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이
닐 셔스터먼.재러드 셔스터먼 지음, 이민희 옮김 / 창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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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붙어 보이는 소녀의 입술.

물 한방울이 간당간당 겨우 붙어 있는 수도꼭지.

표지부터 무척 갈증이 느껴지는 소설, 「드라이」.

제목에서 시사하듯, 소설 '드라이'는 가뭄이라는 재난을 소재로 한다.

어느 날 갑자기 수도꼭지에서 물이 나오지 않고, 마트의 생수는 모두 동이 났다.

주변에 있는 호수나 저수지의 물마저 다 말라붙어버렸다.

설상가상으로 정부의 대처는 너무나 허술하고 미약하다.

생사가 달려 있는 이 위기 상황에서 십 대 주인공들은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책을 읽으면서 코맥 매카시의 '더 로드'라는 작품이 생각났다.

대재앙의 발생.

생존을 위한 투쟁.

그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본성.

'더 로드'가 거의 세기말적인, 갑갑하고 암울한 세상을 그려냈다면 '드라이'는 그보다는 좀 더 희망적이다.

그러나 그 재앙이 오래오래 지속된다면 '드라이'에 나오는 인물들이라고 별다른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가장 무서운 것은 그 어떤 재해보다도 인간 재해니까.

맞은편에서 내 또래 남자애 하나가 걸어오고 있었다. 얼굴은 아는데 이름이....... 무슨 제이컵이었던 것 같다. 나는 그 애가 지나가기만 바랐다. 난생처음 사회 부적응자가 된 느낌이었다.

제이컵은 땅에 뭔가를 질질 끌고 있었다. 무슨 막대기 같았다. 콘크리트 긁는 소리가 났다. 그 애는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나만큼 이 상황이 거북한 듯했다. 가까이서 보니 그 애가 끄는 물건은 막대기가 아니었다. 골프채였다. 헤드가 나무로 된 드라이버.

"안녕." 제이컵이 나를 지나치면서 말했다.

"안녕."

제이컵은 자기 길을 가고 나도 내 길을 갔다. 굳이 돌아보지 않았다. 골프채로 뭘 하려는 걸까. 모르긴 몰라도 골프와 관련된 일은 아닐 것이다.

 

 

"실례합니다." 이번에는 좀 더 크게 말했다. "저한테 물이 좀 있는데요."

그 순간 거실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살면서 이토록 남의 이목을 끌어 본 적은 처음이었다.

"물이 있다고?" 누군가가 말했다.

(중략)

싫다. 정말 싫다.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없지만 애초에 물을 들고 오는 게 아니었다.

사람들의 눈빛은 해변의 불량배들과 비슷했다. 입술이 허옇고 거칠었다. 모두 다급하고 예민한 상태였다. 그 초조함이 내게 스포트라이트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생존이 달려 있는 상황에서는 그저 평범한 일상의 한순간마저도 평범할 수 없게 된다.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고 경계하고, 일상은 걷잡을 수 없이 파괴된다.

친구도 주민도 더 이상 예전에 알던 그 사람들이 아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끔찍한 공포가 바로 이런 것이라 생각된다.

상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진다.

흡인력이 엄청나다.

꽤 두꺼운 책인데도 거의 하루 만에 다 읽었다.

책을 다 읽고 나서는 괜히 물 한 컵을 벌컥벌컥 마시게 됐다.

인간에게 너무나 필수적인 '물'을 소재로 하다 보니 언젠가 나한테 일어나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날이 온다면 이 세상은, 나는, 어떻게 변할까.

상상만으로도 묵직한 두려움이 몰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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