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의 가방
가와카미 히로미 지음, 서은혜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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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며 망설임이 들면, 행복한 시간은 더욱 짧아 진다.

상대가 누구든, 사랑하게 되면, 아니 상대가 특별해지면, 그렇게 살면 된다. 상대랑 같이 있는 것이 포근해지면 그렇게 가만히 있는다. 상대랑 같이 있으면 마음이 콩콩 뛰고 세포 하나하나가 살아나는 것 같으면 그대로 가만히 있는다. 그 가슴 벅찬 경험은 가만히 있으면 계속된다.


그러나 상대를 규정하려 하면, 걱정이 생긴다. 망설임이 생긴다. 포근함이 가슴 벅참이 걱정으로 근심으로 변한다. 그렇게 지옥에 스스로 발을 들여 놓을 필요는 없다.

규정되지 않으면 어떤가? 나는 그로 인해 세포가 살아나고 포근함에 감싸여 있을 수 있는데. 


걱정이 생기고 근심이 생기면 행복은 약해진다. 그 사람을 만나기 전처럼, 아니면 없던 근심도 걱정도 생긴다. 바로 인간사 고난의 시작인 것이다. 


욕심일까? 상대에게 명확한 명찰을 달아주려는 마음은. 왜 이대로는 안된다고 생각할까? 왜 이 포근함을 세포가 살아 있음을 영원히 느끼려는 욕심은 내지 못할까?

왜 상대가 명확한 명찰을 달면 그 포근함이 그 세포가 살아 있음을 느끼는 것이 더 커지거나 영원해질 거라 생각할까?


어쩌면 지옥은 신이 만든 징벌의 공간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구축하는 괴로움이 공간일지도 모른다.

싱글벙글하며 선생님은 자신의 술을 내 잔에 따르려 했다. 이건 보기 드문 일이다. 우리는 서로의 술이나 안주를 간섭하지 않기로 되어 있다. 주문도 각자 한다. 술은 각자 따르고, 계산도 따로따로. 그런 방식을 지켜 온 것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선생님이 자신의 술을 따라 준다. 암묵적인 원칙을 이렇게 때가니… 이렇게 된 게 모두 교진이 쓸데없이 이겼기 때문이다. 나와 선생님 사이의 상쾌한 거리를 마구 좁히려 들다니, 이 개똥 같은 교진!

혼자였다. 버스도 혼자 타고, 길을 걸을 때도 혼자, 장을 볼 때도 혼자, 술을 마실 때도 혼자였다. 선생님과 함께 있을 때도 예전에 혼자서 지낼 때와 별다른 느낌의 변화는 없었다. 그렇다면 굳이 선생님과 같이 있을 필요도 없건만, 함께 있는 편이 온당한 득한 느낌이 들었다. 온당하다는 것도 묘한 소린가? 새로 산 책의 띠지를 벗겨 버리지 않고, 그냥 두고 싶은 것과 같은 심정이라고나 할 수 있을까? 띠지로 비유된 것을 알면 선생님이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

이렇게도 많은 생물들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도시에 있을 때는 언제나 혼자, 가끔씩 선생님과 둘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도시에는 커다란 생물만 살고 있다. 그렇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도시에 있을 때도 주의 깊게 관찰해 보면, 수많은 생물들에 둘러싸여 있었을 게 틀림없다. 선생님과 나, 딱 둘뿐이었던 게 아니다. 술집만 하더라도 언제나 선생님만 눈에 들어왔다. 그렇지만 거기엔 사토루 상도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낯익은 손님들도 있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도 정말로 살아 있는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지는 않았다. 살아서 나와 마찬가지로 잡다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휴지를 주워 미리 준비해 온 비닐봉지에 넣는 사람, 빈 병들을 모아 마침 꽃놀이가 끝날 때쯤 찾아온 주류 전문점의 트럭 - 분명히 그 시간에 오도록 미리 부탁을 한 게 틀림없어,라고 다카시는 말했다 - 으로 옮기는 사람, 아직 술이 남아 있는 병들을 술 좋아하는 선생들에게 공평하게 나누어 주는 사람, 울퉁불퉁 해진 땅을 운동장에서 쓰는 바퀴 차로 밀고 다니는 사람, 분실물들을 모아 상자 안에 담고 있는 사람. 선생들은 막힘없이, 마치 훈련된 병사들처럼 움직였다. 바로 조금 전까지 소란스럽던 꽃놀이의 흔적은 한 15분 만에 깨끗하고 말끔하게 사라졌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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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50살이네요 - 몸과 마음, 물건과 사람, 자신과 마주하는 법
히로세 유코 지음, 박정임 옮김 / 인디고(글담)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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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알게 된, 또 하나의 ‘삶의 방식’

