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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닫힌 문 ㅣ 창비시선 429
박소란 지음 / 창비 / 2019년 1월
평점 :
나는 원래 시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굳이 분류하자면 싫어하는 축에 속한다.
시 자체가 좀 어렵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시의 애매모호한 속성에 글쓴이 당사자도 아닌 타인들이 이러쿵 저러쿵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에 어쩐지 거부감을 느꼈던 것 같다.
내 평생 읽어본 시집이라고는 류시화 님의 시집 한권 밖에 없는데, 그마저도 그를 좋아하는 친구의 권유로 그냥 읽어본 거였다.
앞으로도 시집 볼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해왔는데.. 얼마 전, 창비 블로그에서 우연히 박소란 님의 시를 한 편 보게 되었다.
모르는 사이
당신은 말이 없는 사람입니까
이어폰을 꽂은 채 줄곧 어슴프레한 창밖을 내다보고 있군요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를 태운 7019번 버스는 이제 막 시립은평병원을 지났습니다 광화문에서부터 우리는 나란히 앉아 왔지요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나는 인사하고 싶습니다
당신이 눈을 준 이 저녁이 조금씩 조금씩 빛으로 물들어 간다고
건물마다 스민 그 빛을 덩달아 환해진 당신의 뒤통수를 몰래 훔쳐봅니다
수줍음이 많은 사람입니까 당신은
오늘 낮에 혼자 밥을 먹었습니다 행복한 사람들이 가득한 광장을 혼자 걸었습니다
언젠가 당신은 그곳에서 우연히 친구를 만난 적이 있지요 밥이나 한번 먹자 악수를 나누고 황급히 돌아선 적이 있지요
나는 슬퍼집니다
그렇고 그런 약속처럼 당신은 벨로 누르고 버스는 곧 멈출테지요
나는 다만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오늘의 변덕스러운 날씨와 이 도시와 도시를 둘러싼 휘휘한 공기에 대해 당신 무릎 위 귀퉁이가 해진 서류가방과 손끝에 묻은 검뿌연 볼펜 자국에 대해
당신은 이어폰을 재차 만집니다
어떤 노래를 듣고 있습니까 당신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들리지 않는
그 노래를 나도 좋아합니다
당신을 좋아합니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문이 열립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당신이 유유히 문을 나섭니다 당신의 구부정한 등이 저녁의 미지 속으로 쓸려 갑니다
우리는 헤어집니다 단 한번 만난 적도 없이
나는 인사하고 싶습니다
내 이름은 소란입니다
박소란 시집, 「한 사람의 닫힌 문」 수록작 '모르는 사이'
별 생각 없이 읽어내렸는데 어쩐지 코끝이 찡, 눈물이 핑,
어쩌면 시인듯, 아닌 듯한 구성이 마음에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 시에서 고스란히 전해지던 쓸쓸함이, 고독감이 내 마음에 닿은 건지도 모르겠다.
그도 아니면 그냥, 내가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나는 인사하고 싶습니다.
내 이름은 소란입니다.
하는 그 파동이 무척 깊은 여운을 남겼다.
그렇게, 이끌리 듯,
내 생전 처음으로 시집을 마음에 담았다.


이 싱거운 궁금증이 오래 가슴 가장자리를 맴돌았어요
.
모르겠어요
실은 우리가 국수를 좋아하기는 했는지
.
나는 고작 이런게 궁금합니다
화려하거나 지나치게 감상적이지 않은 그녀의 표현방식이 참 좋다.
담담한 말투에 담긴 진한 그리움 같은 것이 내 마음을 휘휘 저어놓는다.


그녀의 글에서 느껴지는 정서들이 좋다.
무언가 마음이 시린, 무언가 참 뜨끈한.
몇 번이고, 두고 두고,
자꾸만 다시 읽어 보게 될 것 같은 시집.
박소란, 「한 사람의 닫힌 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