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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함락 1945 ㅣ 걸작 논픽션 26
앤터니 비버 지음, 이두영 옮김, 권성욱 감수 / 글항아리 / 2023년 8월
평점 :
세상에는 가끔 너무도 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이 있다. 떠올리고 답을 하려고 하면 계속해서 꼬리를 물고 새 질문을 낳는 그런 종류의 질문 말이다. 분명히 답을 찾으려고 질문을 던지는데 오히려 더 깊은 생각의 소용돌이로 사람을 들이미는 문제들, 사람마다 그런 질문은 각양각색이겠으나 내게는 ‘전쟁은 무엇인가?’가 그렇다.
전쟁, 거의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이 행동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끊이지 않고 있다. 앤터니 비버의 저서 베를린 함락 1945도 인류사에 숱했던 전쟁 중 꽤 굵직했던 하나를 다루는 책이다. ‘제2차 세계대전’ 그중에서도 독일과 소련 사이의 전쟁인 ‘독소전’의 마지막 순간인 ‘베를린 전투’를 서술하고 있다.
‘독소전’은 듣는 이들에게 많은 이미지를 환기하게 한다. 독일과 소련의 운명을 건 전쟁이자 사상 최대의 기갑전이 벌어지기도 했으며 어마어마한 머릿수와 자원이 동원된 물량전이었다. 파죽지세로 소련의 영토를 유린하던 독일군이 막힌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기억, 소련이 간직한 ‘강인한 인민의 의지로 사악한 파시스트 국가를 무너트렸다는 자부심’ 등등, 헤아리면 끝이 없을 정도다.
또한 ‘독소전’의 승리는 소련이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대국으로 발돋움한 순간이자 냉전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사건이기도 했다. 소련과 그 뒤를 이은 러시아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사건으로 취급하는지 우크라이나와 전쟁이 한창인 올해에도 러시아가 전승기념 행사는 빼놓지 않았다. 비록 그 행사가 예전에 비하면 한없이 초라해져서 빈축을 사기도 했으나 그 정도로 러시아가 그 날짜를 기억하고자 하는 욕구는 강렬했던 셈이다.
앞서 언급했던 이미지는 켜켜이 쌓여가며 독소전을 둘러싼 하나의 단단한 상(像), 내가 ‘신화’라고 부르는 형태로 굳어졌다. 이 전쟁을 향한 세간의 시선이 ‘나치 독일에 맞선 소련의 승리’, ‘엄청난 인민의 희생을 대가로 일구어낸 소련의 승리’ 정도로 널리 퍼져있는 게 크게 이상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보자면 베를린이 함락된 일은 ‘나치 독일의 심장에 소련이 깊게 총칼을 꽂은 승리’였고 전체적인 양상에서 보면 그게 많이 어긋난 해석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베를린 함락을 조명하면서 살짝 다른 접근법을 구사했다.
저자는 각종 기록을 동원해서 1945년 4월부터 5월까지 마치 하늘에서 현미경을 들이대듯 전쟁의 양상을 복원코자 시도했다. 비록 1945년 4~5월에 집중되어 독소전의 전체적인 양상을 파악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베를린 함락’이라는 장면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 결과물로 이해하면 수긍이 간다. 현미경을 통해 바라본 전쟁, 베를린의 함락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둘러싼 순간들은 매혹적이면서도 이 전쟁에 관한 일차원적 해석에 금이 가게 만든다.
나는 이를 ‘신화’를 해체하는 작업으로 보았고 그 신화란 바로 베를린 함락을 포함한 ‘독소전’이었다. 책에 묘사된 독일과 소련의 행보, 특히 베를린을 함락하기 위해 진격하는 소련을 서술한 지면 중 상당수는 소련군의 광폭한 행보를 전달하는데 쓰고 있다. 그 행보를 하나하나 뜯어보자면 아래와 같다.
우선 전선에 나선 병사들의 약탈과 강간 등 범죄에 가까운 행동들이 있었다. 독일군 점령지를 ‘해방’시키며 소련군이 자행한 파괴와 약탈 그리고 강간은 ‘독일을 향한 복수’라는 이름으로 합리화됐다. ‘전쟁이라면 어쩔 수 없지’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겠으나 이는 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자신의 순결을 소련군에게 잃을 게 두려워 독일인 아무에게나 순결을 먼저 주려는 이들이 있다는 대목에서는 살짝 정신이 멍해질 정도였다. 저자가 복원한 당시의 현실은 ‘어쩔 수 없다’라고 둘러대기엔 그 범주를 아득히 넘어 있었다. 머리말 즈음에서 저자가 겪었던 곤혹이 이해가 갈 정도였다.
