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불 3
최명희 지음 / 한길사 / 199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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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무더운 여름..찌는듯한 더위속에서 방안에 쳐박히어 <혼불>을3일만에 정독을 했었다. 문체의 아름다움과 최명희 선생의 역사적 안목에 깊은 감명을 받았었다. 왜 혼불을 쓰고나서 최명희 선생이 유명을 달리하셨는지 조금은 알수 있을것 같기도 했다. 혼불에서는 최명희 선생의 한줄, 한줄의 절망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절망을 뛰어넘은 최명희 선생의 모습이 내게 투사되었다. 이것을 읽기 전에 이문열의 '변경'을 읽었었는데, 이문열의 변경과 비교하면서 읽는 재미는 정말로 솔솔했다.

이문열의 문체가 독선적이고 딱딱하다면은 최명희의 문체는 부드럽고 포용적이었다. 이문열의 변경론과 최명희의 혼불론. 대하소설을 나누는 기준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장편의 분량을 뛰어넘은게 대하소설이라는 기준하에...막연히 대하소설이구나 하고 읽었었다.이 소설의 중요한 작품줄기를 잠시 설명하고자 한다. 혼불의 작품 구성은, 즉 첫째, 청암부인, 율촌댁, 효원으로 이어지는 종부 3대의 이야기를 중요핵심 줄기로 하고 있다.

그 중심에 청암부인이 있다. <내 홀로 내 뼈를 일으키리라>는 각오로 쓰러져 가는 매안 이씨 종가를 세운 청암부인은 작품에서 가장 매력있는 인물이다. 엄중한 범절, 헤아릴 수 없는 도량, 범접 못할 위험과 기품, 청암부인의 모든것을 압도하는 즉슨..동물의 왕인 호랑이를 연상케하는 풍모...,<혼불>은 청암부인의 등장과 업장, 치상과 회고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고, 청암부인의 죽음은 어떻게 보면 가문의 몰락을 암시한다고도 생각되어진다. 청암부인을 닮은 효원이 청암의 혼불을 빨아들인 장면에서는 효원 또한 청암부인의 생애와 크게 다르지 않는 삶을 살것이라는 막연한 상상을 했다. 즉슨..효원은 청암부인의 또다른 현신이라는 생각이다.

즉 효원이 청암부인의 혼불을 빨아들인 것은 효원이 청암부인과 거의 같은 길을(가문을 일으켜 세우는) 갈것이라것이 연상되어졌다. 그리고 두번째로 깊게 통찰해본것이 작품의 줄기에 넓게 포진해있는 강실과 강모의 근친애에 관한 것이었다. 효원과 강실과 강모의 미묘한 삼각구도속에서 세사람은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각자 흩어져 버린다. 강실이의 비극을 보았을때 하염없이 눈물을 넘기려던 책장속으로 뿌렸었다. 비극적 사랑...즉 근친애와 사랑없는 결합.(강모와 효원) 이 두가지의 대립은 필연적으로 파멸을 가져왔다. 어느누구도 행복해질수 없었던 비극적인 파멸...육체적 파멸과 정신적 파멸이 강실에게 드러나고, 효원의 마지막 장면에서의 정신적 파멸, 그리고 강모의 강실에 대한 사랑의 끈을 놓지 못 함으로써의 정신적, 육체적 파멸.

근친상간을 사회 도덕적 측면에서 결합시키지 않고 간절함만을 자아내게 하는 최명희 선생의 플롯에 경탄을 금하지 못하겠다. 그리고 도덕이라는 사회의 공동체에서 이단적인 행위(강실을 사랑한 죄)로 인해 만주로 추방당하는 강모..이것은 공동체가 강모에게 가하는 죄벌이라고도 생각되어진다. 이 소설의 구성적 대립을 잠깐 살펴보면, 기존의 관념과 새로운 관념의 대립이라고 볼수도 있다(강모와 강실의 근친상간) 또다른 대립은 신분제의 대립..즉 춘복을 핍박받은 민중의 의인화의 관점에서, 매안이씨 일가를 사회의 주류세력으로 보는 관점을 예로 들수 있다.

그리고 이 대립구조는 춘복이와 강실의 강압적인 결합으로 인해 깨어진다고 볼수있다. 시대의 흐름에 반항할수 없는 결합....아마도 그 시대의 우리나라의 격변기를 대변하고 있지는 않나 싶다. 이 혼불을 2000자 내외로 표현하기란 애초에 무리이다. 나는 이 소설의 겉만을 햝고 있는 것이다. 혼불은 읽었다고 알수 있는 소설이 아니다. 혼불은 두고두고 곱씹어서 읽어야 한다. 혼불은 내게 하나의 화두이다. 최명의 선생의 문체의 아름다운 비밀을 알고 싶다..그 화려한. 그리고 깊이 있는 묘사.....아!!! 우리 문학은 <혼불>이 있음으로써 아름답다..'혼불을 위한 혼불론' 최명희 선생님 진정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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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한 연구 - 상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11
박상륭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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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처음 박상륭 선생님의 글을 접했던 때가 20살의 무더운 여름.하루에 한페이지도 넘기기 어렵던 그의 낯설은 언어들. 한참동안을 심한 언어적 열패감에 시달려가며, 인내의 극을
향해 달려가던 나의 20살 시절의 무더운 여름날. 아~ 지금도 생각난다. 읽으면 읽을수록 빠져들고야 마는. 깊은 수렁속에서 빠져나오려 거칠은 몸부림을 쳐대었던 자신이.