‘지속 가능성’ Sustainability



요즘 신경 쓰고 있는 일입니다. 지금까지 세우고 지운 수많은 계획들. 나중에 읽어보고 피식 웃었던 계획들과 글씨들. 아마도 그때는 ‘획기적’ ‘실효적’ 이란 마법의 주문을 기대했는 지도 모릅니다. 

계획을 세우고 있을 때, 그것을 계획서에 다 옮긴 후까지, 마법의 주문을 내게 걸었다는 환상은 지속됩니다. 그 마법의 수명 주기는 3일. 지속 가능성이 없는, 판타지였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바로 다음 날.



지속 가능성 확보를 위해, 2년 가까이 열정적으로 하루 동안 했던 일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가 선택한 ‘날 알아가는 방법’입니다. 왜 그 행동을 했는지, 어떤 행동을 했는지, 결과는 어떤지를 발생 당시, 혹은 저녁 잠들기 전에 수첩에 메모합니다. 단지 3시간 정도 지났을 뿐인데, 3 시간 전의 의사결정에 피식 웃습니다. 그리고 ‘지금 내 나이가 몇인데…’라며 기막혀 합니다. 



그리고 ‘욕심’을 버리고, 나에게 맞는 계획을 세웁니다. 아직도 피드백 feedback 일기를 쓸 때는, 내 계획이 적정하지 않았음을 발견합니다. 아직도 넘치고 있습니다. 아직도 내 능력 이상을 내가 나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속도가 나지 않는다고 안달합니다.



그럴 때는 그 2년 가까이의 기록에 다가가, 그해 동기 기록을 살펴봅니다. 혹은 유사한 주제의 과거들을 찾아 봅니다. 어떨 때는 그때의 판단이 지금도 옳은 경우가 있습니다. 그때 나 지금이나 맞지 않기는 마찬가지인 판단도 있습니다.



그렇게, 그리고 이렇게 나를 돌아보고 시행하고 다시 돌아보면서, 하루 동안 할 수 있는 만큼을 리스트에 적으려 노력합니다. 그래서 완료했을 때, 모든 항목 앞에 완료했음을 표시하는, 속이 시원해지는 체크 표시가 있도록, 그것으로 리스트가 채워지도록 노력합니다. 그 달콤함을 탐합니다.



‘몸’의 변화

축적되는 나태들.



몸은 입력, 처리, 출력만 하진 않습니다. 축적도 합니다. 나중에 쓸 생각에 몸 여러 곳에 축적을 해 둡니다. 보통은 칼로리를 내를 영양소들을 지방 형태로 축적합니다. 비타민이나 무기질은 적정 사용량 이상은 배출해 버립니다. 비타민과 무기질이 몸에 쌓이게 되면 독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몸은 이렇게 스스로 알고 대사를 통해 스스로를 돌봅니다.

그러니 내가 내 몸에 협력하는 방법은, 알맞게 먹는 것입니다. 과하게 축적되지 않도록 알맞게 먹는 것입니다. 근육량이 일반인 수준인 사람이 신진대사, 즉 생명 유지에 사용하는 칼로리는 1,200Kcal 정도입니다. 사람에 따라 다릅니다. 그리고 일을 할 때, 운동을 할 때, 이동을 할 때, 대화를 할 때 등등 육체적 지적 행위에 칼로리를 사용합니다.