주코프와 코네프의 베를린 레이스 경쟁도 빼놓을 수 없다. 휘하 장군들을 부추기는 걸 스탈린은 이제 전리품에 지나지 않을 베를린 점령을 절대 연합군에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이 시점에 이르면 이미 독일군에게 전세를 역전할 병력도 무기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쟁은 대등한 싸움의 순간을 지나 연합군의 일방적 공세로 바뀌었다. 얄타에서 열린 회담, 그 만찬 장면은 그걸 명시적으로 드러낸 순간이었다. 동쪽에서는 그 공세를 소련군이 주도했다.
두 장군이 벌인 이 ‘레이스’는 몇 가지 복합적인 목적 하에서 실시됐는데 그중 하나는 독일의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를 연합군보다 먼저 점령하는 일이었다. 미국에서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했으니 소련으로서는 향후 국제 관계에서 미국에게 압도당하지 않으려면 자국도 핵무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독일의 원자력 연구 시설인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를 손에 넣을 필요가 있었다. 한치 앞이 어두운 전후 세계에서 소련은 원자폭탄이라는 강력한 카드를 포기할 이유가 없었다.
추가적으로 ‘해방’된 지역에서 소련의 행보도 언급하고자 한다. 동유럽에서 나치의 세력을 분쇄하며 쇄돌 하던 소련도 폴란드에서 일어난 바르샤바 봉기는 나치에게 진압되도록 내버려두는 등 이중적인 행보를 보인다. 소련군에서 싸우다 독일군에 포로로 잡혀 수용소에서 고생하던 이들이 풀려났을 때도 어떤 이들은 처형을 당하는 등 생존자 가운데서도 솎아내는 행동을 보여주기도 했다. 소련군에게 ‘해방’은 선택적이었던 셈이다.
상기한 일선 병사 개개인의 행동, 소련군 수뇌부나 장군 등 각 층위에 따라 나타난 다양한 행동을 기록에 따라 복원하고 분석하는 동안 소련이 이룬 신화적 위업에 서서히 균열이 생겼다. 최전선과 점령지에서는 약탈과 강간, 처형이 끊이지를 않았고 스탈린을 포함한 수뇌부는 ‘독일’이라는 전리품을 최대한 온전하게 독차지하려고 고민 중이었다. ‘인민의 고결한 승리’는 욕망이 뒤섞여 혼탁해졌고 ‘순수한 이념’은 오로지 스탈린과 소련에 충성하는 이들만 선별하면서 일그러지고 있었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점은 저자가 오로지 소련에 비판적인 촉을 세워 나치를 두둔하거나 그러지는 않는다는 부분이다. 저자가 작동시킨 현미경은 소련이든 나치 독일이든 공평하게 적용된다. 그 점에 있어서 뛰어날 정도로 균형을 잘 유지한 편이다. 책을 마무리 짓는 문장에서 ‘나치 정권의 무능함’을 콕 집어 비판하는 것은 물론 독일 민간인이 당한 피해도 책 내내 자세히 서술한다. 거기에 무덤덤하게 반응하는 나치 정권은 덤이다.
시시각각 소련군의 위협에 노출되는 독일 민간인에 비해 안전하게 있는 이들인 ‘황금 꿩’, 벙커에 틀어박힌 히틀러를 위시한 나치 수뇌부의 행태는 독자들에게 한 나라, 한 제국을 이끌던 이들의 실상이 어떤 수준인지 적나라하게 다가온다. 실전에 관한 지식은 조금도 없으면서 지시를 내리는 힘러나 의미 없이 ‘죽은 표어’만 외치는 괴벨스 그리고 자신의 책임이 가장 막중할 때 독일 국민을 버리고 혼자 피안의 세계로 달아난 히틀러, 비겁하고 비열한 위정자들의 온갖 군상이 벙커 안에 전시되어 있었다.
기갑과 인민의 파도가 베를린을 향해 오는 동안 독일 국민은 징집되어 판처파우스트를 매단 자전거를 몰다가 죽거나 아니면 겁쟁이란 이름하에 처형당한다. 권력자들은 그들에 대한 책임을 져버렸고 적군인 소련군은 자비가 없었다. 현미경 속에서 비참하게 무너지는 독일인의 모습은 ‘나치 정권의 패배’를 넘어서 독일이 맞닥뜨린 재앙처럼 느껴졌다. 이마저도 나치 수뇌부가 빠른 협상과 항복이라도 했다면 그나마 억제되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 정도로 나치는 그들이 짊어진 것에 대한 책임감이 없었다.
