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죔레는 거기에 ㅣ 은행나무 세계문학 에세 30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김보국 옮김 / 은행나무 / 2026년 2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죔레는 거기에』|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이 도서는 은행나무 출판사( @ehbook_ )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
어떤 책은 줄거리를 따라 읽는 것보다, 문장에 몸을 맡기는 일이 먼저인 것 같다.
.
《죔레는 거기에》가 그랬다. 처음 몇 장을 넘기면서도 내가 이야기를 읽고 있는지, 한 노인의 머릿속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혼잣말을 듣고 있는지 자주 헷갈렸다. 문장은 길고, 흐름은 느슨한 듯하다가도 어느 순간 기묘하게 조여 온다.
.
이 소설의 중심에는 91세 노인 커더 요지가 있다. 그는 자신이 헝가리 왕위의 정당한 계승자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 설정은 단순한 기행담으로만 흘러가지 않는다. 그를 둘러싼 추종자들, 정치적 망상, 군주주의적 환상, 노년의 고립이 뒤섞이면서 이야기는 점점 우스꽝스럽고도 불편한 풍경을 만든다.
.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문체는 확실히 낯설다. 짧게 끊어 설명하기보다, 한 호흡 안에 인물의 망상과 세계의 불안, 농담과 비극을 함께 밀어 넣는다. 그래서 읽는 동안 편안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불편함이 이 책의 중요한 감각처럼 느껴졌다. 이 작품은 독자를 친절하게 안내하기보다, 혼란스러운 세계 안에 그대로 세워둔다.
.
특히 인상 깊었던 건 번역이었다. 원서의 문체와 문장, 전체적인 흐름을 최대한 고민하며 옮겼다는 느낌이 강했다. 문장이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에도 그것이 번역의 어색함이라기보다 원문의 리듬을 살리려는 선택처럼 다가왔다. 주석 역시 단순한 보조 설명이 아니라, 작품을 다른 층위에서 읽게 해주는 장치처럼 느껴졌다. 번역자의 정성이 책 전체의 밀도를 높이고 있었다.
.
그럼에도 솔직히 말하면, 이 책을 온전히 이해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작가가 의도한 정치적 풍자와 상징, 헝가리 역사와 문화적 맥락을 충분히 붙잡지 못한 부분이 많았다. 서평 독서모임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도, 여전히 꺼내지 못한 의미들이 남아 있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해설이 조금 더 있었더라면 좋겠다는 아쉬움도 있었다. 이 작품은 혼자 읽고 끝내기보다, 누군가와 오래 이야기하며 천천히 풀어야 할 책에 가깝다.
.
쉽게 읽히는 소설은 아니다. 그러나 문학이 반드시 명료한 메시지로 정리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독자라면, 이 책의 낯선 리듬 속에서 오래 남는 감각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
#죔레는거기에 #은행나무 #김보국 #독서모임 #크러스너호르커이라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