러닝 머신에서 속도를 6~7 사이로 맞추고 약간 빠르게 30분을 걸어도 400Kcal 소모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크림 스파게티 한 그릇, 혹은 부드럽고 하얀 당분으로 덮인 도넛 2개면 간단히 400Kcal가 넘습니다. 그럼 계산이 가능하겠지요. 하루 16시간(취침을 8시간 한다고 가정했을 때) 활동하는 행동 내용(칼로리 소모 활동들)을 생각하고, 1,200Kcal + 활동에 필요한 칼로리 = 하루 섭취해야 할 양으로 정합니다.

웨어러블 기기로 일정 기간(대략 3개월 정도) 측정을 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영양학 관련 자료를 참조하는 것도 기준을 마련하는 데엔 도움이 됩니다. 확보할 수 있는, 칼로리 소모량을 모아 보고, 하루 총 섭취 칼로리를 정합니다.

비타민, 무기질은 신진대사를 촉진하거나 유지하는데 도움을 주는 영양 성분입니다. 하루에 어떤 비타민 및 무기질이 얼마나 필요한 지, 종합 비타민 한 알 혹은 두 알로 섭취 가능한 것은 얼마큼인지, 혹은 과일이나 채소로 섭취할 수 있는 양은 얼마나 되는지를 파악합니다.

신체검사도 중요합니다. 자신의 현 상태에서 섭취하면 안 되거나 줄여서 섭취해야 하는 영양소와 보완해야 할 영양소 등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가능한 자료들을 모으고, 1주일 단위로 식단을 세웁니다. 매일 세우기엔 우린 너무 바쁘니까. 그리고 변화가 필요할 때 변경하며 건강한 식사를 합니다.

최근 관심을 가지게 된 운동 방법은, 기구 없이 중력과 내 몸만으로 하는 운동입니다. 요가가 있고, 스트레칭이 있고, Push-up이 있고 Squart가 있었습니다. 태극권, 국선도 같은 기 운동도 있더군요. 동의보감의 양생 편을 보면, 또 아침에 일어나 할 수 있는 건강 활동들이 있습니다.

운동의 목적이, 불필요하게 축적되거나, 정체되는 부분이 없이, 전신이 원활하게 대사를 진행하고 면역을 유지하며, 생활 근력을 내도록 하는 것이라면, 맨몸으로 하는 운동도 나쁘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운동하지 않아, 그 시작은 스트레칭과 warm-up yoga, 그리고 걷기로 정했습니다. 이것이 습관화(매일 스스로 하는 것) 되면 advanced yoga와 줄넘기(이건 도구를 사용하지만, 러닝보다는 줄넘기를 선호합니다, 성격 상)가 되겠죠. 그렇게 부드러워지고 원활해지면, Yoga와 태극권을 하겠죠. 단전호흡은 매일 기상하면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합니다. 먼저 호흡을 천천히, 나오지 않을 때까지 내쉽니다. 그리고 배가 불룩해질 때까지 천천히 코로 들이마십니다. 이걸 10분 동안 합니다. 그리고 스트레칭을 합니다. 취침 중 몸 안의 대사 된 기체를 빼내고 새로운 공기를 넣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물 한 잔. 실온의 물을 한 잔 마십니다. 그리고 소변을 통해 대사 후 배출되는 물을 내보냅니다.

잠은 되도록 오후 10시부터 새벽 2시는 잠들어 있으려고 합니다. 10시를 넘길 일이 있으면 새벽에 합니다. 이 4시간이 몸이 스스로를 돌보는 시간이라는 자료를 읽고 나서부터입니다.

전 옷차림의 핏이 좋아야 할 직업적 이유가 없고, 잔근육으로 타인의 환호성을 즐길 이유도 없습니다. 그래서 가능한 신진대사를 원활하게 하려 합니다. 



‘나다움’

이런 현재의 모습들, 즉, 나를 알고, 그것에 맞게 행동하는 지금의 내 모습이 ‘나다움’이겠죠. 참견하기 좋아하는, 그런 말을 함부로 내뱉는 사람들 곁에는 가지 않습니다. 들려도 마음에 두거나 기억하지 않습니다. 나도 나를 잘 몰라 이렇게 기록도 하고 살펴보는데, 겉에서 본 타인들이 나를 잘 알리 없겠죠.