죽음의 한 연구는 예수형의 인물인 육조 혜능의 구도적 해탈에 관한 이야기이다. 예수의 40일간의 수행과 혜능의 40일간의 유리 체험. 그리고 그 속에서 40일간의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죽여가는 혜능의 모습에서 장엄한 한편의 대서사시를 보는것만 같았다. 5번을 반복하여서 읽었다.읽으면 읽을수록, 박상륭을 알면 알수록 말할수 없다는 것에 내 자신에게 심한 분노를 느꼈다.그의 글을 읽으면서 내 자신에게 일어나는 '폭발적 갈등'과 끝없이 분열 되어버리는 나의 나약한 정신.

수도부의 '임자 오씨요, 임자 오씨요' 하는 글을 읽을때 나도 모르게 눈물방울들이, 마치 구름이 뭉글뭉글 피어오르듯이 솟아나왔다. 가슴 저린 수도부의 이야기들. 그리고 혜능의 어머니에 관한 기억들과 어린시절의 기억들을 보면서 수없는 가슴저림을 맛보았다. 내 감히 이런 글 같지도 않는 글을 씀으로서 박상륭 선생께 누를 끼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차가운 달빛에, 껄끄러운 바람에 전신이 찢겨지는 듯한 아픔을 느낀다. 감히 내가 박상륭 선생님을 이야기 한다는 것 자체가 수치스러운 일일지나, 그 수치스러움을 무릎쓰고서라도 꼭 한번은 죽음의 한 연구에 관한 글을 쓰고 싶었다.

죽음의 한연구는 반전이 뛰어난 소설이다. 육조가 칠조가 되는 혜능에게 침과 해골을 전수해줌으로써 의발전수를 하지 않았던들 이 소설이 주는 깊이는 덜하였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육조에게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그의 침과 해골을 받음으로써 유리의 칠조가 되는 촛불승의 아름다움과 혜능의 깨달음. 자기 자신을 죽임으로써 우주와 하나가 되는 혜능의 깨달음.

이 소설에서는 무수한 관념들의 대립이 엿보인다. 바다와 늪. 즉 바다는 생명을 잉태하는 장소로서 존재하고 늪은 생명이 없는 모든것이 사멸한 장소라는 인식이 내게 전하져 왔다. 마른늪에서의 낚시라함은 死에서 生을 창조하려는 그의 의지가 엿보인다. 죽음속에서의 생의 창조. 아~~~ 죽음이 생과 다르지 않고 생이 죽음과 다르지 않다하다니...죽음속에 생이 있고 생속에 죽음이 있다하다니....

죽음의 한 연구 속에는 박상륭 선생님의 모든 사상이 담겨있다. 주역과 불교와 기독교...등등..모든 그의 사상의 집대성을 담아놓은 것이 이 책이요. 이 담아놓은 것을 풀어놓은것이 칠조어론이라는 책이다. 겉으로는 불교적 관념의 종교적 형태의 구도행각을 제시하는듯 하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혜능의 구도행각은 예수의 구도행각과 엇비슷함을 느낄수 있다. 예수 또한 40일간의 명상을 하고 세상으로 나간반면, 혜능또한 40일의 기한으로 유리를 찾아오는 것이 이를 대변해준다.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고 싶은가? 생에 더이상 집착하고 싶지 않은가? 그렇다면 나는 감히 일독권장을 한다. 죽음의 한연구처럼 우리 문학사에 뛰어난 소설은 존재치 않을 것이라는것을 말이다. 장편의 글임에도 불구하고 결코 흐트러지지 않는 그의 문체의 아름다움...지금도 가슴이 울렁거린다. 아~~박상륭이여!!!죽음의 한연구여!!! 죽음의 한연구를 연구하는 연구....박상륭 선생님과 동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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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브리티 2004-11-11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기 주인공은 혜능이 아니라 "유리"라고 통칭됩니다. 중국 선조의 6대조사인 혜능의 고사를 인용한 것이지 주인공이 혜능은 아니거든요. 아마..사막에서 촛불중이 주인공의 눈을 멀게하는 장면쯤에서 장부(?)에 이름을 적게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거기에 "유리"라고 적거든요...(음..기억이 가물가물...-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