정리하자면 소련군이 독일군을 무너트리면서 점령한 지역에서 약탈과 강도, 강간을 일삼는 동안 나치 정권의 수뇌부는 놀라울 정도로 그들의 책임을 방기했다. 소련군이 베를린으로 향하는 동안 주코프를 젤로 고지에서 고생하게 만든 일을 빼면 독일군이 거둔 전과는 미미했다. 히틀러의 망상과는 다르게 독일은 무너졌다. 사람들이 익히 아는 사실도 그랬다. 그러나 이 책에는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다. 단순하게 ‘승자’와 ‘패자’, 승자의 영광과 패자의 굴욕만이 남지는 않았다.
이를 더 살피기 위해서는 앞서 몇 차례 내가 언급한 ‘신화의 해체’가 가져오는 효과는 무엇인지를 짚고 넘어가야만 한다. 저자가 시도한 복원을 통해서 독자들은 전쟁의 양상 속에 나타나는 인간의 천태만상과 마주한다. 그곳에는 승리와 패배로만 가르기는 어려운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생존, 파괴, 죽음, 약탈, 도망 등등의 행태가 양쪽에서 쏟아져 나왔다. 해방된 지역에서도 소련군의 손에 처형당하는 이들이 있었고 독일 피난민은 나치에게도 버림받았다.
여러 기록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보다 자세히 서술하는 작업의 강점은 이처럼 커다란 사건에 휩쓸려 간과하기 쉬운 개개인의 시선을 복원하는 데 있다. 책의 내용에도 여러 번, 마치 저자가 대놓고 이야기하듯 승전국, 패전국으로만 가르기에는 거기에도 너무나 많은 층위들이 있었다. 일선에서 약탈을 하는 소련 병사, 베를린 점령에 매진하는 주코프, 모든 것을 뒤에서 총괄한 스탈린, 세 주체의 의도와 시선, 행동의 원리는 모두 달랐다. 이는 독일도 마찬가지였다. 징집된 국민돌격대와 얼마 남지 않은 독일군, 벙커에 숨어든 나치 수뇌부도 모두 동상이몽이었다.
혹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다층적인 차원에서 역사를 서술하는 일이 어떤 의미가 있느냐?’, 충분히 나올 수 있는 의문이다. 나 역시도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의미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한 바 있었다. 내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본질적인 의미에서 이것이 ‘역사 서술’이 갖는 목적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너무 거창한 것처럼 여겨지면 예를 들어보자. ‘독소전’의 전체적인 양상을 파악하는 데는 몇 장의 지도와 독일, 소련의 최고 사령부의 판단, 몇 가지 중요한 전투의 결과 정도면 충분하다. 그러나 그런 분석에는 정작 전투에 참가한 사람들과 그 결과에 휩쓸린 이들은 포함되지 않는다. 사람의 역사를 서술함에도 중요한 ‘사람’은 포함되지 않는, 모순적인 상황을 직면하게 된다. 마치 비석에 몇 줄 새기고 만 것처럼 기록 자체가 빈약해진다.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휘말렸고 그 기록이 남아있는데도 그들에 관해 적지 않는 것은 일종의 도피라고 본다.
또한 전쟁에 관해서 기록할 때는 ‘어떻게 일어났고 진행됐는가?’ 만큼이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휘말렸는가?’도 중요하다. 후자를 등한시하면 전쟁이 가져오는 파국을 무시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결국 약자가 휩쓸리는 전쟁의 부작용에 관해서도 쉽게 생각하게 된다. 아직도 세상에 끊이지 않는 전란에서 가슴 아픈 사연을 보면 꼭 부녀자가 포함되어 있는 이유를 생각해봐야 한다.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은 역사적인 순간들을 세세하게 복원하는 일은 사례가 드문 편이고 또한 쉬운 작업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힘이 닿는 한, 가능한 한은 반드시 이 책과 같은 역사 서술은 필요한 작업이며 앞으로도 이어졌으면 한다. ‘역사 서술’에 관한 내 시선이 틀릴 수는 있겠으나 적어도 ‘역사’가 사람들의 삶을 추려 적는 작업이라는 점이 변하지 않는다면 나는 이것이 옳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