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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 - 노인들의 일상을 유쾌하게 담다. 실버 센류 모음집
사단법인 전국유료실버타운협회 포푸라샤 편집부 지음, 이지수 옮김 / 포레스트북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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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한 마디라도 보탤 수 있는 센스가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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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들 - #남성성 #젠더 #퀴어 #동물 #AI
피스모모 평화페미니즘연구소 기획, 김엘리 외 지음 / 서해문집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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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자 하는 말이 뭔지는 알겠는데 분단 국가의 현실에선 뜬구름 잡는 소리, 그 이상이 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설득력이 없는 제안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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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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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본격적인 시작에 앞서 밝혀둘 것이 하나 있다. 사실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온전히 다 읽은 게 이번이 처음이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노르웨이 숲은 이름만 들어봤다. 그런 점에서 내게 하루키의 작품군()은 고전에 관한 오래된 농담에 부합하는 책들이었다. 그래도 기회가 닿아 영접하게 되었으니 책을 열심히 읽었고 리뷰를 쓰기는 하나 작가 특유의 문체나 스타일에 대한 이해가 그 깊이가 얕을 수 있는 점은 양해 바란다.

 

하나의 가설

 

 이것은 하나의 가설이다. ‘'의 그림자가 도시에 관해 주고받은 내용처럼, 현실로 돌아온 나'의 그림자와 고야스 씨가 나눈 대화처럼 말이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화자인 와 도시의 이야기, 나와 그림자 그리고 도시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저들 말고도 가 사랑했던 소녀, 옐로 서브마린 소년이나 도서관에서 일했던 고야스 씨, 도서관에서 아직도 일하고 있는 소에다 씨, ‘와 서로 호감을 가진 카페 주인 등 여러 인물이 끼어들지만 주된 대상은 저렇게 셋이라 하겠다.

 

 소설의 주된 내용은 담백한 문체로 서술된 의 이야기로 정리된다. 읽으면서 소설 내내 유지된 잔잔한 문체와 분위기가 어떤 면에서는 참 이색적이었다. 평범하게 일상을 묘사하는 소설에 어울릴 법한 문체가 현실과 비현실을 아주 바쁘게 오가는 소설을 구성한다는 점이 묘하게 다가왔다. 굉장히 놀랄만한 일이 벌어져도 침착하게 고개만 끄덕이며 소우데스네(그렇군요).’라고 말하는 모습이 연상된다고 해야 하나.


 예를 들면, 귀신을 맞닥뜨린, 최소한으로 쳐도 살아있는 사람이 아닌 것과 만난 것이 분명해도 태평한 의 태도나 이 세상이 아닌 도시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도 흥분하지 않은 의 태도 등이 그렇다. 그리고 가 그림자를 데리고 도망치는 가운데도 긴장감이 그렇게 높지 않았다. 그려놓은 지도와 다르게 벽이 갑자기 솟아오를 때 들었던 위기감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위기가 쉽게 해소된 느낌이 있지만 일부러 꼽자면 그렇다는 뜻이다.

 

 슬슬 이 책에 담겨진 내용, 즉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이것은 소설이며, 소설은 작가의 의식이 눅진하게 녹아든 이야기이다. 그 의식이란 바로 주제이자 작가의 철학인 셈이다. 그래서 무엇에 관한 이야기인가? ‘작가는 무엇을 위해 이 이야기를 썼는가?’ 이에 답하려면 도시를 이야기해야만 한다. 결국 소설의 궤적과 모든 이야기가 이 둘에서부터 비롯됐기 때문이다.

 

 먼저 도시를 살펴보자. ‘인 주인공과 소녀인 의 상상을 먹고 자란 도시, 그곳은 일종의 초월적 장소로 그려진다. ‘으로 단절된 별도의 세계이며 평범한 방법으로는 도달할 수 없다. 서울에서 부산을 오가듯 갈 수는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말라붙은 운하나 영락한 지구(地區)의 모습 등 과거의 영화에서 쇠락한 인상을 주는 곳이다. 왜 이런 공간을 상상했을까? 피터 팬의 네버랜드를 연상하게 하면서도 그 성격은 판이하게 달랐다. 도시에는 후크 선장도 없고 오로지 고색창연한 분위기뿐이다.

