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길들여지다
정지원(김지원) 지음 / 노블리타 / 2008년 7월
평점 :
품절
정지원 작가의 <길들여지다>. 이 분의 글을 읽을 때면 드는 생각이지만 판타지가 되었든 가벼운 느낌의 현대물이 되었든 저마다의 캐릭터들이 독특한 매력을 뿜어낸다는 것이다. <길들여지다> 속의 주인공인 세진과 태영도 흥미로운 캐릭터였고 그래서 이 글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는 생각이 든다.
세진과 태영, 두 사람의 인연의 시작은 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세진은 고등학교를 중퇴한 철부지 열여덟 소년이었다. 가정형편은 어렵고 공부도 적성에 맞지 않아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돈 벌 생각만 하는 세진이지만 미성년자인 그가 제대로 된 돈벌이를 구하기는 어려웠다. 그가 내세울 수 있는 것이라곤 잘난 인물 정도. 그 덕에 꼬여드는 여자들도 많았고 실제로 즐기기도 한 그다. 종종 싸움도 하고 상스러운 욕을 입에 달고 살았다. 간단하게 말해서 인물만 믿고 설치는 문제아. 표면적으로 보이는 세진의 모습은 그렇다.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한없이 가벼워 보이고 제멋대로의 인생을 살아갈 것 같은 철부지인 그에게서 가족에 대한 끈끈한 정과 책임감을 느낄 수 있었다. 어려운 가정형편, 그리고 청천벽력 같은 어머니의 위암 소식. 위로 다섯 살 터울이자 어머니의 기대를 독차지하는, 가장이나 다름없는 형이 있지만 형 또한 장학금으로 학교를 겨우 다니는 신세라 어머니의 수술비를 구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세진은 돈을 벌기를 원했다, 간절히. 그러던 중 만나게 된 사람이 스물네 살의 부잣집 외동딸 태영이었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나이트클럽에서 이루어졌다. 하룻밤을 같이 보낼 남자를 사러 왔다는 태영, 그녀의 마음에만 들면 큰돈을 손에 쥘 수 있다는 웨이터 친구의 꾐에 넘어가 태영에게 자신을 사달라고 어필하는 세진. 그런 세진을 향한 태영의 반응은 흥미로우면서도 냉담했다. 하지만 결국 태영은 세진을 산다. 세진이 말한 잠자리 상대가 아닌 다른 의미로…….
세진에게 있어 태영은 어머니의 치료비와 형의 학비와 유학자금 등의 어마어마한 금액을 빌려준 채권자다. 볼 것 없는 열여덟 소년의 무엇을 보고 태영은 그런 어마어마한 돈을 빌려준 것일까? 태영은 아름다운 소년이었던 세진을 처음 본 순간 매료되었었다. 도도한 척 무감각한 척하며 세진을 깔아뭉개기고 수없이 채찍질을 가하는 등 세진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하기도 했지만 겉으로는 강한 척을 해도 상처를 안고 살아가던 가녀린 체구의 그녀는 세진을 처음 본 순간부터 조금씩 사랑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앤젤릭 인베스트(에이아이)’라는 투자회사를 설립하고 SE엔터테인먼트에 투자를 함과 동시에 세진을 SE에 집어넣고 그를 스타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 것이다. 세진을 잠자리 상대로 본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립해 빛을 발할 수 있도록 꿈을 심어준 것이다. 그를 자신에게 가두지 않고 훗날 후회할 것을 알면서도 만인의 연인이 되게 한 것이다.
어머니와 형에게 항상 못미더운 아들이자 아우였던 세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며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던 그는 조금씩 자신감을 찾아가고 연기를 사랑하게 된다. 부모님이 주신 잘난 외모 덕을 보기도 했지만 자신의 일을 즐기기 시작하고 작은 칭찬에도 기뻐하며 더 열심히 노력하는 그를 볼 때면, 역시 칭찬을 고래도 춤추게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집에서 문제아였던 그였기에 스스로가 제대로 된 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그였기에 작은 칭찬도 그에게는 활력소가 되고 더 열심히 할 수 있게 열정을 심어준 것 같다. 자신에게 잠재되어 있는 것을 알아가며 꽃을 피우기 시작하는 세진. 세진이 성공하는 데 있어서는 태영의 탁월한 사업적 수완도 빛을 발했다. 잊히기 쉽고 묻히기 쉬운 곳이 바로 연예계란 곳. 그런 연예계에 세진을 들여놓고 시기적절한 센스로 세진을 톱 탤런트로 이끄는 태영이다.
세진이 톱 탤런트로 들어서기 전, 아직 새내기일 적에 두 사람의 관계에 변화가 찾아온다. 사업적인 관계만이 아니라 사적으로도 두 사람이 연결된 것. 그녀의 선택이었음에도 점점 빛을 발하기 시작하는 세진에 더 외로워지는 태영은 세진을 만나고서 그만뒀던 일탈을 다시 시작하려 하고 그에 질투를 느낀 세진이 결국 태영을 탐하게 되면서 두 사람의 은밀한 관계도 시작된 것이다.
