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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의 가방
가와카미 히로미 지음, 서은혜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3년 3월
평점 :
절판
사랑하며 망설임이 들면, 행복한 시간은 더욱 짧아 진다.
상대가 누구든, 사랑하게 되면, 아니 상대가 특별해지면, 그렇게 살면 된다. 상대랑 같이 있는 것이 포근해지면 그렇게 가만히 있는다. 상대랑 같이 있으면 마음이 콩콩 뛰고 세포 하나하나가 살아나는 것 같으면 그대로 가만히 있는다. 그 가슴 벅찬 경험은 가만히 있으면 계속된다.
그러나 상대를 규정하려 하면, 걱정이 생긴다. 망설임이 생긴다. 포근함이 가슴 벅참이 걱정으로 근심으로 변한다. 그렇게 지옥에 스스로 발을 들여 놓을 필요는 없다.
규정되지 않으면 어떤가? 나는 그로 인해 세포가 살아나고 포근함에 감싸여 있을 수 있는데.
걱정이 생기고 근심이 생기면 행복은 약해진다. 그 사람을 만나기 전처럼, 아니면 없던 근심도 걱정도 생긴다. 바로 인간사 고난의 시작인 것이다.
욕심일까? 상대에게 명확한 명찰을 달아주려는 마음은. 왜 이대로는 안된다고 생각할까? 왜 이 포근함을 세포가 살아 있음을 영원히 느끼려는 욕심은 내지 못할까?
왜 상대가 명확한 명찰을 달면 그 포근함이 그 세포가 살아 있음을 느끼는 것이 더 커지거나 영원해질 거라 생각할까?
어쩌면 지옥은 신이 만든 징벌의 공간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구축하는 괴로움이 공간일지도 모른다.
싱글벙글하며 선생님은 자신의 술을 내 잔에 따르려 했다. 이건 보기 드문 일이다. 우리는 서로의 술이나 안주를 간섭하지 않기로 되어 있다. 주문도 각자 한다. 술은 각자 따르고, 계산도 따로따로. 그런 방식을 지켜 온 것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선생님이 자신의 술을 따라 준다. 암묵적인 원칙을 이렇게 때가니… 이렇게 된 게 모두 교진이 쓸데없이 이겼기 때문이다. 나와 선생님 사이의 상쾌한 거리를 마구 좁히려 들다니, 이 개똥 같은 교진!
혼자였다. 버스도 혼자 타고, 길을 걸을 때도 혼자, 장을 볼 때도 혼자, 술을 마실 때도 혼자였다. 선생님과 함께 있을 때도 예전에 혼자서 지낼 때와 별다른 느낌의 변화는 없었다. 그렇다면 굳이 선생님과 같이 있을 필요도 없건만, 함께 있는 편이 온당한 득한 느낌이 들었다. 온당하다는 것도 묘한 소린가? 새로 산 책의 띠지를 벗겨 버리지 않고, 그냥 두고 싶은 것과 같은 심정이라고나 할 수 있을까? 띠지로 비유된 것을 알면 선생님이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
이렇게도 많은 생물들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도시에 있을 때는 언제나 혼자, 가끔씩 선생님과 둘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도시에는 커다란 생물만 살고 있다. 그렇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도시에 있을 때도 주의 깊게 관찰해 보면, 수많은 생물들에 둘러싸여 있었을 게 틀림없다. 선생님과 나, 딱 둘뿐이었던 게 아니다. 술집만 하더라도 언제나 선생님만 눈에 들어왔다. 그렇지만 거기엔 사토루 상도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낯익은 손님들도 있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도 정말로 살아 있는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지는 않았다. 살아서 나와 마찬가지로 잡다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휴지를 주워 미리 준비해 온 비닐봉지에 넣는 사람, 빈 병들을 모아 마침 꽃놀이가 끝날 때쯤 찾아온 주류 전문점의 트럭 - 분명히 그 시간에 오도록 미리 부탁을 한 게 틀림없어,라고 다카시는 말했다 - 으로 옮기는 사람, 아직 술이 남아 있는 병들을 술 좋아하는 선생들에게 공평하게 나누어 주는 사람, 울퉁불퉁 해진 땅을 운동장에서 쓰는 바퀴 차로 밀고 다니는 사람, 분실물들을 모아 상자 안에 담고 있는 사람. 선생들은 막힘없이, 마치 훈련된 병사들처럼 움직였다. 바로 조금 전까지 소란스럽던 꽃놀이의 흔적은 한 15분 만에 깨끗하고 말끔하게 사라졌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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