 

 한 가지 재미난 점은 이 도시에는 시곗바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은 아니다. , 1, 1, 1시간, 24시간 이렇게 엄밀하게 나뉜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하루가 가고 시간은 흐르며 계절은 바뀌나 그 구분이 엄격하지 않다. 또한 도시의 본래 시간은 다른 곳에 있다(26).”라는 언급에서 드러나듯 거기서 흐르는 시간은 현실의 시간과 엄밀한 의미에서 같지 않다,

 

 그 도시 내부에서 눈여겨볼 만한 것이라면 도서관과 벽을 꼽겠다. 도서관은 지금은 책이 없고 계란처럼 생긴 오래된 꿈이 쌓여 있으며 꿈을 읽는 가 매일 꿈을 읽는 곳이다. ‘오래된 꿈이 무엇인지는 내용상 명확하게 드러나지는 않으나 의 그림자가 말한 역병의 씨앗과 옐로 서브마린 소년이 말한 영혼이 앓는 역병을 통해 도시에 바람직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도시를 에워싸고 있는 벽은 경계이자 스스로 살아있는 것 같다. 그저 돌을 쌓아 만든 구조물이 아닌 하나의 존재처럼 여겨진다. 비록 문이 있어서 짐승들이 드나들기 때문에 바깥과 도시의 완벽한 격리를 뜻하지는 않아도 도시와 외부를 가르는 존재다. 도시를 둘러싸고 있어서 그런지 꼭 그 시간마저 가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생명까지는 아니더라도 의지를 암시하는 대목이 몇 개 있었을 만큼 단순한 물리적 대상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한 사람의 독자로서 나는 도시와 벽이 갖는 공간적 특성에 주목하고자 한다. 외부와 단절되어 있으나 그로 인해 갖는 내적 완결성이 있으나 단절은 아니다. 짐승들을 내보내야 하는 문처럼 바깥과 애매한 형태로 어떻게든 연결이 되어 있다. 짐승 말고도 문을 관리하는 문지기 그리고 외부로 나가는 길인 웅덩이를 볼 때 절대로 닫힌 공간은 아니다. 사실 이렇게 외부와 단절된 것처럼 보이는 공간이 작품에서 또 등장하는데 도서관에 딸린 외딴방이 그렇다.

 

 그곳에서 의 그림자는 이미 그림자를 잃은, 죽어버렸으나 어떻게 이승에 남아있는 고야스 씨와 대화를 나눈다. 그 외딴방은 현실에서는 있기 어려운 일이 일어나는 비현실적인 공간이며 평상시에는 두터운 철문으로 외부와 단절되어 있다. 그러나 열쇠로 문을 열고 안에 들어가면 그 순간 외부와 연결되는 공간이 되면서 비현실적인 기능을 하는 장소가 된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 그 언저리로 기능한다. , 도서관의 외딴 방과 벽이 다른 점이라면 후자는 그 상상력이 아주 굳건해서 스스로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진다는 사실이겠다.


 그럼 소설의 주인공이라 할 만한 는 또 어떤 존재인가? 진짜 소녀를 찾아 도시로 간 남자, 자신의 그림자를 구해준 사람이자 변하지 않는 도시에 남아 꿈을 읽던 그 사내, 옐로 서브마린 소년과 만나 마지막에는 결국 현실로 돌아온다는 암시를 주는 이 사내는 무엇일까? 그러나 현실파트인 2부에서는 보다도 의 그림자가 겪은 일들이 메인이다. 소녀를 쫓아간 의 행적은 도서관에서 한동안 머무는 동안은 진전이 없다고 봐도 무방한 탓이리라.

 

 ‘가 도시에 머무는 동안 의 그림자는 그의 대역을 더없이 충실하게 수행한다. 인지를 넘어선 무언가가 인도하듯 후쿠시마 현의 외딴 도서관에서 일하게 되고 고야스 씨를 만났다, 그러다 옐로 서브마린 소년을 만나 도시에 관한 정보를 전해준다. 그걸 의도하지는 않았겠으나 이 일로 가 돌아오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이 모든 일이 치밀한 계산과 빈틈없는 계획 하에 이루어진 일은 아니지만 조금씩 서로 맞물려 있기는 하다. 추측은 여기까지 하고 의 존재를 곱씹어보자.

