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러키 스타트업
정지음 지음 / 민음사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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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본 책 중 제일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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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답 없는 회사의 이름을 아는가? 모른다면 당장 알려 주겠다. 정답은 ‘국제마인드뷰티콘텐츠그룹‘ 영문 표기는 ‘Kuk-je mind beauty contents group‘이다.
눈치 빠른 사람들이 "왜 international이 아니고 kuk-je냐?"
고 물을 때마다 복잡한 심정이 된다. 가감 없이 털어 놓자면대표 이름이 박국제라 그렇다. 캡틴 박은 이 꼬라지가 우습다는 걸 인정하지 못하면서도, 사람들이 놀린다는 이유로돌연 영어 닉네임 제도를 도입했다. 명함의 ‘대표 박국제‘를
‘CEO James‘ 정도로 뭉개려는 시도였다. - P19

-다정아, 언니는 네가 사장님보다는 돈을 이해하려노력했음 좋겠어. 애초에 돈 자체가 더러워서 돈 버는 일도더럽고 치사한 거거든. 앞으로도 네가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돈을 벌고자 한다면, 결국 이 정도 더러운 꼴은 감수해야 할 거야. 명심해. 꽃밭에서는 절대로 돈이 나오지 않아.
- ......
-돈 나오는 곳은 전부 시궁창이야. 자본주의 사회의절대 진리지. - P23

듣다 보니 이 또한 타당한 얘기였다. 그러나 박국제는똘똘하기 짝이 없는 수진 언니와 지구를 대놓고 나무랐다.
도전 정신이 없다. 짬 좀 찼다고 몸 사리는 거냐, 제발 뺀질거리지 말고 일들을 해라 등등. 훈계조로 좔좔 쏟아 내는 잔소리가 청산유수였다. 나는 이런 화법을 ‘독개구리의 몸집부풀리기‘라 불렀다. 신기하게도 악덕 대표들은 꼭 업무적설득이 필요한 순간마다 치사한 기 싸움을 걸었다. 일이야개판이 되든 말든 직원부터 찍어 누르고 보는 게 그들이 알량한 자존심을 수호하는 비법인 것 같았다.
-니들 돈 써? 니들 시간만 써? 누가 니들 보고 강사 구해 오랬냐구. 내 폰에 저장된 연락처만 1500개가 넘어.
-아! 이미 강사를 구하고 말씀하신 거군요.
-구한 게 아니고 구해진 거나 마찬가지라고. - P54

-서경 언니가 조언하길∙∙∙∙∙ 상대에게 큰 실망을 선물하고 싶다면 먼저 기대감을 키워 주래. 기대가 클수록 깨졌을 때 실망도 충격도 커지는 법이라고. 배신하고 싶으면 더충성하고, 절연하고 싶으면 더 친해지고, 헤어지고 싶으면더 사랑하래. 처음엔 이 언니 뭐야, 되게 무섭다 싶었는데,
생각할수록 무슨 말인지 알 것 같기도 하고. - P78

태연한 척했지만 실은 마음이 스산했다. 내가 스터디 카페를 모르는 만큼, 지원도 회사라는 세계를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등학생 땐 분 단위 일상을 공유하던 우리였는데 이젠 100마디 얘기를 나눠도 각자의 일상이 서로에게 스며들지 못했다.
문득 자길 감정 쓰레기통으로 보냐던 지원의 항의가 떠올랐다. 내가 그 애를 감정 쓰레기통으로 보는 것일까? 그애가 내 감정들을 쓰레기 취급하는 것일까? - P108

나는 벅차올랐다. 그때 난 너무 설레서 이 언러키 스타트업의 제1법칙을 마음껏 잊고 있었다.
여기에선 모든 일이 어떻게든 망한다는 것, 희망은 사망하고 소망은 절망으로 화한다는 것 말이다. - P123