‘영재’ TV 프로그램에서 한 아버님이 출연하셨습니다. 그분의 자식 교육과 사랑의 방법이 화제가 됐었습니다. 그러나 그 방법을 제가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그 아버님이 그렇게 하실 때 아이들이 보여준 행동을 우리 집에서는 보기 힘듭니다. 때로는 소리를 지르게 되는 일도 있습니다. 원인 제공자도 있지만 저도 화를 참지 못해서죠. 이렇게 가지고 있는 특성이나 유전자가 다른데, 남이 해서 성공만 방법이 그대로 나에게 맞을 일이 없겠죠.

그렇다면 타인이 말하는 나에 대한 평가와 방법들은 그냥 들을 이야기입니다. 적중률이 높다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그냥 그 순간이 감사할 뿐이죠. 그렇다고 타인에게 피해를 줄 단점을 고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단지, 타인에게 폐를 끼치는 행위가 아닌 데도, 그 행동은 아니다 혹은 그건 너에게 맞지 않아 하는 말들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나마 나를 가장 잘 아는 내가 향상되기 위해 취한, 나만의 방법인 것이죠.

그렇게 스스로를 알고, 그런 자신을 어제 보다, 스스로 더 만족할 수 있는 상태로 개선하는 생활들. 그것이 ‘나다움’이겠죠.

그 위치에 섰을 때만 보이는 풍경이 있습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삶의 방식’을 알아가고 있습니다.

알고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는, 가벼운 편이 좋다는 것을.

이 나이가 돼서도 ‘어른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일까?’하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어른에 대한 고민은 나이와 관계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20살에는 20살의 고민이 있고, 40살에는 40살의 고민이 있고. 이렇게 50살이 되어도 아직 ‘어른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걸까’ 라고 고민합니다.

갈림길에 멈춰 섰을 때처럼 무언가를 선택해야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자신이 ‘웃으며 지낼 수 있는’ 쪽을 선택합니다. 지금 웃는 얼굴로 있을 수 있는 쪽, 그리고 이후에도 웃을 수 있을 것 같은 쪽을.

웃는 얼굴로 걸을 수 있도록 해야 앞으로의 여정이 즐거워집니다. 너무 즐거워서, 너무 웃어서 눈가에 주름이 생긴다면 그건 무척이나 멋진 일입니다.

하루종일 맛있는 차를 즐기는 것, 정돈된 집에서의 생활, 소통이 이루어지는 인간관계, 납득하며 진행할 수 있는 일, 생각난 것을 구체화해가는 것,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러 가는 자세, 마음이 충족되는 식사, 깊게 잠들 수 있는 장소. 내게 기분 좋은 삶, 생활, 시간들입니다.
그때그때마다 멈춰 서서 생각하고, 느끼고, 때로는 생각하게 만드는 일들 속에서, 자신의 기본 좋음을 발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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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식 룰렛
은희경 지음 / 창비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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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스키, 수첩, 신발, 가방, , 음악에 작가는 무엇을 담으려 했을까?


중국식 룰렛

K 궁금했을까? 인간의 표정 뒤에 있는 속살이. 자신이 답을 맞춘 사람들의 속살에 더욱더 궁금증을 느꼈나

초대된 사람들은 K 퀴즈에 정답을 맞힌 사람들이다. 게임은 마치, 뛰어난 사람도 역시 우리와 같은 사람임을 확인하고자 하는 궁금함은 아닐까?

그들도 다를 없다는, ‘너도 인간이지!’ 하고 확인하고는, 안심하고 싶은. 나만 보통 인간이라 이런 어려움들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는, 쓸쓸함을 함께 걷고 있는 사람들 뛰어난 사람들도 있다는, 그런 위안을 얻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장미의 왕자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꽃을 피우고자 하지만, 꽃이 5월까지의 견딤과, 3월까지의 기다림을 거쳐 봉우리를 연다는 것을 항상 떠올리지 못하고, 견디지도 기다리지도 못한다.