 

 ‘는 소녀를 사랑한 존재, 이게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가 소녀를 사랑해서 도시를 찾아간 데서부터 모든 이야기가 싹을 트기에 그러하다. 다만 의 귀환을 두고 의문점이 들 수는 있겠다. 온전한 소녀를 만나 도시에서 매일을 보내는 는 왜 현실로 되돌아와야 했나? 현실에 버젓이 가족이 존재하는 소년과 그 자리를 맞바꿔서라도 가 변함없는 도시를 벗어나 현실로 돌아와야 하는 당위는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소년이 현실 세계와 마음이 이어져 있지 않다(535)”고 하는 것만으로 충분한가? 소설의 주제와 메시지는 여기에 있으리라.

 

 멈춰버린 도시가 갖는 의미, 변하지 않는 것들, 진전이 없는 관계, 마치 성장이 멈춰버린 아이를 보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이게 맞나? 흐르지 않는 삶은 무엇인가? 만약 소설의 처럼 한 장소를 골라 존재해야 한다면 어디를 선택해야 할까. 리뷰를 쓰는 나는 작가가 현실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고 봤다. 양팔 저울이 있다면 한 쪽을 무라카미 하루키가 지그시 누르는 정도일 것이다.

 

 왜냐면 변하지 않는 세계라는 것이 근원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게 내용에서 포착되었기에 그렇다. ‘역병의 근원으로 여겨지는 오래된 꿈의 존재, 지속적으로 쌓이는 생명력을 배출해야만 하는 것처럼 보이는 도시의 숙명, 색채나 정감이 묘사된 적은 없으나 한없이 무채색에 가까워 보이는 세계, 어쩌면 변화를 버린 대신 그 도시는 영원성처럼 보이는 무언가를 얻었는지도 모른다. 그마저도 완벽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왜 완벽하지 않은가? 도시의 모습을 보면 그렇다.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에 한정되어 반복적인 일상만이 전부인 그곳, 반복을 위해 변화와 흐름을 져버린 그곳, 어째서 그 공간이 세상과 벽으로 구분되어 있고 특별한 방법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가, 그것은 그 장소가 가짜라서 그렇다. ‘소녀는 어떤가? 진작 그림자를 버리고 온전한 상태로 도시에 남은 그녀지만 나에게 사랑을 속삭이지도 마음을 전하지도 못한다. 그저 차만 끓여주고 집에 갈 때 함께 돌아가는 정도, 얼굴을 붉히는 게 한계다. 만나기만 할 뿐 관계의 진전은 없다. 정확하게는 가 바라는 만큼 진전되지는 않는다.

 

 10대에 만나 소녀를 향한 사랑을 가슴에 품었으나 그 끝은 느닷없는 이별, 허탈할 만큼 결말이 갑작스러웠다. 사람이 이루지 못한 꿈에 매달리듯, ‘는 계속해서 마음속의 소녀를 간직한다. 삶이 고독하고 차가워져도 그 마음만은 잊지 못한다. 그런 탓인지는 몰라도 10대를 훌쩍 넘긴 나이에 다시 소녀와 마주하게 된다. 물론 현실이 아닌, 높은 벽 안의 도시에서지만 말이다. 재회하나 결국은 헤어지게 되는 결과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변화해야함을 뜻하는가?

