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질 녘에, 손을 잡는다
기타가와 에리코 지음, 이정민 옮김 / 빈페이지 / 2026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해 질 녘에, 손을 잡는다」는 오래 만나왔던 연인과 결혼한다는 미래 한 가지만을 바라보고 살았던 소라마메가 연인을 만나러 도쿄에 상경했던 날, 충격적인 이별을 겪으면서 시작한다. 소라마메는 자신의 운명이라 여겼던 한 남자를 바라보며 그와 결혼하는 것이 자신의 정해진 인생처럼 믿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한순간에 연인과 함께 나아갈 길도 잃어버린다. 그 과도기에서 그녀는 한 남자를 만난다. 우직하게 자기 꿈을 위해 노력하는 남자인 오토였다. 소라마메는 우연한 계기로 오토가 지내는 하숙집에 눌러 앉게 된다. (여담이지만, 부자인 척했던 오토가 너무 빨리 들통나는 게 정말 재밌었다. 너무 빨랐다. 정말!)


여러모로 중요한 시기에 만나게 된 두 사람은 알게 모르게 서로를 의식하고, 상대방의 곁에 있는 사람을 질투하기도 하고, 앙숙처럼 으르렁거리거나 서로를 놀리기도 하면서 상대를 향한 마음을 키워 나간다. 그러나 마음을 확실히 표현하기엔 두 사람 앞에 놓인 현실이 녹록지 않다. 오토는 착실하게 자기 목표를 위해 걸어가다가 드디어 기회를 잡은 참이었다. 소라마메는 익숙한 곳에서 낯선 곳으로 떨어져 나와 휘청거리고 고통스러워하고 도피하기도 하지만, 그 과정에서 알지도 못했던 자신의 재능을 깨닫고, 꿈을 찾게 된다. 서로가 눈에 밟히지만 눈 앞에 닿을 듯 말듯 한 꿈을 이루려면 상대방만 바라볼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오로지 사랑을 이루는 것, 결혼으로서 가족을 완성하는 것을 인생의 목적이라 생각했던 소라마메가 자신의 길을 분명히 걸어나간다는 것이 결국 그녀의 '어머니'의 발자취를 쫓는 일이라는 점이 흥미로웠다. 소라마메는 자신을 두고 간 어머니에게 트라우마에 가까운 상처를 받았다. 결코 치유되지 않을 상처일 줄 알았을 텐데, 그녀는 꿈을 찾아 자신의 길을 걷다가 자연스레 어머니를 대면하게 된다. 그리고 비로소 그녀를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 상징적으로 느껴졌다. 유년기의 깊은 상처로 간직하고 있던 기억이 자신의 경험을 통해 새롭게 의미를 띠고 채색되는 장면은 언제 봐도 멋있다.


이 이야기의 좋았던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중간한 악역이 나오지 않는다는 거였다. 그 왜, 로맨스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장애물이 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종류의 납작한 악역 말이다. 자칫 소모적으로 쓰일지 모른다 생각했던 캐릭터인 구온이나 간노 세이라도 행동의 동기와 이유가 분명히 보이는 입체적 캐릭터라 읽기 편했다.

특히나 세이라에게는 마음이 많이 갔다. 개인적으로 세이라도 주인공적 매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고통스러운 과거 서사를 가지고 있으며,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딛고 일어서고, 아픔을 극복하려 노력하는 캐릭터다. 미숙하고 불안정한 면이 있어서 충동적으로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지만 자신의 잘못을 늦게나마 고백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글 자체는 편안하게 읽히지만 이야기를 하려고 앉으면 한없이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애틋하고도 사랑스러운 이야기였다. 간만에 달콤 쌉싸름하면서도 상큼한 로맨스 소설을 찾아서 기분이 좋다. 이야기 초반에 요루시카의 곡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과연. 책을 읽는 내내 요루시카의 곡들이 생각났다. 한동안은 요루시카의 노래가 흘러나오면 소라마메와 오토가 육교에 나란히 선 모습이 떠오를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악당은 모두 토요일에 죽는다
정지윤 지음 / 고블 / 2026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을 펼친지 얼마 안 돼서, '그래서 S대가 어디지? 진짜 있었음직한 사건들인데...'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서 독서를 중단하고 검색을 하고야 말았다. 조금 찾아본 결과 S대가 가상의 공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니까 「허실시 기담괴설 사건집」의 허실시처럼, 있음 직한 공간이지만 실제 하진 않는 곳이었다. 책을 읽다 말고 갑자기 궁금증을 못 참았던 이유는 정말, 실제로 있었을 법한 사건을 기반으로 창작하셨다고 여겨질 만큼 이야기에 사실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악당은 모두 토요일에 죽는다」는 여섯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 S대를 중심 배경으로 각기 독립되어 있는 듯 보이던 에피소드들이 마지막 장으로 가서야 점차 연결고리가 보이는 구조다.

