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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라는 생물
마스다 미리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14년 10월
평점 :
절판
요즘 우스갯소리로 '남자들은 곧 죽어도 모르는 여자의 심리'라는 게 나온다. 이를테면 립스틱 색깔이 변했다거나 1-2cm 정도 커트를 하고 드라이를 했는데 남자친구가 못 알아봐준다거나. 그러면 삐진 여자를 달래기 위해 남자는 무조건 미안하다는 말로 그 상태를 모면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같은 여자인 나도 다른 여자들 옷차림이나 헤어스타일 달라진 걸 잘 눈치 채지 못하는데 둔감한 남자들의 눈이야 오죽할까? 싶다.
그런데 살다 보니까 약간의 변화도 잘 눈치채지 못하는 둔감한 사람이 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학교때부터 쭉 여중, 여고 여대를 나오고 여자들만 잔뜩 있는 회사에서 근무를 했는데도 도무지 여자들의 눈치, 기분을 거의 맞출수가 없었던 것이다.
내 감정기복이 심한건 알았지만 스스로 제어를 하지 못할 정도로 화가 날 때도 있어서 회사원일 때는 투덜이로 소문이 났었는데 주변 사람들의 감정에 대해서는 그닥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마스다 미리의 <여자라는 생물>은 여자로 서의 유년기, 청소년기, 성인기, 중년의 나이에 이르기까지 생각해오고 경험해왔던 점들을 에세이로 풀어놨다. 가벼운 그림체와 똑똑 떨어지는 단문으로 읽기 쉬울 줄 알았건만.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하니까 두 장을 못 넘기고 밑줄을 긋고 태그를 붙여야 했다. 이를테면,
- 가끔 언제까지나 '그 시절'인 채로 살고 있는 40대의 옛날 미인을 만나다. 바에서 누가 말을 걸더라. 20대로 착각하더라, 푸념처럼 자랑한다. 아이구야, 싶다. 그러나 그걸 어이없어 하는 얼굴로 흘려듣는 젊은이를 보면 화가 난다.
이봐, 이 사람은 당신들 나이 때는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인기가 많았다고. 고교시절에는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군림했던 사람이란 말이야! p.132
- 몇 살이 되어도 여자이고 싶다.
얼핏 들으면 좀 멋있는 대사지만, 가만히 들어보면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나이를 먹을수록 다른 생물로 변신하는 인간이 이 세상에 있는 것 같은 표현이다. p.150
이제 삼십대 중반을 넘어 사십을 바라보는 연차가 되다보니 이런 문구들이 와 닿았다. 사회 세태도 그렇지만 이제 막 날개를 펴고 싱싱하게 활개치고 다니는 젊은 애들 눈에야 체형도 달라지고 턱선이 무너져가는 우리같은 기성세대의 옛날이야기가 웃겼을 수 있다. TV에서 나이든 배우들의 젊었을 때 사진을 계속 보여 주면서 배도 나오고 주름도 자글자글한 그 모습과 대비를 시키는 게 불편한 것도 같은 맥락일지 모르겠다. 나이 먹는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사회현상이 한 몫을 하는걸까? 아니면 삶이 각박하다는 걸 남자보다 여자가 더 빨리 깨달아 아는 걸까?
- "시끄러워!! 너희들만 탄 전철인 줄 알앗!! 바보들앗."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의 느낌으로 5, 60대쯤 되는 남성이었을까. p.76
- 아주 복잡한 백화점 지하에서 쇼핑을 하다가 앞에서 걸어오던 남자와 서로 피하는 상황이 되었는데,
" 으이구, 거치적거려!"