 

 10대에 끊어진 인연은 거기에 두고 돌아오라는 것처럼 읽혔다. 그때의 상상이 낳은 산물인 도시를 결국 떠나게 되는 장면이 작품의 마지막인 건 절대 우연이 아니었다고 본다. 가슴속에 간직하고 오랫동안 떨쳐버리지 못한 감정을 놓아주는 순간, ‘에게는 소녀가 오래된 꿈이었다. 현실에서 카페 주인과의 사랑을 이어가든 아니면 다른 사람과 관계를 새로이 쌓아가든, 어느 쪽이 되었든 를 사랑했던 과거와는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결론은 작가가 변화하는 세계를 긍정하는 방향처럼 보인다. ‘가 고열에 시달릴 때 곁에서 자리를 지켜준 노인이 들려준 일화나 책의 말미에 실린 작가의 말, 진실은 부단히 이동하는 형체 안에 있다는 문장이 내 안에서 자꾸만 되살아난다. , 어조가 강하지 않아서 나조차도 확신은 들지 않는다. 싫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여야만 해!’라는 강한 주장도 좋으나 가끔은 ‘~도 괜찮지 않아?’같은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날도 있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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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함락 1945 걸작 논픽션 26
앤터니 비버 지음, 이두영 옮김, 권성욱 감수 / 글항아리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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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는 가끔 너무도 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이 있다. 떠올리고 답을 하려고 하면 계속해서 꼬리를 물고 새 질문을 낳는 그런 종류의 질문 말이다. 분명히 답을 찾으려고 질문을 던지는데 오히려 더 깊은 생각의 소용돌이로 사람을 들이미는 문제들, 사람마다 그런 질문은 각양각색이겠으나 내게는 전쟁은 무엇인가?’가 그렇다.


 전쟁, 거의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이 행동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끊이지 않고 있다. 앤터니 비버의 저서 󰡔베를린 함락 1945󰡕도 인류사에 숱했던 전쟁 중 꽤 굵직했던 하나를 다루는 책이다. ‘2차 세계대전그중에서도 독일과 소련 사이의 전쟁인 독소전의 마지막 순간인 베를린 전투를 서술하고 있다.


 ‘독소전은 듣는 이들에게 많은 이미지를 환기하게 한다. 독일과 소련의 운명을 건 전쟁이자 사상 최대의 기갑전이 벌어지기도 했으며 어마어마한 머릿수와 자원이 동원된 물량전이었다. 파죽지세로 소련의 영토를 유린하던 독일군이 막힌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기억, 소련이 간직한 강인한 인민의 의지로 사악한 파시스트 국가를 무너트렸다는 자부심등등, 헤아리면 끝이 없을 정도다.


 또한 독소전’의 승리는 소련이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대국으로 발돋움한 순간이자 냉전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사건이기도 했다. 소련과 그 뒤를 이은 러시아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사건으로 취급하는지 우크라이나와 전쟁이 한창인 올해에도 러시아가 전승기념 행사는 빼놓지 않았다. 비록 그 행사가 예전에 비하면 한없이 초라해져서 빈축을 사기도 했으나 그 정도로 러시아가 그 날짜를 기억하고자 하는 욕구는 강렬했던 셈이다.


 앞서 언급했던 이미지는 켜켜이 쌓여가며 독소전을 둘러싼 하나의 단단한 상(), 내가 신화라고 부르는 형태로 굳어졌다. 이 전쟁을 향한 세간의 시선이 나치 독일에 맞선 소련의 승리’, ‘엄청난 인민의 희생을 대가로 일구어낸 소련의 승리정도로 널리 퍼져있는 게 크게 이상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보자면 베를린이 함락된 일은 나치 독일의 심장에 소련이 깊게 총칼을 꽂은 승리였고 전체적인 양상에서 보면 그게 많이 어긋난 해석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베를린 함락을 조명하면서 살짝 다른 접근법을 구사했다.


 저자는 각종 기록을 동원해서 19454월부터 5월까지 마치 하늘에서 현미경을 들이대듯 전쟁의 양상을 복원코자 시도했다. 비록 19454~5월에 집중되어 독소전의 전체적인 양상을 파악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베를린 함락이라는 장면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 결과물로 이해하면 수긍이 간다. 현미경을 통해 바라본 전쟁, 베를린의 함락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둘러싼 순간들은 매혹적이면서도 이 전쟁에 관한 일차원적 해석에 금이 가게 만든다.


 나는 이를 신화를 해체하는 작업으로 보았고 그 신화란 바로 베를린 함락을 포함한 독소전이었다. 책에 묘사된 독일과 소련의 행보, 특히 베를린을 함락하기 위해 진격하는 소련을 서술한 지면 중 상당수는 소련군의 광폭한 행보를 전달하는데 쓰고 있다. 그 행보를 하나하나 뜯어보자면 아래와 같다.


