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버랩 나이프, 나이프]


이것은 흔하고 흔한 이야기이다.
영화에서, 책에서, 드라마에서, 뉴스에서, 중후한목소리의 연예인이 진행하는 사회 고발 프로그램에서, 범죄 다큐멘터리에서, 우리 일상의 곳곳에서,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접했을 진부하지만 자극적이고, 안쓰럽지만 불편한 그런 이야기. - P111

"가위바위보도 삼세판인 것처럼, 기회는 딱 세번이야. 과거로 돌아갈 수 있어. 후회했던 선택을바꿀 수도 있어. 하지만 결과는 어찌 될지 몰라.
모든 것이 바뀔 수도 있지만 바뀌지 않을 수도 있지. 네가 선택해, 시간을 되돌려 줄까?"
- P124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니다.
내가 바꾸고 싶었던 것은 이런 게 아니다.

나는 그제야, 어머니의 눈과 나의 눈을 보고서야,
누구를 막고 누구를 먼저 죽이든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문제의 시발점은 그보다 더 근본적인 곳에 있었다. 이보다 훨씬 이전에. 어머니가표정을 잃기 전, 아버지가 술을 마시기 전, 아버지의 회사가 망하기 전, 그리고 우리가 행복했을 때보다 더, 더, 더 전에. 내가 태어나기 전에. 그 두 명이만나기 전에.

"이제 한 번 남았어."
귀에 익은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나는 이제진짜로,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다. 어떤 확신이들었다. 나는 목소리에게 물었다.
"내가 태어나기 전으로도 갈 수 있어?"
"당연하지."
목소리가 기다렸던 대답이란 듯이 깔깔깔 웃어댔다. - P136

옛날에,아주나쁜사람이있었어.엄마를막괴롭히고, 맨날 따라다니면서 무섭게 했어.
응. 나쁜 사람이네.

어머니를 괴롭히고, 늘 따라다니면서 그녀를 무섭게 했던 나쁜 사람이 바로 나라는 것을, 미래에서온 아들, 비극의 증거, 불행의 씨앗인 바로 나라는사실을 나는 이제야 깨달았다. 이게, 어떻게.... 시간을 되돌려 준다며 깔깔깔 웃던 목소리의 주인은 신이 아니라 악마였다.

...(중략)...

나는 절망에 몸부림쳤다. 나의 선택을 후회했다.
살면서 한 번이라도 후회하지 않는 선택을 한 적이있던가. 내 모든 선택은 후회의 연속이었고 이번 역시 그랬다. 하지만 이제 와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이번이 나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기회였다.
그 둘이 나로 인해 만나게 되었든, 나로 인해 결혼하게 되었든 이제는 상관없다. 그 원인이 나라는 것을 알았고 나는 저 둘의 미래, 그리고 나의 현재와 절망을 알고 있으니 내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하나였다. 나는 원래 계획대로 아버지를 죽일 것이다. - P148

나는 지금 찬석을 보고 있다. 정확히는 술에 취해동공이 풀린 찬석과 그가 나를 향해 쳐든 과도를 보고 있다. 그의 정신은 지금 이 집에 없다. 저 하늘이나 바다, 혹은 땅의 아주 깊숙한 곳 어딘가를 헤매고 있을 것이다.
찬석이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은 그의 회사가 폭삭망하고부터였다. 그의 아버지가 힘들게 일구었던것을 너무 쉽게 물려받은 찬석은 파도에 휩쓸리는모래성처럼 폭삭 무너지는 것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무너진 회사와, 회사의 주인인 자신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를 설레게 했던 찬석 안의 ‘좋은 사람‘도 회사와 함께 폭삭 무너져 버렸다. 그래서 그는 지금 나를 향해 과도를 들이밀고있는 것이다. 과도. 마땅히 베어야 할 것은 과일뿐이지만 지금 나를 위협하고 있는 저 과도. 나는 저것을 본 적이 있다. 아주 오래전에 나는 저 칼을 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20여 년 전, 검은 옷의 남자가 휘둘렀던 칼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성이 나간 찬석이 마구잡이로그것을 휘두르다 내 목을 그어 버린 순간, 나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검은 옷의 남자의 얼굴이 왜 아이의 얼굴인지, 나는 왜 그때 엉엉 울었는지, 아이가 왜 과거의 찬석을 죽이려고 했는지, 왜그 자신이 사라지고 말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바닥은 이미 내 목에서 뿜어져 나온 피로 흥건하다.
찬석의 표정을 보고 싶은데 고개를 들 수 없다. 멀리서 아이가 초밥이 담긴 비닐봉지를 들고 뛰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의식이 점점 흐려진다. 아이와초밥을 함께 먹지 못한 것이 미안하다. 하지만 나는이미 세 번의 기회를 다 써 버렸기 때문에 시간을되돌릴 수 없다. 수십 년 만에 머릿속에서 울리는귀에 익은 목소리는 깔깔깔, 하고 웃는다.
"결국 벌어질 일은 벌어지지. 깔깔깔."
나는 눈을 감는다.
아이가 현관을 들어오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나는 아무것도 들을 수 없다. - 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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