‘이제는...... 진짜 낙장불입이로구나!‘
방청객들이 박수와 환호를 보내왔고, 나는 비로소 공들여 쓰고 있던 불안이라는 가면을 벗어던졌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는 확신이 들자, 온몸에 피가 팽팽 도는 듯 뻑적지근한 흥분감이 따라왔다. -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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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킨집은 이제 그만. 소속감 강조하며 자기들 배만 채우는 회사도 이제 그만. 이 나이에 공부해 어디 지원하는 것도 무리. 혹여라도 남자 덕 보고 살아갈 생각도 금물. 그렇다면 내게 남은 것은 그나마 방송 프로듀서 경력과 경험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해야 오래 할 수 있고, 오래 해야 숙달되어 잘할 수 있다던 말이 떠올랐다. 그 오지 섬들과 중구난방 축제를 돌아다니면서도 흥미를 잃지 않았던 것, 나만의 기획으로 업계에 한 획을 그은 프로그램을 만들던 때의 설렘도 기억났다. 그렇다면 나는 결국 방송 일을 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혼자. - P20

노래는 타임머신처럼 이곳을 그 시절 비디오 가게로 돌려놓고있었다. 아저씨가 즐겨 듣던 이 노래를 따라 부르던 그때처럼, 어느새 나는 가사를 음미하고 있었다.
그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불렀던 노래의 가사가 이렇게 곱씹을만큼 아름다운지 이제야 깨달았다. 후렴부의 경쾌한 선율과 힘찬클라이맥스가 이어지자 내 심장도 뜨겁게 뛰는 게 느껴졌다.
어쩌면 아저씨가 되고 싶었던 건 방랑자가 아니었을까? 돈키호테처럼 ‘상념의 방랑자가 되어 세상의 정의를 목청껏 노래하고싶었던 게 아닐까? 하지만 우리 곁에서 사라진 ‘말 없는 방랑자‘
가 되어 어딘가에서 돌처럼 굳어버린 건 아닐까?
노래가 끝났다. 돈 아저씨가 몹시 보고 싶어졌다. - P39

민주영 피디를 보낸 뒤 한동안 소파에 몸을 묻은 채 꼼짝할 수없었다. 목표가 사라진 기분이었다. 변한 돈 아저씨의 모습과 그에 못지않은 충격적인 고백은 그동안 내가 그려왔던, 찾고자 했던돈키호테 장영수와는 달라도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다.
아저씨는 변했다.
스스로를 산초라고 하며 돈키호테를 부정했다는 것이야말로그가 변했다는 사실을 대변했다. 짧지 않은 서른 살 인생을 통해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내게 아저씨의 변신 아닌 변신은 뭐랄까, 묘한 배신감을 느끼게 했다. 돈키호테를 찾아 나섰는데...... 산초라니, 스스로를 돈키호테로 착각했던 산초라니, 도무지 이 상황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 P250

"엄마 말이 맞아. 돈 번다고 일이 아니잖아. 보람도 있고 가치도있어야지. 맞아. 내 인생에 그 아저씨 찾는 게 보람이고 가치야. 엄마가 이해 못할 수도 있지만 나 중학교 시절 외로울 때 그 아저씨가 보여준 영화며 같이 감상 나눈 책이며 그런 게 날 견디게 해줬어. 서울 가서도 그런 취미로 살았고 결국 직장도 그쪽으로 잡게됐잖아. 엄마도 내가 방송 피디 된 거 좋아했잖아." - P253