그런 답답한 인간이, 다시 봉우리를 맺어 이를 활짝 피우게 됨을 알고 꽃잎 떨어지는 지금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꽃을하고 꺾는다.

그리고 인간이 떠올리지 못하는 시간은, 자신의 꽃을 스스로하고 꺾은 자신의 과거이다.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현실 때문에 당연히 자신의 꽃을 꺾으니, 기억하고 반성하여 다시는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꽃이 자신을 화려하게 마법의 도구임을 알지도 못한다.


대용품

지금,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이, 예전에 어찌어찌 잃어버린, 진정한 자신을 대신하는 대용품이라 생각하는 이가 있을까?

정말 치열하게 살아왔는데, 언제나 내가 있는 최고의 노력을 쏟아 왔는데, 그렇게 진정한 나를 지키기 위해서 나에게 다가오는 생과 치열하게 싸워 왔는데, 내가 진정한 나를 지키지 못하고 한낱 대용품을 써서 살고 있다는 말인가? 그럴 리가?


불연속선

나는 진정한 나의 모습을 모른다. 그래서인지, 내가 뿌린 씨앗이 피우는 결과에 치여 떠밀리듯 살고 있다. 삶의 진정한 나침반을 갖지 못하고, 변해버린 외연을 출발점으로 다시 어딘가로 떠난다. 정말 번도 궁금하지 않았을까? 외연은 단지 결과로 변한 껍질일 뿐이고, 진정한 나는 따로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 혹시 겁이 났나? 흔히들 말하는, 뒤틀리고 상처 입은 내가 다시 출발할, 진정한 모습이 긍정적이지 않을까 . 그리고 지금까지의 나를 돌아보니, 진정한 나라는 출발점이 나으면 얼마나 나을까라고 폄하하고 있어서.


별의 동굴

스스로, 짧은 식견에 기대어 운명을 상상하고, 안될 때마다 있지도 않은 운명에 살을 찌워 것은 아닌가

스스로 찌운 자신의 운명에 눌려 있는 자신을, 누군가 두터운 살을 없애고 매몰된 진정한 나를 꺼내 주길 바라고 살지는 않나

그리고 나를 구해준 사람이, 내가 애써 지금까지 유지한 삶의 역사를, 속에 담긴 진정한 땀을 알아주길 기대하고 있지 않은가? 내가 노력해 왔다는 것을 인정하고 어깨를 두드려 주며, 내가 노력만큼의 보상을 전해주길 바라지 않나? 또는, 비록 잘못된 방향성을 걸어왔지만, 그런 판단은 감아 주고, 보상은 줘도 마음 따뜻해질 만큼의 위로를 주길 바라며, 바람의 힘으로 견디며 살고 있지는 않은가?


정화된

과거를 돌이킬 있나? 혹시, 이러면 잘못에 대한 보상이 되겠구나하며 행위로 과거는 정화된다 생각하는가

아니면, 정화되지 않는다는 진실을 알면서도, 그렇게 말을 하고 나면, 세상의 각박함과 따스하지 않음을 다시 떠올리게 되고, 그럼 마음은 더욱 추워질 것이 뻔하니, 굳이 확인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나?

상가와 편의점이 즐비하고 대중교통이 발달한 도시에서 가방은 얼마든지 작고 가벼워질 수 있다. 신용카드와 비상금만 든 머니클립 한개의 크기로까지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은 다른 형태의 가방을 지닌다. 가난한 나라의 시골로 갈수록 사람들은 짐을 많이 갖고 다닌다. 상점은 많지 않고 물건은 귀하며 그것을 살 돈도 없다. 우체국도 자동차도 흔치 않으므로 운반은 직접 해야 한다. 그들은 필요한 것과 옮겨야 할 것들을 모두 지니고 다닌다. 보자기나 상자가 가방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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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가게
장 퇼레 지음, 성귀수 옮김 / 열림원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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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울한 사회상을 보여 이 가게가 생겨나 활발하게 장사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보여 준다. 파리의 이 가게는, 키스 한 번에 성공할 수 있다는 홍보를 하자 구름떼같이 사람들이 몰려드는 가게다. 부자는 비싼 도구를 구입한다. 돈이 없는 사람에게는 총알 한 알도 돈을 받고 판다. 상품에 프리미엄 상품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재방문 고객(도구를 선택하지 못한 사람)은 있어도, 단골은 없다.(목숨이 아홉 개인 고양이라면 단골이 될 수 있을까?)


