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만 식객 Ⅱ 전3권 완간세트 허영만 식객 Ⅱ
허영만 지음 / 시루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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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허영만 선생님의 작품에 '토'를 다는 것은 현재의 필자로는 감히 할 수 없는 일이다. 식객 I보다 필자가 원하던 요리 만화에 근접하여 독자로서 반길 일이다.

 

모든 요리만화가 철학을 담고 있을 필요는 없다. 그리고 요리 외에도 인간 생활 속 드라마에는 많은 철학적 메시지가 담겨 있다. 그것은 작품이 아니더라도 우리 생활 속에서 관심을 통해 발견할 수 있다. 그동안 '아!'라는 감탄사를 내게 했던 일본의 요리 만화들을 보며, 우리 나라의 요리 만화에서도 이런 시도가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만났다.

 

'한'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사전적 의미로는 '몹시 원망스럽고 억울하거나 안타깝고 슬퍼 응어리진 마음'이라 설명된다. 의미대로 라면 가슴 속에 정신적 '혹'을 달고 다녀 어깨가 쳐질만 한 상태이다. 그러나 이 '한'은 터닝포인트 역할을 하기도 한다. 물론 그러한 기회가 될 때는 밑바닥을 차고 일어날 의지가 더불어 있어야 한다.

 

식객 II 1권에서는 주인공의 과거사가 나온다. 주인공의 과거사에 '한'과 매칭이 될 내용은 없다. 다만 희망이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모습이 나왔고, 친구와의 여행을 계기로 요리가 운명이라는 메시지를 들었을 뿐이다. 필자는 내용과는 상관 없이 그 '한'이라는 것에 관심이 갔다.

 

응어리진 마음을 풀었던 경험이라면 '놓거나' '변하는' 일이 있었다. 어떠한 계기로 원망이 쌓이고 억울함에 치를 떨고, 방법이 없어 안타까워 하다가 그 슬픔과 아픔이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가슴을 꽉 눌었다.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 너에게 방법이 없는 거겠지'란 말을 요사이 빈번히 사용하게 된다. 해결책이 보이지 않고 안개 낀 듯 막막한 상황. 그것이 개선되지 않고 지속될 경우 조금씩 덩어리를 커지게 된다.

 

'놓는다'는 건, 그 일을 더이상 가슴에 담아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해결해야겠다는 마음도 버리고 미련을 두지 않고 '이번엔 실패네'라며 툭툭 털어냈다. 그럴 수 있었기 때문이었고,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강하게 일어나게 되면서 놓게 됐다.

 

'변한다'는 것은 그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뀐 경험이다. 머리 속이 멍하고 아무 생각이 들지 않을 때는 해결책도 방법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 결과 다시는 이런 결정, 자세, 태도, 행동을 하지 않겠다며 사고 방식을 변경했더랬다. 

 

그렇지만 이 두 가지 모두 터닝포인트, 즉 긍정적 결과로 전이되진 않았다. 다만 그 상황이 있던 세계에서 벗어나 다른 세계로 이사를 갔다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한'이 맺히고 치가 덜리고 울음이 멈추지 않을 만큼 극단의 상황으로 가지 않아서 라고 판단하고 있다. '한'이 긍정적 터닝포인트가 될 경우는 '나'를 활활 불태워 결론적으로는, 방법은 다르게 하더라도, 꼭 이루어내고 말리라 라는 결심이 섰을 때일 것이다.

 

막노동판에서 하루하루 보내는 주인공을 친구를 보리밥을 먹자며 어느 산중으로 이끈다. 그 친구는 '변하러' 가는 길에 용기가 나지 않아 주인공을 동반한 것이다. 그 친구는 출가를 하는 변화를 통해 현재에서 벗어나려 한 것 같다. 그러나 그 친구는 한 그루의 나무와 한 몸이 된다. 아직 2권을 읽지 않아 주인공이 왜 밥집 주인이 되었는 지는 알 수 없다.

 

'한'을 터닝포인트로 만드는 또 하나의 계기는, 남의 경우를 보고 의욕에 불이 붙는 경우이다. 그 '남의 경우'가 긍정적이든 현실에서 벗어나는 것이든, 누군가의 삶의 모습을 보고, 자신으로 시선을 돌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긍정적인 터닝포인트가 되는 것.

 

필자가 이 글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한 사람의 인생에는 수많은 드라마가 펼쳐진다. 그 드라마마다 희노애락이 바뀌거나 2가지 이상의 감정이 동시에 일어나기도 한다. 하지만 하루하루를 소모하듯 보내던 주인공이 어떤 계기로 프로 요리사가 되어 남들을 행복하게 하는 모습에 '한'과 '터닝포인트'라는 생각이 들었나 보다.

 

'하루의 보람'을 논하기 전에 우리는 왜 살고 있는가? 의지와 상관없이 이 세계에 태어나서 매일 24시간을 받아 소모하고 있다. 그러나 그 24시간으로 더불어 사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프로의 능력이 있다면 살아가는데 행복과 기쁨이 동반되지 않을까? 인생에서 '한'을 만드는 것보다 남을 행복하게 하여 나도 행복해 지는 것은 어떠할까? 내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지만 내가 가진 능력으로 남의 문제를 해결해 보는 인생은 어떠한가?

 

때로 지는 석양의 붉은 빛만큼 가슴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는 '한'을 안고 살더라도, 더불어 사는 사람들을 도우며 잠시라도 그 '한'을 놓고 하루 24시간을 '변경'하여 기쁨의 덩어리를 키워가는 것은 어떨까? 그 덩어리가 커지면 줄어들지 않은 '한'이 툭하고 내 가슴에서 바닥으로 떨어져 버리진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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