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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너무 다정한
이유경 지음 / 하얀새 / 2011년 3월
평점 :
품절
우리 주변, 건너 건너 누군가가 겪고 있을 법한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다는 작가의 말처럼 <내겐 너무 다정한>의 주인공인 도자람과 강태웅 두 사람의 이야기는 꿈같은 로맨스가 아닌 진짜 누군가에게 있을 법한 평범한 연애를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끔 했다. 물론 자람과 태웅의 배경이 그렇게 평범하지만은 않았지만…….
최소 5개 국어를 할 줄 아는 부러운 언어능력의 소유자인 자람은 꽤 알아주는 프리랜서 번역가이다. 낮잠 바뀐 생활에 마감에 쫓기듯 보내는 시간이 많은 만큼 제 자신을 가꾸고 챙기기보다는, 무릎 나온 추리닝을 입고 인스턴트 음식으로 연명하며, 청소하는 것을 싫어하고 재활용쓰레기 분리수거는 한 달치를 한꺼번에 모아서 하는 등 전형적인 건어물녀가 바로 자람이다. 엄마를 버리고 재벌가로 새장가를 들고서 뒤늦게 아버지 노릇하겠다고 나타나 재벌가에 시집 보내려는 아버지에, 마찬가지로 외할머니에게 자신을 맡겨두고 새 삶을 찾아간 엄마로 인해 부모에게 별다른 애정을 느끼기 못하고 결혼, 사랑이라는 것에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는 자람은 어릴 적의 상처로 제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무심하고,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하는 기억력 장애도 가지고 있다. 그런 그녀에게 사사건건 말꼬리를 잡으며 챙겨주는 한 남자가 나타난다.
공간건축 건축사인 태웅은 출판사에서 근무하는 주호를 만나러 갔다가 제 신경을 건드리는 한 여자를 보게 된다. 그리고 그 여자가 흘리고 간 것으로 추정되는 돌반지 같은 금붙이를 주워 고이 모셔둔다. 우연이 세 번이면 반드시 만나야 할 인연이라고 했던가, 우연히 마트에서 부딪치고 사촌동생 아진이 소개 시켜주려고 했던 소개팅녀가 자람인 것을 알게 되고. 그가 진행 중인 공사현장이 자람의 집 근처이다 보니 오가며 그녀를 목격하게 되는 태웅은 잘 알지도 못하는 그에게 자신의 어두운 일면을 내보이는 자람이 더욱 신경 쓰이게 된다. 사사건건 그의 신경을 건드리며 말싸움에서지지 않고, 마치 밤길 조심할 일 생기라는 어투로 ‘밤길 조심하세요.’라는 살벌한 굿바이 인사를 날리는 자람에게. 그리고 신경 쓰이는 자람에게 신경을 쓰기 시작하는데…….
까칠한 듯하면서도 제 여자에게 그렇게 다정할 수 없는 세심한 모습의 태웅을 보면서 제목을 참 잘 지었다는 생각을 했다. 외모도 준수하고 능력 있지, 조금은 강박증까지 의심되는 깨끗함에 요리도 수준급. 거기다 제 여자 늦은 밤 홀로 택시 태워 보내기 싫어 제 집에서 재우는 다정함(?)을 보이는 그. 깁스한 팔로 운전해 잠적한 자람을 찾지 않나, 또 잠적한 그녀를 찾아 몽골까지 날아가는 열정을 보이는 태웅의 모습이 좋았다. 특히 어머니의 수술로 미국으로 날아가기 전 잘 챙겨 먹지 않고 인스턴트로 연명할 자람이 걱정 되어 갖가지의 반찬을 손수 만들어 놓고 가는 모습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의지할 누군가가 없는 데다 제 자신을 잘 챙기지 못하는 자람에게 너무도 잘 어울리는 남자라는 생각도 들었고.
자람과 태웅의 캐릭터를 봤을 때 이게 누군가에게 있을 법한 로맨스냐 라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한 남녀가 우연하게 스치듯 만난 후 우연의 반복이 인연이 되고 원수 보듯 툭탁거리다 어느새 서로에게 빠져들게 되는 모습이, 서서히 서로를 알아가고 마음을 열고 설렘을 이어가는 남녀의 평범한 로맨스가 시나브로, 잔잔하게 그려져 나가는 것에 정말 세상에 또 다른 자람과 태웅이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끔 했다. 두 사람 사이에 특별한 장애랄 것도 없었고 자극적인 설정이나 두 사람의 사랑을 방해하는 것들은 없었다. 어떻게 보면 글의 절정이라고 할 부분도 약했고. 그렇기에 조금은 밋밋하고 지루하다고 느낄 법도 하지만 우리 주변에서 찾을 수 있는 친근한 로맨스라는 점에서 공감이 가고 눈길을 사로잡았다. 허황되고 멀게만 느껴지는 로맨스보다 원래 친구의 소소한 연애스토리가 더 흥미로운 법 아닌가. 자람과 태웅의 이야기가 그랬다. 잔잔한 로맨스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이 글에게도 흥미를 느끼리라 생각한다.
물론 아쉬운 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을 좋게 마무리 짓고 싶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자람의 부모님 이야기는 그렇게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초반 고압적인 자람의 아버지의 모습에, 그리고 힘들어 하는 자람의 모습에 그녀가 안타깝게 느껴졌는데 부모님간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살짝 내비쳐 지면서 그러한 감흥이 날아갔다고 할까, 진실을 알고서 힘들어하며 몽골로 떠났던 점도 공감이 가기에는 부족했던 것 같다. 내가 자람과 같은 상황에 놓여본 적이 없어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지만 겪어보지 않았음에도 공감이 갈 수 있게끔 부모와 관련된 이야기도 좀 더 설득력 있게 다뤄졌다면 좋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너무 급하게 마무리된 감이 없지 않아 있기에. 이점만 더 신경을 쓴다면 다음에 어떤 글로 찾아올지는 모르겠지만 더 공감 가는 작가의 글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책을 덮은 지금도 떠오르는 한 장면, 잠든 자람이 제 가슴을 조몰락거리는 것에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염불하듯 외며 참는 태웅의 모습. 그 밤 피고 진 수많은 무궁화가 훗날 결실을 맺으며 그의 자제력이 해방되기는 하지만 그때 그렇게 안타깝지 않을 수 없었던 그의 다정함이 계속 떠오른다. 웃음 짓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