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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한 송이
정지원 지음 / 노블리타 / 2008년 9월
평점 :
품절
<길들여지다>의 남주였던 세진의 형인 선우의 사랑이야기를 담은 <민들레 한 송이>. <길들여지다> 속 선우의 이미지는 바른 생활 사나이의 표본 같았다. 생활 형편이 어려운 편모 가정의 장남이자 가장으로서의 막중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 그는 제가 할 수 있는 공부를 통해 성공을 꿈꾼다. 허투루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공부에 열중하는 전형적인 모범생에 꼿꼿한 성격. <민들레 한 송이> 속의 선우도 그랬다. 사실 <길들여지다> 초반 부분을 읽을 때 선우에게 야속함을 느꼈었다. 고등학교를 때려치우고 말썽을 피웠던 세진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제 동생인데 자존심을 건들릴법한 말로 구박을 하는 것을 보면서 공부 좀 잘한다고 제가 제일이라고 생각하는 밥맛 없는 녀석, 이라고 살짝 미워하기도 했다. 그런데 세진이 연예인의 길을 가게 되고 태영에게 제 동생을 맡기면서 혹시나 동생이 나쁜 사람의 꼬임에 넘어간 것은 아닐까 걱정하며 돌다리를 두드려보고 건너듯 태영에게 묻고 또 묻고, 동생을 잘 부탁한다고 여러 번 당부하는 모습을 보면서 세진에게 드러내지는 않지만 역시 제 동생을 아끼고 걱정하는 형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민들레 한 송이>를 통해 그를 더 많이 알고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오래된, 지고지순한 사랑도 엿보게 되었다.
민들레 같은 사랑을 한 여자 임정연.
그 사랑을 외면한 남자 조선우.
어느새 서른. 170㎝의 날씬하면서도 볼륨 있는 몸매에 예쁜 외모를 지닌 정연은 한정 법률사무소의 변호사로 재색을 겸비한 매력적인 여자이다. 십년 전 아프기만 했던 첫사랑의 흔적 이후, 외모 상관 없이 그녀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 그녀를 소중하게 다뤄줄 자상한 남자들을 만나온 정연이 솔로로 지낸 지도 6개월. 어디선가 남자 하나가 떨어졌으면 좋겠다 하던 그녀의 서른 번째 생일날 하늘에서 그녀의 기도를 들어줬는지 떡하니 남자가 나타났다. 그녀에게 상처를 줬던 십년 전의 첫사랑 선우가.
여고생 때 선우는 정연의 과외 선생님이었다. 남루한 차림에도 당당하고 남자다우면서도 잘생긴, 진지한 남자인 선우에게 연심을 품은 정연은 그와 함께 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해서 그가 있는 대학에 법학부에 입학하고 심지어 그가 들은 복싱부에까지 입부하는데…….
정연은 자신의 감정에 솔직했다. 선우를 좋아한다는 마음을 숨기지 않았고 꺾어도 다시 그 자리에 난다는 민들레처럼 일편단심으로 선우를 바라본다. 그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따르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뭐든지 해주고 싶듯 그녀의 마음이 들어간 자잘한 선물을 준다. 여자에게 관심이 없고 무뚝뚝한 선우이지만 알게 모르게 그녀만은 챙겨주는 그의 모습에 정연은 그녀가 선우를 좋아하듯 언젠가 그도 그녀의 마음을 받아주리라 그렇게 생각했다.
엠티 갔던 그 날의 선우와의 뜨거운 키스로 그와 사귀게 되었다고 믿었던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그녀의 진심을, 사랑을 짓밟는 선우의 잔인한 거부. 그를 따라다니는 그녀가 기분 나쁘다고, 그녀가 귀찮고 짜증난다고……. 그렇게 상처를 줬던 그가 십년 만에 돌아와서는 그녀를 좋아한다, 그녀의 남자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잔인하게 그녀의 마음을 짓밟았던 그에게 여전히 흔들리는 정연. 과거와 달리 그녀에게 매달리는 선우에게 시범주행을 해보겠다고 제안하는데……. 친구도 애인도 아닌 그저 하룻밤의 관계. 욕망을 충족하면 사라지겠지, 하던 흔들림은 선우와의 하룻밤으로 인해 더 크게 흔들린다.