개인적으로 가장 재미있었던 에피소드는 <너무 일찍 터트린 샴페인의 위험성에 대하여>였다. 이 장에선 '진실이라는 것이 주관적인 기억의 총합이라면, 실체적인 진실은 과연 존재하는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고 있다. 「악당은 모두 토요일에 죽는다」각각의 에피소드마다 생각해 봄직한 화두를 던진다. 하지만 그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건 말건 큰 상관은 없다고 본다. 그냥 이야기만 따라가면서 읽어도 무척 재미있는 한 권이기 때문이다.

에피소드가 끝날 때마다 들어가 있는 작가님의' 후기'도 에피소드가 독립된 느낌을 주는 하나의 장치로 느껴졌다. 물론 그저 도구적이기만 한 것도 아닌 게, 후기만 읽어도 재미가 있다. 작가님과 이야기를 나눈 기분이었고, 좀 더 말씀을 청해 듣고 싶은 감상을 느꼈다.

이런저런 책을 읽다 보면 '다시 읽고 싶은 이야기'를 만날 때가 있다. 보통은 이야기의 전말과 중심 주제, 개요와 반전 따위를 전부 깨닫고 나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끝난다. 특히나 추리·미스터리 장르일 경우 비밀이 풀리면 후련함과 함께 그 세계에 대한 미련도 사라지게 마련이다. 이미 완성되어 닫힌 세계라는 인상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걸 다 알고도 다시 읽게 되고 싶어지는 책이 종종 있다. 「악당은 모두 토요일에 죽는다」는 그런 유의 책이었다. 마지막에 이르러 전말을 깨닫게 되고, 책장을 덮은 후에 바로 재독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머릿속에 얼개를 완성한 채 다시 읽으면 또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야기가 다 끝난 후에도 정지윤 작가의 이야기보따리가 크고, 많은 이야기가 들어있겠구나 짐작하게 된다. 이 소설을 위해 짜 두신 설정이 방대한 것 같던데, 이후에 장편 소설 소재로 만들어두신 설정을 활용해 주셨으면 좋겠다.(제발, 제발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자는 없어 꿈꾸는돌 45
김지현 지음 / 돌베개 / 2026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유자는 없어」는 누구나 어린 시절 어떤 방식으로든 해봤음직한 청소년기의 고민이 담겨 있다. 주변 친구들은 다들 나름대로 생각을 하고 제 앞길을 찾아가는 것 같은데 나만 정체된 듯한 불안감에 자신만 나아가지 못할 것 같다는 두려움을 느끼는 지안. 과도기의 실패를 인생의 실패로 느껴 좌절한 수영과 항상 이방인의 위치에 놓이는 게 익숙한 해민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유자는 없어」는 성장에 대한 이야기다. 대단히 극적인 일로 멋지게 상황을 반전시키는 일은 일어나지 않지만, 그들이 서로를 알아가고, 이해하고, 지탱하면서 꿋꿋하게 자기 길을 가는 이야기를 그려냈다. 인물이 느끼는 감정이 자연스럽게 몰입되어 읽는 내내 따뜻한 시선으로 이야기를 따라가게 된다.

소설의 배경인 거제도라는 환경이나 지안의 폐소공포증도 성장에 대한 은유를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던 곳을 떠나게 되는 일' 이 성장 그 자체를 상징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태어난 후엔 필연적으로 낯선 곳으로 한 발씩 나아가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 부모님의 품을 벗어나 걷고 뛰게 되고, 유치원을 졸업해 초등학교에 가고, 중학교에 가고, 고등학교에 간다. 세계는 점점 넓어지고, 새로운 환경은 기대만큼이나 큰 두려움과 좌절감도 함께 느끼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그 안에서 나름의 답을 찾고, 상처를 추스르고, 서로를 지탱한 채 묵묵히 한발씩 나아간다.

이들은 이제 괜찮을 것이다. 나름의 결론을 내리고서 한 발짝씩 자신의 세상으로 나아갈 것이다. 책장을 덮은 순간 이야기가 끝났다는 아쉬움만큼이나 잔잔한 후련함이 차오르는 좋은 이야기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를 갈라 나를 꺼내기
하미나 지음 / 물결점 / 202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를 갈라 나를 꺼내기』는 하미나 작가의 경험으로부터 배어 나온 진액이 하미나라는 사람 그 자체를 표현한 글. 그 자체다.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하는 것뿐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꽉꽉 채웠다. 챗 GPT와의 대화, 인터뷰, 대본, 기사나 사례집 등을 요소요소에 배치해서 풍성하게 한 권을 읽은 느낌이 든다. 처음에는 어떤 의미인지 내도록 궁금했던 제목, '나를 갈라 나를 꺼내기'라는 아리송한 문장의 뜻을 조금이나마 알게 된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