 우선 전선에 나선 병사들의 약탈과 강간 등 범죄에 가까운 행동들이 있었다. 독일군 점령지를 해방시키며 소련군이 자행한 파괴와 약탈 그리고 강간은 독일을 향한 복수라는 이름으로 합리화됐다. ‘전쟁이라면 어쩔 수 없지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겠으나 이는 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자신의 순결을 소련군에게 잃을 게 두려워 독일인 아무에게나 순결을 먼저 주려는 이들이 있다는 대목에서는 살짝 정신이 멍해질 정도였다. 저자가 복원한 당시의 현실은 어쩔 수 없다라고 둘러대기엔 그 범주를 아득히 넘어 있었다. 머리말 즈음에서 저자가 겪었던 곤혹이 이해가 갈 정도였다.


 주코프와 코네프의 베를린 레이스 경쟁도 빼놓을 수 없다. 휘하 장군들을 부추기는 걸 스탈린은 이제 전리품에 지나지 않을 베를린 점령을 절대 연합군에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이 시점에 이르면 이미 독일군에게 전세를 역전할 병력도 무기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쟁은 대등한 싸움의 순간을 지나 연합군의 일방적 공세로 바뀌었다. 얄타에서 열린 회담, 그 만찬 장면은 그걸 명시적으로 드러낸 순간이었다. 동쪽에서는 그 공세를 소련군이 주도했다.


 두 장군이 벌인 이 레이스는 몇 가지 복합적인 목적 하에서 실시됐는데 그중 하나는 독일의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를 연합군보다 먼저 점령하는 일이었다. 미국에서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했으니 소련으로서는 향후 국제 관계에서 미국에게 압도당하지 않으려면 자국도 핵무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독일의 원자력 연구 시설인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를 손에 넣을 필요가 있었다. 한치 앞이 어두운 전후 세계에서 소련은 원자폭탄이라는 강력한 카드를 포기할 이유가 없었다.


 추가적으로 해방된 지역에서 소련의 행보도 언급하고자 한다. 동유럽에서 나치의 세력을 분쇄하며 쇄돌 하던 소련도 폴란드에서 일어난 바르샤바 봉기는 나치에게 진압되도록 내버려두는 등 이중적인 행보를 보인다. 소련군에서 싸우다 독일군에 포로로 잡혀 수용소에서 고생하던 이들이 풀려났을 때도 어떤 이들은 처형을 당하는 등 생존자 가운데서도 솎아내는 행동을 보여주기도 했다. 소련군에게 해방은 선택적이었던 셈이다.


 상기한 일선 병사 개개인의 행동, 소련군 수뇌부나 장군 등 각 층위에 따라 나타난 다양한 행동을 기록에 따라 복원하고 분석하는 동안 소련이 이룬 신화적 위업에 서서히 균열이 생겼다. 최전선과 점령지에서는 약탈과 강간, 처형이 끊이지를 않았고 스탈린을 포함한 수뇌부는 독일이라는 전리품을 최대한 온전하게 독차지하려고 고민 중이었다. ‘인민의 고결한 승리는 욕망이 뒤섞여 혼탁해졌고 순수한 이념은 오로지 스탈린과 소련에 충성하는 이들만 선별하면서 일그러지고 있었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점은 저자가 오로지 소련에 비판적인 촉을 세워 나치를 두둔하거나 그러지는 않는다는 부분이다. 저자가 작동시킨 현미경은 소련이든 나치 독일이든 공평하게 적용된다. 그 점에 있어서 뛰어날 정도로 균형을 잘 유지한 편이다. 책을 마무리 짓는 문장에서 나치 정권의 무능함을 콕 집어 비판하는 것은 물론 독일 민간인이 당한 피해도 책 내내 자세히 서술한다. 거기에 무덤덤하게 반응하는 나치 정권은 덤이다.


