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뜰에 봄-

정원은 평생 궁금했었다. 안리를 편애하는 신이 나에게만내어 준 한 조각이 있을까? 그런 게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정원이 비로소 찾은 답은 ‘시간‘이었다. 안리에게는 단 1초도 없겠지만 정원은 아니었다. 살아서 움직이며 말하고 웃을수 있는 무수한 날들이 정원을 기다려 주고 있었다.

마지막 인사를 건네기 위해 안리의 방으로 향했다. 문을열자마자 커다란 액자가 보였다. 거대한 사각 프레임 속에활짝 웃는 그 애의 사진이 박제되어 있었다. 가여운 안리, 스무살 겨울에 평생 갇힌 안리. 이제 언제나 동생일 안리에게정원은 참아왔던 귓속말을 했다.
"그랜드 스타렉스, 72머 3284." - P237

-없는 사람-

소설가는 거짓말에 능숙해야 한다. 그래야 없는 이야기를지어내고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캐릭터를 창조할 수 있다. - P252

‘라이터스 블록‘이라는 게 있다. 벽에 막힌 듯 글을 쓸 수없게 되는 걸 말한다. 인정하기 싫지만 나도 거대하고 단단한 벽에 가로막혀 있다. 소설을 쓰려고 컴퓨터를 켜면 머릿속이 멍해진다. 아무런 단어도 채워 넣지 못한 문서 프로그램이 몇 시간이고 저 혼자 깜빡인다. 그걸 보고 있자면 오싹해진다. 다시는 글을 쓸 수 없게 될 것만 같아서. - P253

산사 입구에 L이 서 있었다. 두 형사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듯했다. L은 내가 상상했던 그대로의 모습을 한 채 환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뚜벅뚜벅 걸어 어딘가로 사라졌다.

*

강의할 때 종종 하던 말을 떠올린다.
"잘 만든 캐릭터는 생동감을 얻어 작품 밖으로 나가서도살아 움직입니다."
거짓말이라 생각했는데, 진짜였다. - P285

-아메이니아스의 칼-

있잖아, 언니를 보고 있으면 나를 보는 것 같아. 이번 생이아닌 다른 생의 나. 차원의 틈새에서 길을 잃고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버린, 저주 같은 강박에 사로잡혀 누구보다 희생적인 척 지독하게 이기적인, 버려진 어린애처럼 겁에 질려스스로를 똑바로 바라볼 줄 모르는 어리석은 나.
난 언니를 보면 어디까지가 내 모습이고 어디부터가 내가아니게 되는지 헷갈려. 우리는 다른 듯 닮았고 닮은 듯 다르지. 하지만 확실한 건 우리는 분명 이어져 있다는 거야. 그러니까, 내가 언니에게 입을 맞추고 싶은 건 당연한 거야. 인간은 스스로를 제일 사랑하기 마련이니까.
오늘이 지나면 언니가 원하는 대로 다 해줄게. 언니만을위한 무대의 배우가 되어 줄게. 그러니 언니는 계속 나만을위한 희생적인 언니로 남아 줘.
언제까지나. -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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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목 놓아 울 수 있는 자기만의 바다가 필요하다. 연남동에는 하얀 거품 파도가 치는 눈물도 슬픔도 씻어 가는 작은바다가 있다" - P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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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러키 스타트업
정지음 지음 / 민음사 / 2022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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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본 책 중 제일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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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답 없는 회사의 이름을 아는가? 모른다면 당장 알려 주겠다. 정답은 ‘국제마인드뷰티콘텐츠그룹‘ 영문 표기는 ‘Kuk-je mind beauty contents group‘이다.
눈치 빠른 사람들이 "왜 international이 아니고 kuk-je냐?"
고 물을 때마다 복잡한 심정이 된다. 가감 없이 털어 놓자면대표 이름이 박국제라 그렇다. 캡틴 박은 이 꼬라지가 우습다는 걸 인정하지 못하면서도, 사람들이 놀린다는 이유로돌연 영어 닉네임 제도를 도입했다. 명함의 ‘대표 박국제‘를
‘CEO James‘ 정도로 뭉개려는 시도였다. - P19