하고 큰소리로 하는 말을 들었다. p. 83
그러니까 여자가 나이를 먹으면서 못 쓰게 되는 건 스스로 망가지는 게 아니라 사회가 그리 만들었다는 걸 우회해서 보여주기도 한다. 사회에서 남자들과 동일한 경쟁을 하다보니 듣지 않아도 될 소리를 듣거나 겪지 않아도 될 사건을 경험하게 되는 걸지도 모르지만 이런 심각한 눈길을 받지 않으려는 듯 마스다 미리는 이에 대해 '원한 맺힌 숫자(4나 9같은)만 나란히 있는 로또를 사려고 한다'로 유쾌하게 감정을 표현한 듯 하다.
아무리 그래도 책을 읽어나가며 마음이 편안할 수는 없었다. 우리나라나 일본이나 남성우위인 건 마찬가지인 듯한 문화 때문에. 바나나를 먹을 때 덥석 베어먹지 말고 우아하게 숟가락으로 떠먹어야 한다든지, 바비큐 준비의 재미있는 일을 남자들이 다 해먹다가 뒷정리는 여자들이 도맡고 검도를 배울 때는 차와 물수건을 사범에게 가져다 주는 일을 여자아이들과 그 엄마들이 했다는 일화가 아무리 담백하게 표현되어 있어도 기분 좋게 읽고 넘기기 힘들었다. 문제가 있었다는 걸 알았기에 마스다 미리도 그런 에피소드를 끼워넣었을 것이다. 아무것도 몰랐던 시기의 어리숙함이었으니 성장이 중요하다고 말이다.
- 하지만 그 무렵의 우리는 아무것도 몰랐다.
본격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먹는 맛있는 파스타를 몰랐다. 결혼하지 않고 사는 법을 몰랐다. 어째서 여자가 바나나를 덥석 베어먹으면 안 된다고 했는지 어른들의 진의도 몰랐다. 구운 바나나에 아이스크림을 곁들이는 디저트가 있다는 것도 몰랐다. 어른이 된 뒤에야, 여러 가지 사실을 알게 되고 깜짝 놀랐다. p. 107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 세상물정을 안다고 할만큼 속물이 되고 나니까 갑자기 두려운 것이 있었다. 곧 닥쳐올 중년기의 내 신체에 대해서. 지금도 달라진 체형으로 인해 힘든데 중년이 되면 더 힘들어진다고 한다. 이를테면 복부와 허리에 찐 군살들. 폐경이 되면 다른 내장에 붙어 있던 지방들도 복부에 집중되고 골밀도도 낮아진다던데 언제 생긴지 모를 요통과 관절통이 그때 더 심해지는 건 아닌가 싶은 걱정들 말이다. 같은 연배의 사람들을 만날 때 그런 이야기를 주로 하는데 일본인 미리상도 그건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 최근 같은 또래의 여자 친구들과 밥을 먹는 일이 점점 즐겁다.
뱃살은 물론 어깨결림이 심해졌네, 피부가 건조해졌네, 기미가 늘었네 그런 얘기만 하는 어른들을 그동안 차갑게 보았지만, 막상 우리가 해보니 가벼운 자학도 즐거웠다.
- 폐경 후, 여자가 여자가 아니게 된다면 대체 무엇이 되는 거지?
생리가 왔을 때, 열한 살의 나는 '여자가 되었다'고는 느끼지 않았다. 거기에 있는 것은 사실 뿐이었다.
예전같지 않은 신체를 가끔 망각할 때가 있는데 가끔 올라가보는 체중계나 혼자 욕실에 들어가 벗은 몸을 봤을 때의 두루뭉술한 몸통을 확인할 때마다 내가 변해가는구나 혹은 늙어가는구나 하는 걸 느낀다. 가끔 그런 문제로 우울했는데 폐경이 와서 체형이 변하고 움직임이 둔해지고 몸살도 자주 앓더라도 '그냥 사실이구나' 라는 간단한 처방을 내려주는 미리상. 이 때문에 그녀의 에세이를 보면서 위안을 받는 여성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마스다 미리의 책은 이번이 두번째지만 아마도 그녀의 토닥임을 느끼며 위안을 구하는 대열에 나도 합류하게 될 것 같은 예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