생을 끝내야겠다는 마음은, 더 이상 나아갈 길이 보이지 않는 순간이다. 실질적인 실행은, 그 포기의 순간이며, 행위는 의식에 불과하다.


만물의 영장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지능과 손 능력의 개발 수준에 따라 영장일 수도, 약간 더 나은 수준일 수도 있겠다. 지능을 가진 덕분에, 고난을 만났을 때 다양한 방법을 구상해 낸다. 동쪽으로 갔다가 서쪽으로도 갔다가 한다. 스스로 생각해서 다른 방법을 적용해 보기도 하고, 팔랑귀는 아니더라도 남의 말에도 귀를 기울여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나아갈 길이, 더 이상 떠올릴 아이디어가 없어 삶의 지속 가능성이 종료됐다고 느꼈을 때 우리는 삶을 마감하는 방법을 생각하게 된다.


과연 어떤 주제일 때 그런 강력한 포기를 하게 되는 걸까? 가장이라면, 더 이상 가족을 부양할 수 없다고 생각할 때일까? 홀로 사는 사람이라면, 삶을 지속하게 할 원동력인 에너지가 고갈됐다고, 다시 충전될 수 없다고 생각할 때인가? 혹시, 내가 한 잘못으로 복구될 수 없는 상황에 몰리게 되면, '여기서 그만!' 혹은 '여기까지!'라고 생각하는 걸까? 죽음으로 책임을 물 일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한 걸까?

공통적인 부분은, 혼자 헤쳐나가려 하기 때문일 것이다. 타인의 손을 빌 일이 아니라고, 혹은 타인도 나를 도울 수 없는 지경이라 생각해서 일 것이다. 그래서 이 막다른 길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해서 일 것이다.


현실을 벗어나는 방법은 꼭 죽음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떠남'도 있겠다. 새로운 장소로의 이전으로, 기존의 현실 공간을 벗어나는 방법이 있겠다.

'칩거'도 있겠다. 시간은 지속적으로 흘러간다. 그러니 지금의 고난 가득한 시간대가 다 흘러가기를 바라며 숨어 있는 것이다.

'철판'도 있겠다. 무턱대고, 막무가내로 도와달라고 외치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냥 손을 내밀어 도와달라고 애걸복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안의 함정은, 이미 그것들을 모두 해봤다고 판단하는 상황이다. 고난이 턱 밑을 지나 얼굴까지 덮어 버렸다. 그동안 생각나는, 들은 모든 방법을 다 전개해 봤다. 그러나 안된다. 해결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 또 하나의 아이디어를 내라고 하는 것이 무리라 여겨지긴 하겠다. 생각에 여유가 없는 상황에 바로 등 뒤에 칼을 꽂을 현실이 붉은 혀를 날름거리는 와중에, 무엇을 더 생각할 수 있겠나?


그러나 이 모든 의사 결정은 자신이 내린다는 것이 실낱같은 희망이 되진 않을까? 혼자 내리는 의사결정을 보류하고, 손 닿는 모든 사람에게 상의를 구해보면 어떨까? 

방법이 없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왜 그렇게 살아왔냐며 대놓고 타박은 하지 않을 것이다, 긍휼히 여길 수는 있어도.


신경숙의 '기차는 7시에 떠나네' 중 생각나는 구절이 있다. 손에 잡은 구명줄을 놓으면 바닥없는 나락으로 빠질 것 같지만, 사실 바닥은 바로 아래에 있다. 그리고 그 바닥을 다시 박차고 올라가면 된다. 문구 그대로는 아니지만, 이런 의미의 구절이 있었다. 소설의 내용도, 주제도, 소재도 떠오르지 않지만 이 구절의 의미만은 이상하게도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온라인 서점에서 책을 찾아 관련 정보를 살펴보니 이 절망의 시작은 사랑이었다.