잘생긴 외모와 탄탄한 몸매, 명석한 두뇌를 지닌 우월한 유전자 선우는 그보다 나이 많은 사람도 그를 함부로 할 수 없을, 좌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 넘치는 아우라를 지니고 있다. 과거 어려웠던 가정 형편으로 마음껏 누리거나 즐기지 못한 채 생계를 위해 과외를 하고 열심히 공부하는 수밖에 없었던 그에게 연애는 사치였다. 그래서 한없이 그를 자극하고 그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어린 여자 정연을 마음에 두고도 표현하지도 못하고 그녀에게 상처를 주면서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정연 모르게 그녀 주위를 맴돌다 유학을 떠났다. 한 가정의 장남으로서 제가 해야 할 일을 동생인 세진이 했다고 생각해 자격지심 내지 자책감을 안고 살았던 선우―어머니 위암 수술, 치료비와 그의 유학자금을 마련한 세진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함―는 유학을 가서 열심히 공부를 하고, 동료 연구원들과 의료기기 개발 회사를 세우고 크게 성공한 S&J 바이오테크의 대표가 되어 한국에 돌아온다. 세진에게 그가 졌던 빚을 갚고도 티도 나지 않을 정도의 통장 잔고에 정연에게 몇 백짜리 팔찌, 목걸이를 선물하고 스위트룸에 장기 투숙해도 아무 문제 없을 정도의 재력을 가지고서. 떳떳한 모습으로 십년 전에 잃었던 정연을 되찾고자 한다.
선우를 향한 제 감정을 옛사랑에 대한 미련이라고 치부하며 그저 가벼운 만남만 가지겠다고 하는 정연이지만 어느새 선우에게 빠져들고 선우의 진심과 그의 이야기를 알게 되면서 그녀도 제 감정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데……. 결혼하자는 선우의 말에, 자신의 커리어와 현실적인 결혼생활을 떠올리며 잠시 망설이고 고민을 하기도 하는 정연이지만 ‘그녀가 처음으로 하는’ 멋진 청혼으로 선우와 행복한 미래를 맞이한다.
지난 십년, 사랑에 대한 상처로 편안한 사랑만을 찾아 헤맸던 정연과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지 못한 채 그저 가슴으로만 담고 돌고 돌아서야 사랑을 쟁취하게 된 선우. 정연에게 대학교 동아리 시절부터 민들레라고 불려왔다지만 비록 정연에게 상처를 주며 거부했다지만 정연 하나 밖에 모르는 외골수인 선우의 모습에서도 정연을 향한 그의 민들레 연심을 엿볼 수 있었다. 편모에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일찍 철이 들어버린 선우이기에 제 속을 드러낼지도 모르고 감정 표현에도 인색했던 그이지만 정연과 재회 이후 그녀에게 사랑을 토로하고 숨겨뒀던 제 아픔과 사연을 드러내는 그의 모습이 아련하게 다가왔다.
<민들레 한 송이>도 캐릭터들이 참 좋은 글이다. 당당하고 솔직한 감성과 함께 매력적인 여성미까지 고루 갖춘, 현명한 여자인 정연도 멋졌고, 남자답고 진중하지만 제 여자에 대한 소유욕을 지닌 카리스마 넘치는 선우도 매력적이었다. 두 사람의 사랑을 응원하는 주변 인물들도 멋진 캐릭터들. <길들여지다>에 찬웅이 있었다면 <민들레 한 송이>에서는 수현이 있었다. 선우로 인해 상처 입었던 정연을 달래주고 십년이 넘는 시간동안 그녀의 친구로 지내오며 결국 선우와의 사랑을 이루어지게 하는 교량 역할을 제대로 해준 캐릭터였다. 찬영과 마찬가지로 순수하면서도 어리바리한 모습이 눈길을 끌었다.
<길들여지다>의 주인공인 세진과 태영을 볼 수 있는 것도 시리즈의 묘미. 여전히 태영스러운 모습의 태영와 팔불출 세진을 보면서 흐뭇했고, 왜소한 체구로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 했던 두 사람이 돌돌이의 부모가 된 것을 볼 수 있어서 기쁘기도 했다.
선우와 세진, 한 형제이건만 전혀 다른 성격은 두 사람. 하지만 <길들여지다>에 이어 <민들레 한 송이>를 읽으면서 든 생각은 성격은 다르지만 비슷한 외모만큼이나 비슷한 점도 역시 있다는 것이었다. 서로에게 자격지심 비슷한 감정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나 제 앞가림 잘하는 당당한 여자를 사랑한 것이나 사랑에 목매고 팔불출이라는 점.
십년을 돌고 돌아 다시 재회한 두 사람. 아니라, 했지만 그 십년이라는 시간 동안 여전히 서로를 그렸던 정연과 선우의 일편단심 민들레 사랑이야기가 결국 결실을 맺는 <민들레 한 송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