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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진 시절 ㅣ 소설Q
금희 지음 / 창비 / 2020년 1월
평점 :
소설 <천진 시절>은 주인공 상아가 우연히 오래전 가깝게 지냈던 정숙을 만나면서 과거 천진(天津)에 살던 시절을 떠올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녀가 회상하는 '천진 시절'은, 1998년 등소평 이래 개혁개방에 나섰던 중국이 본격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하던 시기로, 그 시기를 살아낸 20대 청춘들의 삶과 욕망을 대변한다. (금희는 중국 지린성 출신의 조선족 작가다.)
특히 주인공 상아와 정숙이 변화하는 모습을 통해 당대 여성들의 시대 변화에 따른 불안감과 신분 상승에 대한 욕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정작 그 시절이 그물에 걸려 올라오는 정어리 떼처럼 반짝반짝 들뛰기 시작하자 나는 깜짝 놀랐다. 무의식이라는 창고 속에서 진작 한 줌의 재로 사그라졌을 거라 여겼던 기억이기 때문이었다. 나에게도 그런 가슴 뜨거웠던 시절이 있었고 나의 청춘이 꽤 드라마틱한 시대 속에서 연출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들었다. 정숙을 다시 만나기 전에는 전혀 해보지 않았던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시간들은 마냥 반짝반짝 아름답게 빛나기만 하는 추억의 순간들이 아니다.
세속적인 욕망과 배신, 좌절도 함께 뒤따른다.
이런 것도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에덴에 남겨진 단 한명의 남자와 단 한명의 여자 같은 경우, 다른 선택이란 있을 수 없고 절대적 외로움과 고독 속에서 유일하게 실재를 확인할 수 있는 낯익은 상대와 함께 함으로 그에게서 느끼는 안정감과 친밀감, 의지하고 싶은 감정...... 이런 것도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상아와 무군의 시작은 애초에 상아의 탈향과 취업에 대한 욕구로 시작되었기에, 그 끝이 이미 예견되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 역시 "처음부터 내가 원하던 상황이 아니었으니까"라고 되뇌며 끊임없이 마음의 거리를 두었으니까.
그렇기에 더더욱 춘란이나 미스신의 삶을 지켜보며 쉬이 흔들렸을 것이다.
나는 삶의 어떤 변화, 질적으로 더 나은 변화를 원하고 있었다. 내 욕망이 정당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욕망이 꿈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그때는 두 가지가 결국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걸 위해서 사는 삶이라면 오히려 춘란이나 미스신이 나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소한 그녀들은 욕망 앞에서 정직하고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는가.
그녀가 욕망을 좇아 새로이 시작한 삶이 그녀를 더 행복하게 이끌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그녀가 다시 그 시간으로 되돌아간다 해도 같은 선택을 했으리라는 말속에서 적어도 그녀 스스로 선택한 삶에 후회는 없어 보인다.
그녀는 약하게 떨고 있었다. 나도 그녀를 마주 안았다. 될수록 다정하고 친근하게. 그녀의 팔이 내 등에서 떨어져 나갈 때 가슴이 아려왔다. 우리는 왜 좀 더 일찍 이런 시간을 가지지 못했던 걸까.
그러나 천진에서 보낸 시절은 그녀에게 어떤 식으로든 상흔을 남겼던 것 같다.
그러니 부러 꺼내보지 않고 한켠에 묻어 두었던 것이 아닐까.
정숙을 만나기 전, 설레면서도 복잡했던 마음도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소설 <천진 시절>은 1998년도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지금 시대 상황과 비교해봐도 크게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현대의 청춘들 역시 세속적인 욕망을 품고 있으며, 그것을 위해서 타인을 이용하기도 배신하기도 하니까.
상아나 정숙의 선택을 고운 시선으로 바라보지도 못하지만, 딱히 비난하기도 힘든 이유다.
그렇다고 그들의 선택이 딱히 물질적인 풍요를 가져다주지도 않았다는 점에서 이들의 삶은 어쩌면 안쓰럽기도 하다.
모두들 자기 나름의 욕망을 좇아 살아가지만, 세상은 누구에게나 호락호락하지는 않으므로.
현실은 그저 버석버석할 뿐이다.
정숙의 현재 모습과 과거의 시절이 교차되며 이야기가 진행되는 방식이 무척 흥미로웠다.
누군가의 어느 한 시절을 통해 그려낸 삶의 모습도 무척 생생하게 다가왔다.
20대 청춘의 모습을 마냥 뜨겁고, 힘차게, 행복하게만 그려내지 않았다는 점도 마음에 든다.
어쩌면 이게 더 현실적인 삶의 모습일지도 모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