-다정아, 언니는 네가 사장님보다는 돈을 이해하려노력했음 좋겠어. 애초에 돈 자체가 더러워서 돈 버는 일도더럽고 치사한 거거든. 앞으로도 네가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돈을 벌고자 한다면, 결국 이 정도 더러운 꼴은 감수해야 할 거야. 명심해. 꽃밭에서는 절대로 돈이 나오지 않아.
- ......
-돈 나오는 곳은 전부 시궁창이야. 자본주의 사회의절대 진리지. - P23

듣다 보니 이 또한 타당한 얘기였다. 그러나 박국제는똘똘하기 짝이 없는 수진 언니와 지구를 대놓고 나무랐다.
도전 정신이 없다. 짬 좀 찼다고 몸 사리는 거냐, 제발 뺀질거리지 말고 일들을 해라 등등. 훈계조로 좔좔 쏟아 내는 잔소리가 청산유수였다. 나는 이런 화법을 ‘독개구리의 몸집부풀리기‘라 불렀다. 신기하게도 악덕 대표들은 꼭 업무적설득이 필요한 순간마다 치사한 기 싸움을 걸었다. 일이야개판이 되든 말든 직원부터 찍어 누르고 보는 게 그들이 알량한 자존심을 수호하는 비법인 것 같았다.
-니들 돈 써? 니들 시간만 써? 누가 니들 보고 강사 구해 오랬냐구. 내 폰에 저장된 연락처만 1500개가 넘어.
-아! 이미 강사를 구하고 말씀하신 거군요.
-구한 게 아니고 구해진 거나 마찬가지라고. - P54

-서경 언니가 조언하길∙∙∙∙∙ 상대에게 큰 실망을 선물하고 싶다면 먼저 기대감을 키워 주래. 기대가 클수록 깨졌을 때 실망도 충격도 커지는 법이라고. 배신하고 싶으면 더충성하고, 절연하고 싶으면 더 친해지고, 헤어지고 싶으면더 사랑하래. 처음엔 이 언니 뭐야, 되게 무섭다 싶었는데,
생각할수록 무슨 말인지 알 것 같기도 하고. - P78

태연한 척했지만 실은 마음이 스산했다. 내가 스터디 카페를 모르는 만큼, 지원도 회사라는 세계를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등학생 땐 분 단위 일상을 공유하던 우리였는데 이젠 100마디 얘기를 나눠도 각자의 일상이 서로에게 스며들지 못했다.
문득 자길 감정 쓰레기통으로 보냐던 지원의 항의가 떠올랐다. 내가 그 애를 감정 쓰레기통으로 보는 것일까? 그애가 내 감정들을 쓰레기 취급하는 것일까? - P108

나는 벅차올랐다. 그때 난 너무 설레서 이 언러키 스타트업의 제1법칙을 마음껏 잊고 있었다.
여기에선 모든 일이 어떻게든 망한다는 것, 희망은 사망하고 소망은 절망으로 화한다는 것 말이다. - P123

‘이제는...... 진짜 낙장불입이로구나!‘
방청객들이 박수와 환호를 보내왔고, 나는 비로소 공들여 쓰고 있던 불안이라는 가면을 벗어던졌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는 확신이 들자, 온몸에 피가 팽팽 도는 듯 뻑적지근한 흥분감이 따라왔다. -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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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킨집은 이제 그만. 소속감 강조하며 자기들 배만 채우는 회사도 이제 그만. 이 나이에 공부해 어디 지원하는 것도 무리. 혹여라도 남자 덕 보고 살아갈 생각도 금물. 그렇다면 내게 남은 것은 그나마 방송 프로듀서 경력과 경험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해야 오래 할 수 있고, 오래 해야 숙달되어 잘할 수 있다던 말이 떠올랐다. 그 오지 섬들과 중구난방 축제를 돌아다니면서도 흥미를 잃지 않았던 것, 나만의 기획으로 업계에 한 획을 그은 프로그램을 만들던 때의 설렘도 기억났다. 그렇다면 나는 결국 방송 일을 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혼자. - P20