세상의 사건들을 한 가지 사상만으로 해결할 수 없듯이, 내 문제의 해결책은 나만이 생각해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바둑도, 실제 플레이어 두 사람은 보이지 않던 길을, 제 3자인 훈수꾼은 잘도 찾아내니 말이다.


작품은, 원작 소설이나 애니메이션이나 삶은 살아 볼 만한 것이라는 결론으로 맺는다. 

정말 삶은 살아볼 만한 시간인가? 지낼 만한 공간인가? 신은 운명이라는 질문을 던진다고 한다. 그 질문은 당사자가 이겨낼 수 있는 정도라고 한다. 살다 보면 신은 나를 과대평가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누구도 쉬운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며, 세상에 노력하지 않는 자는 없다. 그런데도 누구는 인생에 눌려 허덕이고 누구는 온몸에 상처를 입으며 그것을 뚫고 나간다. 그 승리하는 '누구도'가 내가 될 수 없다. 그 승리하는 '누구도'가 바로 나일 수 있다. 그것은, 삶을 버릴 것인가 말 것인가의 기로에서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이다.


이 가게는 끝냄의 행위를 방조하는 곳이 아니다. 행위에 실패해 더 큰 고난 속에 살 가능성을 제거해 주는 장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작 소설과 애니메이션은 가게를 폐쇄한다. 왜일까? 삶을 버릴 수 있는, 그런 행위를 도울 조그만 꼬투리까지 남겨두지 않기 위해서일까? 그로 인해 삶을 포기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한 번 더 땅을 박차라고 말하기 위해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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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나무 비룡소의 그림동화 72
클로드 퐁티 글 그림, 윤정임 옮김 / 비룡소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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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 퐁티. 프랑스의 동화 작가. 상상력의 끝을 알 수 없다는 평을 듣는 사람.


이런 평을 접하고 그의 책을 찾았다.


2권의 동화책으로는 내가 찾으려는 상상력 성장의 방법은 발견할 없었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다. 너무 얄팍한 욕심이다.

내게 상상력이 필요할까? 과연 상상력이란 무엇인가?


영화, 도서, 음악, 그리고 드라마는 우리 삶의 단면과 일상의 단면을 보여 준다. 그리고 곳곳에 삶에 대한 통찰을 심어 놓고 혹시 겪을지도 모를 미래에 대해 미리 생각할 기회를 준다. 일상도 바쁜데, 개연성 있는 이야기로 인해, 다가올 거란 기미도 보이지 않는 미래에 귀를 세우고 있는 내가 우습다. 스스로를 우습게 여겨 마음에 그늘을 만드는 것보다는, 미래를 어제보다 나은 것으로 만드는 것에 가치를 느낀다.


스토리 곳곳에 박힌 그런 힌트들, 그리고 내가 겪은 일상과 힌트들을 연결해 어제보다 나은 삶을 만드는 방법을 찾고자 한다. 연결 방법은 나에게 맞는 것이어야 하고, 나에게 맞는 방법을 만드는 것에 상상력이 필요한 것이다.


이렇게 하고 나니, 여기에 필요한 것은 상상력이 아니라 아이디어가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어쩌면, 힌트를 얻어 부족한 부분을 메우고 잘못된 부분을 수정할 방법을 찾는 것이니 상상력이 아니라 아이디어일 것이 자명하다. 그런데 이것을 굳이 상상력이라 부르는가?


상상이란, 현실에 없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고, 상상력이란 생각의 힘이다


어느 사이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하늘에 닿을 높아졌다가 이젠 회자되지 않는다. 언제나 있는 이런 트렌드 몰이가 일어난 이유는 무엇인가? 스티브 잡스가 보여 상상력이 달성한 경제적 사회적 파장을 기억하는 것이다. 더구나 그러한 달성의 동인이 인문학에서 나왔다는 말에 고전부터 현대물까지 인문학이란 이름이 붙은 책을 찾는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트렌드를 좇는 사람들의 마음속엔 스티브 잡스가 되려고 하려는 열망이 있었던 것일까? 아마도 어제와 다른, 나은 미래를 얻으려는 몸짓이었을 것이다.