 시시각각 소련군의 위협에 노출되는 독일 민간인에 비해 안전하게 있는 이들인 황금 꿩’, 벙커에 틀어박힌 히틀러를 위시한 나치 수뇌부의 행태는 독자들에게 한 나라, 한 제국을 이끌던 이들의 실상이 어떤 수준인지 적나라하게 다가온다. 실전에 관한 지식은 조금도 없으면서 지시를 내리는 힘러나 의미 없이 죽은 표어만 외치는 괴벨스 그리고 자신의 책임이 가장 막중할 때 독일 국민을 버리고 혼자 피안의 세계로 달아난 히틀러, 비겁하고 비열한 위정자들의 온갖 군상이 벙커 안에 전시되어 있었다.


 기갑과 인민의 파도가 베를린을 향해 오는 동안 독일 국민은 징집되어 판처파우스트를 매단 자전거를 몰다가 죽거나 아니면 겁쟁이란 이름하에 처형당한다. 권력자들은 그들에 대한 책임을 져버렸고 적군인 소련군은 자비가 없었다. 현미경 속에서 비참하게 무너지는 독일인의 모습은 나치 정권의 패배를 넘어서 독일이 맞닥뜨린 재앙처럼 느껴졌다. 이마저도 나치 수뇌부가 빠른 협상과 항복이라도 했다면 그나마 억제되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 정도로 나치는 그들이 짊어진 것에 대한 책임감이 없었다.


 정리하자면 소련군이 독일군을 무너트리면서 점령한 지역에서 약탈과 강도, 강간을 일삼는 동안 나치 정권의 수뇌부는 놀라울 정도로 그들의 책임을 방기했다. 소련군이 베를린으로 향하는 동안 주코프를 젤로 고지에서 고생하게 만든 일을 빼면 독일군이 거둔 전과는 미미했다. 히틀러의 망상과는 다르게 독일은 무너졌다. 사람들이 익히 아는 사실도 그랬다. 그러나 이 책에는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다. 단순하게 승자패자’, 승자의 영광과 패자의 굴욕만이 남지는 않았다.


 이를 더 살피기 위해서는 앞서 몇 차례 내가 언급한 신화의 해체가 가져오는 효과는 무엇인지를 짚고 넘어가야만 한다. 저자가 시도한 복원을 통해서 독자들은 전쟁의 양상 속에 나타나는 인간의 천태만상과 마주한다. 그곳에는 승리와 패배로만 가르기는 어려운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생존, 파괴, 죽음, 약탈, 도망 등등의 행태가 양쪽에서 쏟아져 나왔다. 해방된 지역에서도 소련군의 손에 처형당하는 이들이 있었고 독일 피난민은 나치에게도 버림받았다.


 여러 기록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보다 자세히 서술하는 작업의 강점은 이처럼 커다란 사건에 휩쓸려 간과하기 쉬운 개개인의 시선을 복원하는 데 있다. 책의 내용에도 여러 번, 마치 저자가 대놓고 이야기하듯 승전국, 패전국으로만 가르기에는 거기에도 너무나 많은 층위들이 있었다. 일선에서 약탈을 하는 소련 병사, 베를린 점령에 매진하는 주코프, 모든 것을 뒤에서 총괄한 스탈린, 세 주체의 의도와 시선, 행동의 원리는 모두 달랐다. 이는 독일도 마찬가지였다. 징집된 국민돌격대와 얼마 남지 않은 독일군, 벙커에 숨어든 나치 수뇌부도 모두 동상이몽이었다.


 혹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다층적인 차원에서 역사를 서술하는 일이 어떤 의미가 있느냐?’, 충분히 나올 수 있는 의문이다. 나 역시도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의미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한 바 있었다. 내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본질적인 의미에서 이것이 역사 서술이 갖는 목적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너무 거창한 것처럼 여겨지면 예를 들어보자. ‘독소전의 전체적인 양상을 파악하는 데는 몇 장의 지도와 독일, 소련의 최고 사령부의 판단, 몇 가지 중요한 전투의 결과 정도면 충분하다. 그러나 그런 분석에는 정작 전투에 참가한 사람들과 그 결과에 휩쓸린 이들은 포함되지 않는다. 사람의 역사를 서술함에도 중요한 사람은 포함되지 않는, 모순적인 상황을 직면하게 된다. 마치 비석에 몇 줄 새기고 만 것처럼 기록 자체가 빈약해진다.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휘말렸고 그 기록이 남아있는데도 그들에 관해 적지 않는 것은 일종의 도피라고 본다.