노래는 타임머신처럼 이곳을 그 시절 비디오 가게로 돌려놓고있었다. 아저씨가 즐겨 듣던 이 노래를 따라 부르던 그때처럼, 어느새 나는 가사를 음미하고 있었다.
그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불렀던 노래의 가사가 이렇게 곱씹을만큼 아름다운지 이제야 깨달았다. 후렴부의 경쾌한 선율과 힘찬클라이맥스가 이어지자 내 심장도 뜨겁게 뛰는 게 느껴졌다.
어쩌면 아저씨가 되고 싶었던 건 방랑자가 아니었을까? 돈키호테처럼 ‘상념의 방랑자가 되어 세상의 정의를 목청껏 노래하고싶었던 게 아닐까? 하지만 우리 곁에서 사라진 ‘말 없는 방랑자‘
가 되어 어딘가에서 돌처럼 굳어버린 건 아닐까?
노래가 끝났다. 돈 아저씨가 몹시 보고 싶어졌다. - P39

민주영 피디를 보낸 뒤 한동안 소파에 몸을 묻은 채 꼼짝할 수없었다. 목표가 사라진 기분이었다. 변한 돈 아저씨의 모습과 그에 못지않은 충격적인 고백은 그동안 내가 그려왔던, 찾고자 했던돈키호테 장영수와는 달라도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다.
아저씨는 변했다.
스스로를 산초라고 하며 돈키호테를 부정했다는 것이야말로그가 변했다는 사실을 대변했다. 짧지 않은 서른 살 인생을 통해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내게 아저씨의 변신 아닌 변신은 뭐랄까, 묘한 배신감을 느끼게 했다. 돈키호테를 찾아 나섰는데...... 산초라니, 스스로를 돈키호테로 착각했던 산초라니, 도무지 이 상황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 P250

"엄마 말이 맞아. 돈 번다고 일이 아니잖아. 보람도 있고 가치도있어야지. 맞아. 내 인생에 그 아저씨 찾는 게 보람이고 가치야. 엄마가 이해 못할 수도 있지만 나 중학교 시절 외로울 때 그 아저씨가 보여준 영화며 같이 감상 나눈 책이며 그런 게 날 견디게 해줬어. 서울 가서도 그런 취미로 살았고 결국 직장도 그쪽으로 잡게됐잖아. 엄마도 내가 방송 피디 된 거 좋아했잖아." - P253

"솔아. 사람은 평생 자기를 알기 위해 애써야 해. 그래. 나는 스스로를 돈키호테라 이름 짓고 살아왔지. 하지만 『돈키호테』를 받아쓰면 받아쓸수록, 세상에 맞설 내 이야기를 쓰면 쓸수록, 나는돈키호테가 아니란 걸 깨닫게 되었어. 돈키호테라면 벌써 그 모든 불의와 부패를 향해 몸을 던지지 않았겠니? 그런데 나는 한순간도 온전히 몸을 던지지 못했어. 그저 시늉만 한 거야. 나는 범접할 수 없는 돈키호테를 따라다니며 그를 흉내 낸 산초일 뿐이더라고."
"그럼 산초였던 나는, 나는 어떡하란 말이에요?"
"내 생각엔, 솔이 네가 돈키호테다. 나는 네가 비디오 가게에서늘 TV 프로그램 보며 깔깔 웃던 게 기억이 나거든. 마치 브라운관으로 들어갈 것처럼 몰두했지. 그런데 나중에 네가 그런 TV 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이 됐다는 얘길 듣고 정말 깜짝 놀랐어. 저렇게 솔이는 자기 꿈을 이루며 사는구나. 그때 나는 이미 널 돈키호테라고 생각했단다." - P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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