"솔아. 사람은 평생 자기를 알기 위해 애써야 해. 그래. 나는 스스로를 돈키호테라 이름 짓고 살아왔지. 하지만 『돈키호테』를 받아쓰면 받아쓸수록, 세상에 맞설 내 이야기를 쓰면 쓸수록, 나는돈키호테가 아니란 걸 깨닫게 되었어. 돈키호테라면 벌써 그 모든 불의와 부패를 향해 몸을 던지지 않았겠니? 그런데 나는 한순간도 온전히 몸을 던지지 못했어. 그저 시늉만 한 거야. 나는 범접할 수 없는 돈키호테를 따라다니며 그를 흉내 낸 산초일 뿐이더라고."
"그럼 산초였던 나는, 나는 어떡하란 말이에요?"
"내 생각엔, 솔이 네가 돈키호테다. 나는 네가 비디오 가게에서늘 TV 프로그램 보며 깔깔 웃던 게 기억이 나거든. 마치 브라운관으로 들어갈 것처럼 몰두했지. 그런데 나중에 네가 그런 TV 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이 됐다는 얘길 듣고 정말 깜짝 놀랐어. 저렇게 솔이는 자기 꿈을 이루며 사는구나. 그때 나는 이미 널 돈키호테라고 생각했단다." - P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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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같이 일가친척 하나 없는 사람은 이런 일이 있을땐 이렇게 팔 걷어붙이고 도와주는 이들이 소중한 법이야.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니 자네도 모든 사람한테인덕을 쌓아. 높이를 보지 말고 낮게 봐. 여기 낮은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귀를 기울여.그 좋은 눈썰미로 그들의 속내를 읽어 내고 도와줘. 할 수 있는 만큼." - P374

사람 환자로 왁자한 낮이 지나고 어두운 밤이 됐다.
한의원 원장 진료실과 부원장인 귀신 의사의 진료실에주황색 불이 켜지면 일렁이는 그림자들이 몰려왔다. 불에 태운 약초와 한약이 그득한 한의원 앞에서 귀신 환자 담당 박 씨가 나와 의수를 하늘로 번쩍 들었다.

"자, 모두 줄을 서시오!!!" - P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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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안 씨. 시간이 흐르면서 해결되는 것들이 있다지만, 그건해결하려는 노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지안 씨가 말했잖아. 지안씨도 이제 노력이 필요할지 모르지. - P313

나는 그때 그 중년 여성의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했다. 트라우마란 시간을 뛰어넘는 마음의 상처라고. 그녀는 나와 함께 그때를 마주하며, 그 일이 떠오를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나씩 적어나갔다. 그 사건은 상처였고 특수한 상황이었음을 인지하며 일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그럼에도 종종 그녀는 다시 울었다. 그때마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지금, 여기 있어야 한다고. 과거가 아닌 현재를 살아가야 한다고. - P339

태어난 순간부터 계속 함께 살아온 사람인데 남보다 멀게 느껴지는 서른넷. 생각이 이어질수록 엄마라는 사람도, 지훈 오빠도 까마득한 남처럼 느껴졌다. 그 속마음을 다 알지 못하는. 작은 일 하나 이야기해 본 적이 없는. 완전히 새롭게 알아가야 하는 사람. 우리는 더 작은 것들을 얘기해야만 했다. - P348

큰 상실 이후의 삶은 애도다. 슬퍼하다 화를 내고, 화를 내다무력해진다. 그것들은 하나의 방향성만을 띠지 않는다. 서로를오가고 이내 받아들인다. 시간이 짧든 길든, 받아들여야 살아갈수 있다. 죽은 이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이 슬픔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걸. 그것이 애도고, 죽음 이후 남겨진 이들의 몫이다. 그리고 나도 다르지 않았다. 나도 그 모든 과정을 통해 알아야 했다. 아빠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던 숱한 날들이 스쳤다. 언제라도 돌아올 거라는 헛된 희망. 떠나지 않았다고, 부여잡고 싶은 어린 마음. 내가 있어야 하는 곳은 지금 여기. 이 순간을 살아내려 슬퍼해야 했다. 내가 만나온 사람들처럼, 처절하게 울어야 했다. 눈물이 툭 터져 나왔다. 속에서 응어리가 뜨겁게 달아오르며 녹아내리는 눈물이었다. - P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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