 또한 전쟁에 관해서 기록할 때는 어떻게 일어났고 진행됐는가?’ 만큼이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휘말렸는가?’도 중요하다. 후자를 등한시하면 전쟁이 가져오는 파국을 무시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결국 약자가 휩쓸리는 전쟁의 부작용에 관해서도 쉽게 생각하게 된다. 아직도 세상에 끊이지 않는 전란에서 가슴 아픈 사연을 보면 꼭 부녀자가 포함되어 있는 이유를 생각해봐야 한다.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은 역사적인 순간들을 세세하게 복원하는 일은 사례가 드문 편이고 또한 쉬운 작업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힘이 닿는 한, 가능한 한은 반드시 이 책과 같은 역사 서술은 필요한 작업이며 앞으로도 이어졌으면 한다. ‘역사 서술에 관한 내 시선이 틀릴 수는 있겠으나 적어도 역사가 사람들의 삶을 추려 적는 작업이라는 점이 변하지 않는다면 나는 이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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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핏 쇼 워싱턴 포
M. W. 크레이븐 지음, 김해온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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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 추리소설의 내게 구성요소를 묻는다면 나는 주인공, 사건, 범인이라고 답하겠다. 그리고 소설의 완성도는 저 세 가지 요소가 얼마나 잘 맞물리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퍼핏 쇼"는 독자에게 만족스러운 경험을 제공한다. 워싱턴 포는 매력적인 주인공이며 이몰레이션 맨(이제 이맨으로 부르겠다.)이 저지르는 사건은 끔찍하면서도 호기심을 자극한다. 켜켜이 쌓인 수수께끼의 너머에 있는 범인의 존재는 이 소설의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데 핵심적이다. 다만, 내게는 조금 아쉬운 작품인데 그 이유는 천천히 후술하겠다.


 우선은 만족스러운 경험, 이것부터 이야기해보자. 이 소설은 재미있다. 중심이 되는 사건은 연쇄살인, 불탄 시신, 자극적인 별명 등 소설의 소재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별로 수사가 진척이 없자 포의 귀에까지 소식이 닿게 되고 그가 수사에 발을 걸치면서 하나씩 드러나는 과거의 흔적들은 독자에게 다음 장을 넘기도록 떠민다. 안개에 덮였던 과거가 조금씩 형체를 드러낼수록 읽는 사람은 그 추악함에 미간을 찌푸렸으리라. 작가의 기량은 여기서 빛을 발했다.


 퍼즐의 가장 중요한 조각을 남겨두고 어렴풋이 과거의 진상과 유력자의 탈을 썼던 추악한 이들의 면모가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누가 범인이지?’, ‘누가 사람들을 죽였지?’ 궁금증이 쌓이고 쌓여 폭발할 즈음 포의 입에서 진범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마지막 조각이 작은 폭발음을 냈다. 어려워서 풀기 힘든 문제를 두고 진땀을 빼다가 답을 찾았을 때 .’하고 짧은 탄식이 나오던 경험, 이걸 추리소설을 읽게 되면서 할 줄은 미처 몰랐다. 범인이 주인공의 주변 인물인 경우는 왕왕 있어도 그것도 경찰, 같이 일한 경험이 있는 경찰이 범인이라니?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격이었다.

 

 더 놀라운 점은 킬리언 리드, 어린 시절에는 다른 이름이었던 그의 집념이었다. 번역자 말대로 ‘X 같은 패를 쥔 탓에 어렸을 적부터 고생만 하다 삶이 좀 나아지려니까 돈 많은 변태들 손에 걸렸던 그, 죽을 고비를 넘기고 그를 돌봐줄 안식처를 찾았으나 증오는 그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친구들을 죽였던 인간과 마주치자 그뿐만 아니라 공범들도 모조리 없애려고 결정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해냈다. 포의 힘까지 이용해서 공범을 색출하고 청소했다. 마지막에 그가 살아남았는지 아닌지 그건 좀 불투명하더라도 복수라는 행위만 놓고 보면 그는 할 일을 다 한 셈이다.


