밭이 되어 있어 미끄러지기를 밥 먹듯 하며 기어올랐었다. 열일곱 어린 소녀의 눈에는 그리 특별할 것도 없어 보이는 장소였던 걸지도 모른다.


경주에 거주하며 고즈넉하면서도 잔잔한 일상을 노래하는 강석경은 내가 무심히 넘겨버렸던 풍경을 꼭꼭 밟으며 산책자의 눈으로 훓어내렸다. 또한 해설자의 눈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 꽃가루가 흘러가는 수면을 바라보니 못에는 나무뿐 아니라 하늘도 담겨있다. 천삼백여 년의 유물만이 아니라 천삼백여 년 동아 지고 뜬 해와 달이 드리워 있고 별똥별도 묻혀 있다. 그 세월 동안 태어나고 소멸한 뭇 생명들의 흔적까지 깃들여 있는 듯 한데 수면 위로 불현듯 두 개의 삼층탑이 솟아오르는 환영을 본다. 늠름하고 힘찬 감은사 탑이다. 문무왕이 부처님의 위력을 빌려 왜적의 침략을 막고자 절을 세우다가 돌아가시니 아들인 신문왕이 완성하여 감은사라 이름 짓고 세운 탑이다. p.49

 

내가 자랐던 시골에 가면 어머니는 먹을 걸 거두시느라 분주해 지신다. 허리 디스크 수술로 장해 판정을 받으신 분이 어디서 기운이 펄펄 나는지 뒤꼍의 텃밭으로 앞마당의 채마밭으로 종횡무진 누비고 다니면서 이것저것 거두어 들이신다.


담벼락에 열려 있던 둥근 호박은 얇게 잘라 말리고 뒤꼍의 텃밭에서 딴 부추로 부추김치를 담그고 채마밭에서 딴 열무로 물김치를 담근다. 그렇게만 해도 어머니와 우리집까지 가져다 한동안 밑반찬으로 잘 먹는다. 누가 뭐래도 직접 기른 작물만큼 몸에 약이 되는 식물은 없을 것이다.


여성 작가가 쓴 에세이라 그런지 <이 고도를 사랑한다>에는 유난히 먹을 거리에 대해 많이 나온다. 젊은 시절 암자에서 지내다 맛을 들였다던 죽순, 고디(다슬기), 교동법주, 영양숯불갈비 등 경상도 음식은 맛 없다는 편견을 여지없이 깨주는 맛깔난 음식들이다. 어딜 가나 먹고 사는 문제가 모든 인간살이의 기본이 되는 것 같다.

먹는 게 그런데 사는 거라고 다를까? 흉물스럽게 올라서고 있는 고층아파트들을 보며 훼손되는 고도를 그래서 작가는 안타까워한다.

 

- 핵무기가 개발되고 과학이 극한으로 치닫는다면 천년 고도도 먼 훗날 죽은 자의 꿈만 남은 유령의 도시가 될까 두렵다. 시간의 강은 이어지는데 다가오는 시대를 어떤 꿈으로 맞아야 할지, 문명에서 잠시 비켜나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유목민의 향수에 젖는다. 일설에 따르면 바지는 중앙아시아에서 말을 타기 위해 발명됐다고 한다. p.118


천년고도라는 경주에 깃들어 사는 작가라 그런지 그가 보는 인물열전 또한 남다르다. 영혼의 DNA라고 명명한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끼리 뭉치고 오랜 기간 관계를 맺어온 사람들의 이야기나,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는 누비장 어르신과 무용가 이매방 선생의 일화는 촘촘히 꼭 짜여 소개된 에피소드만큼 흥미진진했다. 오랜 시간 글과 함께 살아온 고수의 눈에 비친 인물은 뭔가 다른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경주가 꼭 좋은 점만 가지고 있는 건 아닐 것이다. 작가가 묘사한대로 무척 덥고, 조용한 곳이다 보니 사람들이 부끄러운 줄 모르고 다른 이의 일상에 관심이 많다. 그곳에서 태어나지 않은 게 어찌 보면 다행이라 여긴다던 작가의 일리 있는 감회는 익명성을 좋아하는 나같은 사람에게 환기를 시켜주는 점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주에는 '내 근처에 두고 볼 수 있는' 자연이 있어서 좋다고 한다. 급속도로 도시화 되어가고 누가 들어가 살지도 모르는 집을 연이어 짓고 있는 걸 심심찮게 보는 입장에서는 익명성을 포기해서라도 얻어갖고 싶은 게 이런 느림과 근처에 있는 자연일 것이다. 산책의 묘미란 그런 스스로를 깨달아 알아가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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