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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케
매들린 밀러 지음, 이은선 옮김 / 이봄 / 2020년 5월
평점 :
작년 신착도서 서가에 꽂혀 꾸준히 사랑받아 온 키르케!
읽어야지 읽어야지 말만 하다가 벽돌책깨기 북클럽의 기회로 만난 키르케!
이런 영광스러운 기회를 주신 이봄출판사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나는 사실 신화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키르케를 읽기 전부터 왠지 두렵기도 하였다. 하지만 어느 책이든 흐름의 문제였던가. 흐름을 타게 되니 신화만큼 재미있는 게 없지 라는 다소 거만한 생각으로 책을 마무리했다.
이 책은 3천년 간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진 신화라는 장르를 ‘여성의 목소리’를 실어 ‘여성 서사시’로 재발굴 하였다.
E.H.카는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 했던가. 역사뿐만 아니다.
작가든, 연구가든, 역사가든, 과거에 일어난 일들을 현재의 시점에서 끊임없이 재해석하는 과정을 통해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 자체가 중요하겠다. 남성적 신화를 작가가 여성적 서사로 재해석하면 그것이 곧 새로운 신화의 탄생이기 때문이다.
이번 소설 『키르케』는 매들린 밀러의 재해석 과정을 통해 새롭게 태어난 하나의 장르로 재탄생된 것 같아 역사적 가치가 있어 보인다.
태양의 신 헬리오스의 딸이자 비천한 하급여신인 키르케는 여성이라는 굴레를 벗어던지고 자기만의 운명에 내맡겨 마녀가 되었다는 이유로, 아이아이에섬으로 추방당한다. 하지만 혼자 남을지언정 그녀는 절대 굴하지 않는다. 인간 오디세우스 사이에서 텔레고노스를 낳고 억척스럽게 키우기도 하였고, 전쟁의 여신 아테나를 따라 텔레고노스가 이탈리아로 도시를 건설하러 간다는 포고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절대 지나친 감정을 보이지 않는 그녀다. 괴물 스킬라를 무찌를 때마저도 당당하다.
하급 여신이라하여 하급의 삶을 살 필요가 없다는 강인한 자기 주관적인 모습이 현대 여성상을 닮아, 옆집에 한 명씩 살고 있는 언니 같은 느낌도 든다.
과거의 키르케는 남성우월적인 환경에서 역경적인 삶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여성이 주체적으로 살 수 있는 시대로 도래된 현재에서 키르케-내가 될 수도 당신이 될 수도 있는-는 여성에게 조금 더 나은 삶을 바꿀 수 있는 주인공이 될 수 있기에, 스스로 선택해야겠다.
타인의 삶에서 자전할지, 나의 삶에서 자전할지를.
“나는 매일 밤 달빛을 맞으며 그의 옆에 누웠다. 딱 한 계절만 더 있다 가라고 그에게 얘기하는 상상을 했다. 그는 놀랄 것이다. 아주 보일락 말락 하게 실망한 눈빛을 언뜻 지을 것이다. 황금빛 마녀는 달려선 안 된다.” -293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