 내가 아쉽게 느낀 부분은 사실 여기에 있었다. ‘워싱턴 포킬리언 리드’, 한쪽은 쫓고 한쪽은 잡히는 둘의 관계가 이 소설에서는 기이할 정도로 가깝게 묘사된다. 포가 리드의 정체를 알아냈음에도 친구라는 표현도 등장했고 후반부에 폭발하기 직전 집에서 리드와 포가 대치하는 장면에서 적대감이라고는 너무도 옅다. 과거에 같은 직장에서 일한 바 있고 이맨을 쫓는 수사에서도 둘이 행동을 함께한 적이 있기는 해도 본질상 경찰범인인 둘의 관계가 이토록 가깝게 그려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둘이 마치 쌍둥이처럼 비슷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포가 정직 처분을 받은 사건과 본편의 사건, 둘이 갖는 공통점이 내게 그런 생각을 품게 했다. 양자 모두 과 같은 사회적 제도 내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포는 어떤 사건의 피해자 가족에게 용의자의 인적사항을 알리는 짓을 했고 리드는 과거의 추잡한 일당들을 직접 심판했다. ‘옳은가? 옳지 않은가?’, 이걸 판단하는 게 나로서는 정말 어려웠다. 읽다가도 머릿속이 복잡해져서 일부러 뒷장으로 넘어가던 기억도 난다.


 ‘살인은 용서받을 수 없다.’, ‘무슨 일이 있어도 법적인 절차를 지켜야 한다.’라는 점에서는 포와 리드 모두 비슷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고 봐야 한다. 단지 질은 리드가 훨씬 악질이긴 하다. 그러나 작품 내내 리드의 행동을 곡해하고 비틀어서 해석하는 건 오직 언론뿐이었다. 포는 말로 리드를 두둔하거나 하지는 않아도 장례식까지 참석한 것으로 보아 아예 마음에서 지워버리거나 하지는 않는다. 이 소설에서 내가 위화감이 드는 부분이 있었다면 이런 순간들이었다. 범인과 경찰 사이에서 느껴지는 이 친밀함,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범인이 무조건 상종도 못 할 악인처럼 그려지는 게 낡은 방식이라는 소리를 누군가는 할 수도 있다. 악인이 더 사악한 일당을 퇴치할 수도 있다. 그래도 최소한 사건의 범인과 그걸 밝혀낸 사람 사이에는 더 확실한 거리감이 있어야 했었다는 게 내 감상이다. 본편에서 이렇게 끝나다 보니 혹시 포가 출생의 비밀에 관한 사실을 더 알게 되고 나면 리드처럼 변하는 건 아닐까? 그런 상상까지 하곤 했다.


 어쩌면 리드는 미래의 포일 수도 있겠다. 물론 지금 시점에서 속단하기는 이르고 포가 리드처럼, 과거의 자기를 둘러싼 충격적인 사실들을 직면하는 한이 있더라고 리드와는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다. 이건 시리즈가 진행되면서 밝혀질 부분이니 현재로서는 마침표를 찍기보다 다음에 이어질 내용을 기다리는 게 순서에 옳다고 보겠다. 마치 평행선처럼 리드와 포는 가까이 있어도 만나지 않을 수도 있다.


 중언부언 쓰느라 포의 곁에서 수사에 큰 보탬이 된 틸리 브래드쇼에 관해서는 정작 몇 마디를 못 한 게 아쉽다. 책상물림에서 진흙 괴물까지, 이 사건은 브래드쇼 본인의 성장 이야기이기도 하겠다. 나는 리드와 포의 서사에 압도되어 둘의 이야기만 눈에 들어왔지만 말이다. 짧고 굵게 마지막 문장을 적자면 독자들을 계속 다음 장으로 떠미는, 그런 흡입력을 가진 책이었다. 부디 남은 시리즈도 정식으로 발매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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