부가가치 높은 상상력에 도달하는 험난한 길에서 많은 사람들이 내려왔다. 현재라도 지키자는 마음에서 아쉬움을 남기고 물러 나온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스티브 잡스가 길을 걷기 위해 사용한 동인이 인문학이었더라도 아마도 이러한 방식은 그에게 맞는 방식일 것이다. 인문학이 상상력에 도움이 되는 이유는 본질을 찾으려는 노력들이 적혀 있고, 노력에서 발견된 통찰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맹자에서 발견할 것인가 공자에서 발견할 것인가? 무엇인가 획기적인 방법이 있지 않나 하는 바람이 인문학 열풍에 기름을 부었을 것이다.


아이디어를 내다보면 벽에 부딪힌다. 문제집을 풀다가 길이 맞을 거라 풀기 시작했는데, 틀린 답이 나오거나 답에 도달하지 못하는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럼 답안지를 보고 자신이 놓친 부분을 찾거나 적합한 공식을 알게 된다. 그래서 답을 낸다. 이러한 방식은 굉장히 현실적이다. 되지도 않을 고민을 하는 것보다 정답을 보고 얼른 고치는 것이 현실적인 방편이다. 그러나 인문학 내에는 정답이 없었을 것이다. 아니 인문학은 정답을 눈앞에 보여주는 분야가 아니다


얼마 아이가 수학을 공부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푸념을 한다. 성적도 결코 낮지 않은 아이가 그러니 필자는 충격을 느낀다

수학 시간에 배운 내용을 사용할 곳을 찾지 못했니?”


필자도 나이에 느낀 일이긴 하다. 우리는 2 방정식이나 미적분, 로그 계산을 어디에 사용하려고 배운 것일까? 당시 필자가 선생님께 들은 말씀은

너희들이 사칙연산 이상은 현실에서 사용할 일이 없다 생각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수학이라는 학문은 너희가 시장에 가서 계산을 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학문이 아니다. 현상을 논리적으로 해석하고 이해하며 문제를 해결할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힘을 알려주는, 과학적인 방식을 배우는 시간이다.”


당시에도 살에 닿지 않던 대답을 내가 아이에게 했다. 아이도 나와 마찬가지로 이해가 닿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아이디어를 상상력이라 칭한 것은, 전에 없는, 획기적인, 부가가치가 방법을 찾으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빠르게 해답에 도달해서 얼른 나아져야 하지 않겠나. 그러니 획기적인 방법을 창작해 내야 하고, 이러한 힘이 상상력이라 필자는 믿고 있다. 만일 나에게 상상력이 있었다면, 아이가 알아듣고 이해하기 쉬운 표현으로 설명하지 않았을까? 그런 아이디어를 내는 것이 상상력의 힘이 아닐까?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아이가 이해할 있는 수준은 이만큼, 내가 설명하려는 본질은 이런 내용. 주어진 문제는 2가지의 힌트를 담고 있다. 그럼 내용을 어떤 그림에 담을 것인가? 마름모 한쪽 각의 크기를 계산해 내야 하는 아이에게, 그걸 계산해 내면, 직접 손으로 잡을 수는 없어도 네가 문제를 해결할 생각의 힘을 기를 있어라고 알려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럼 내가 상상력이 있다면 어떨까? 밥을 내가 직접 수저로 떠서 입에 넣어주는 이런 방식의 형태 말고, 아이가 수학이라는 학문이 필요한 깨달을 있도록 힌트를 주는 방법은 생각해 내지 않았을까? 이러니 상상력에 대한 마름이 생기는 것이다. 스스로 깨닫게 도와주는 것이 교육이다. 그러니 이렇게 어려운, 비현실적인 방식을 그려내려 노력한다. 그것이 맞는 방법이다. 다만 내가 역량이 안되는 것이다.


다음엔 어떤 상상력 있는 사람이 이룬 성과를 살펴볼까? 그리고 내게 필요한 상상력은 사각형일까 원형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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