주종관계,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 세진은 자신의 그런 위치가 싫었다. 그가 빚을 졌다는 이유로 뭐든 제 인생을 마음대로 하려한다며 태영을 증오한다. 그녀를 탐하면서도 그녀에게 진 빚만 갚으면 돌아보지도 않고 떠나겠다는 말을 담고 사는 세진. 하지만 정작 8년의 시간이 흐른 후 그녀에게 진 빚을 이자까지 쳐서 다 갚으며 그녀와 더 이상 비즈니스 관계가 아닌 상태가 되었을 때 오히려 속 시원함이 아닌 허탈감과 불안감을 느낀다. 그는 태영이 아니라 스스로가 싫었던 것이다. 비록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톱스타가 되었지만 여전히 태영은 그에게 닿기 힘든 존재. 그런 자신의 처지를 느끼게 하는 태영이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태영에게 알게 모르게 상처를 많이 줬다. 제 감정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어리석게.
태영은 아픔을 가지고 있었다. 오빠의 잘못된 사랑이 낳은 교통사고로 오빠를 잃고 다리를 다친 그녀. 수술이 잘 되었음에도 여전히 한쪽 다리를 절고 자그마한 충격에도 아파하는 그녀. 육체는 나았지만 마음이 병들어 여전히 다리를 절고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종이를 수없이 찢어버리는 편집적인 증상을 보이는 태영. 겉으로는 강한 척 독한 척 하는 그녀이지만 그녀의 가녀린 체구만큼이나 간간히 여린 면모를 보이는 그녀가 때때로 안쓰러웠다. 사랑이라는 것에 회의적이어 방황을 했던 태영은 세진을 사랑하게 되면서 사랑이 불러일으키는 치명적인 집착에 대해 이해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오빠와 같은 선택을 하게 될까봐 스스로를 두려워하고 세진에게 내쳐지는 게 두려워 먼저 손을 놓으려고 한다.
채무관계가 끝이 나고 모든 것에 지친 태영은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결혼을 하고자 한다. 제지회사 회장의 둘째 아들 찬웅과. 누가 됐든 결혼을 할 결심을 하고 있었던 그녀였지만 실제로 만나본 찬웅은 괜찮은 남자였다. 남을 잘 믿어 손해를 많이 보는 어리바리한 남자이지만 그녀를 살뜰히 보살펴 주는 자상한 면을 가진 찬웅. 그런 보살핌과 애정을 받아본 적 없던 태영은 결국 찬웅과의 결혼을 서두르고. 그 과정에서 세진은 자신의 감정을 깨닫게 되면서 태영에게 자신의 진심을 토로하기 시작한다. 지난 8년이라는 시간 동안 자신을 길들인 태영을 길들이고자 하는 세진. 그에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는 태영.
<길들여지다>의 주인공인 세진과 태영은 겉으로 봤을 때는 성격이나 환경적인 면이 아주 대조적인 인물들이다. 가난한 집의 아들로 거칠고 제멋대로인 철부지이지만 구김살 없고 밝은 세진과 부잣집 딸로 많은 것을 누렸지만 모든 것에 회의적이고 냉정하며, 남에게 쉽게 곁을 주지 않으며 어둠을 간직한 태영. 그런 정반대의 사람들이 사랑에 빠졌다. 8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하면서 서로에게 익숙해진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서로가 가지지 않은 매력에 끌린 것일지도. 불완전하기만 했던 두 사람이 서로를 통해 완전함을 느낀 것일지도.
전체적인 스토리를 봤을 때는 새롭다, 처음 보는 글이다 그런 류의 글은 아니다. 그럼에도 <길들여지다>를 보면서 신선함을 느꼈다. 왠지 모르게 역할이 바뀐 듯한 남주와 여주의 상황도 재밌었고 기존의 로설에서 봐왔던 여주나 남주 캐릭터와 많이 달라서 흥미로웠다. 대개 로설에서 여주는 성격이 어떻게 됐든 예쁜 외모를 지니고 남주는 재력이나 지적으로 모자람이 없으며 카리스마를 지닌 완벽한 남자의 표상으로 그려졌는데 <길들여지다>의 태영과 세진은 달랐다. 예쁘다고 할 수 없는 외모에 150cm 정도에 소말리아 난민을 떠올리게 하는 깡마른 체구의 태영과 똑똑함과는 거리가 먼, 카리스마 보다는 개구쟁이 같은 친근함을 지닌 세진. 재밌는 조합이라고 할까. 찬웅을 비롯한 조연들도 흥미로웠고, 태영과 세진의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스토리 전개나 강렬하면서도 가벼운 듯한 느낌의 스토리도 재밌게 와 닿았다. 스토리만 보면 기존 로설에서 여러 번 봐왔을 법한 것임에도 개성 있는 캐릭터와 작가의 감각적인 필력과 심리묘사가 매력적이고 재밌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