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경사님은 잘못한 게 없어요. 에릭 도노반이 지금껏 감옥에 갇혀 있어야 했던 건 매트가 강제로 월터를 협박해 끌어낸 거짓 자백 탓이었어요. 진실을 알면서도 침묵하고 방관한 니콜라스탓이기도 하고요. 그 두 사람은 죽음을 택할 게 아니라 책임을 졌어야 마땅해요." - P287
"헬렌이 경사님 생에서 단 하나의 짝이라는 걸 깨닫게 된 계기가 있어요?" "솔직한 대답을 원해?" "네." "헬렌이 떠나고 나서야 깨달았어. 물론 나는 어느 누구보다헬렌을 사랑했지. 헬렌과 함께 살고 싶었으니까 결혼했고,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어도 헬렌에 대한 사랑만큼은 조금도 의심한적이 없었어. 그런데 누군가가 ‘자기 생의 단 한 사람‘이라는 걸깨닫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 줄 아나? 그건 그 사람이 죽으면 자신도 함께 죽는 편이 더 낫다는 걸 알게 된다는 의미야. 그 사람의 죽음과 함께 자기 세계도 무너져버리거든. 그 사람 없이는 뭐든 삐걱거리고 제대로 작동하지 않지. 나는 고장 난 기계가 된기분이야. 헬렌을 잃으면서 나 자신의 작동법을 잃어버렸어." "고쳐줄게요, 경사님." "자네가 고칠 수 있을지 모르겠군. 게다가 고칠 수 없다면 그것으로 그냥 좋은 거지. 진심으로 그 사람을 사랑했다는 의미니까. 사랑은 아프지만 우리의 짧은 생을 의미 있게 만들어주지." - P365
페리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 당혹감과 놀라움이 뒤섞여 있었다. 내 눈빛도 그랬을 것이다. 수사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부터 누군가 우리를 조종하려고 했고, 그 빌어먹을 작자의 의도는 보기 좋게 성공했다. 우리는 그 작자의 손끝에 매달려 춤을 춘 꼭두각시에불과했다. "에릭 도노반이 함정에 빠졌듯이 벤자민 브래드버드 역시 덫에 걸렸어. 진짜 범인은 벤자민 브래드버드와 에릭 도노반, 엘레노어와 알래스카, 이 모두와 연결되는 인물이야." 페리가 중얼거렸다. "니콜라스 카진스키도 빼놓을 수 없죠." - P410
"내가 추리소설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잖아요. 얼마 전에 읽은 책이 완전범죄 이야기인데 정말 재미 있었어요. 한 남자가 아내를 죽여요. 그런 다음 가상의 범인을 만들어놓고 가짜 증거를 여기저기 장치해 형사들이 그 가상의 범인을 뒤쫓게 하는 거예요. 결말은 무척 잔인해요. 그 남편은 감옥행을 피해 달아나고, 그 대신 그 집의 고용인 하나가 부당하게 교도소에 갇혀요. 진짜 범인이 독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하면서 소설은 끝나요. 완벽한 살인이란 범인을 밝혀내지 못하는 범죄가 아니라 살인자가그 죄를 다른 사람에게 뒤집어씌우는 데 성공하는 거라고요." - P474
"다 잊으라고 한다면 그럴게요. 다시는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게요. 그래요. 전부 잊어요. 사랑해요. 당신을 위해서라면 난뭐든지 할 수 있어요." 그 말을 하고 나서 알래스카는 샤워를 해야겠다며 욕실로 사라졌다. 이어서 물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패트리샤는 몸이 얼어붙었다. 8월 30일 그날 밤의 기억이 물소리와함께 생생히 떠올랐다. 축 늘어진 엘레노어의 몸을 끌고 자동차로 가던 자신의 모습, 엘레노어의 휴대폰을 집어 들고 그의 어머니에게 작별 메시지를 써 보내던 자신의 모습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포틀랜드의 그 주유소에서 들었던 소리, 차 트렁크 안에서 내벽을 두드리던 그 소리가 또다시 들려오고 있었다. 트렁크를 열자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던 엘레노어의 얼굴, 몸이 우물 속으로 떨어져 부딪치던 소리, 그 모든 기억이 한꺼번에 떠올라 패트리샤를 짓눌렀다. 한동안 패트리샤는 그 모든 걸 잊을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잊을 수 없었다. 잊고 싶어도 알래스카가 진실을 모두 알고 있었다. 패트리샤는 이제 불안과 번민에 갇히고 말았다. 스물두 살 여자가 끝까지 비밀을 지켜야만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패트리샤의 자유는 알래스카의침묵에 종속되었다. 알래스카가 끝까지 비밀을 지킬 거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언젠가 두 사람이 헤어지게 된다면 그때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두 사람의 사랑이 한때의 지나간 열정이 되어버리는 날이 온다면? - P476
하지만 그때 패트리샤는 알아차렸다. 알래스카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아직 죽지 않은 것이다. 두개골에서 많은 양의 피가 흘러나왔지만 알래스카는 의식이 붙어 있었다. 알래스카의두 눈이 둥그렇게 열리며 패트리샤를 응시했다. 그 눈 속에 슬픔이 담겨 있었다. 패트리샤는 눈물이 쏟아졌다. 알래스카 곁에무릎을 꿇고 앉아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귓가에 다정한 말을속삭였다. 사랑한다고, 이제 영원히 사랑할 수 있다고 속삭였다. - P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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