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피엔스 (무선본) -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인간 역사의 대담하고 위대한 질문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조현욱 옮김, 이태수 감수 / 김영사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슬프게도 부지런한 농부들은 그렇게 힘들여 일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그토록 원하던 경제적으로 안정된 미래를 슬프게도 얻지 못했다. 모든 곳에서 지배자와 엘리트가 출현했다. 이들은 농부가 생산한 잉여식량으로 먹고살면서 농부에게는 겨우 연명할 것밖에 남겨주지 않았다.

>> 지금도 그리 다르지 않다. 급여는 일의 양(시간+달성량)에 비례해야 한다. 책임에 비례한다고 하지만 정작 책임은 임원이 지지 않는다. 함께 무대에서 90도로 허리 숙여 인사할 뿐이다.


역사책에 기록된 것은 이들 엘리트의 이야기다. 역사란 다른 모든 사람이 땅을 갈고 물을 운반하는 동안 극소수의 사람이 해온 무엇이다.

>> 땅을 갈고 물을 운반하는 일에 대한 노하우를 기록할 글자를 알거나 기록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남아 있는 기록물이 역사라고 정리하는 이들은 어쩌면 안타까운 존재들이다. 그들이 구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멍에처럼 등에 지고 살기 때문이다.


우리가 특정한 질서를 신뢰하는 것은 그것이 객관적으로 진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믿으면 더 효과적으로 협력하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 이것이 현재의 교육 기반이 아닐까 싶다. 삶을 제대로 살기 위한, 축적된 지혜를 물려주는 것이 아니라 협력 구성원을 양성하는 활동이 되어 버렸다. 


오로지 강요에 의해서만 군대를 조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최소한 일부 지휘관과 병사는 신이든 명예든 조국이든 남성다움이든 돈이든 뭔가를 진심으로 신봉해야만 한다.

>> 이것의 결과가 기록에 남아 있는 반란의 발생과 성공을 설명한다. 폭군과 혼군이 권력을 유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모두 옳은 것을 알고 이를 신앙할 때 과연 폭군, 혼군, 권력 지향자의 횡포가 우리에게 미칠 수 있을까? 이것이 교육의 중요함이다.


보노보와 코끼리 사회는 협력적인 암컷들로 구성된 강력한 네트워크가 통제하고, 자기중심적이고 비협력적인 수컷들은 변방으로 밀려났다.

>> 인간 사회도 다르지 않다. 보노보, 코끼리, 인간 모두 성별이 아니라 개성에 의해 지배권과 변방이 나뉘어 진다.


2013년에 미국 연방대법관 다섯 명은, 그중 셋은 여성이었는데, 동성 결혼 법제화를 선호하는 판결을 내렸다(남성 대법관 네명의 반대를 다수결로 누른 결과였다).


평등을 보장하는 방법은 형편이 더 나은 사람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 이외에는 없다. 모든 개인이 자신이 원하는 바를 할 수 있도록 보장한다면 필연적으로 평등에 금이 간다.

>> 자유 평등의 사회가 아니라 자율 평등의 사회라고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평등은 주어지는 것이 균일한 것이 아니라 기회가 모든 이에게 균일해야 한다는 점이다. 기회가 균일하려면 서류 심사가 1차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는 채용자의 성과를 낮추는 요인이기도 하다. 필요한 자리에 필요한 기술과 역량, 그리고 가능성을 가진 이를 뽑는 방식의 개발이 결국 기업의 성공을 실현할 것이다. 현재 시점이어야 한다. 과거 성과는 이미 지나갔고 그 때 가능하던 일이었다.


역사상 최초의 주화는 기원전 640년경 아나톨리아 서부에 있던 리디아의 왕 알뤼아테스가 만들었다.


3세기에 걸친 모든 박해의 희생자를 다 합친다 해도, 다신교를 믿는 로마인들이 살해한 기독교인은 몇 천명을 넘지 않았다. 이와 대조적으로 이후 1,500년간 기독교인은 사랑과 관용의 종교에 대한 조금 다른 해석을 지키기 위해서 다른 기독교인 수백만 명을 학살했다.

>> 신앙 생활이 잘 되지 않아 고민 되지만, 종교 생활을 못해서 고민한 적은 없다. 희생된 몇 천명의 기독교인의 생명도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후손은 기독교 교리를 명분으로 자신의 권력을 지키려 노력했다. 마녀라고, 과학자들을 칼을 가진 종교인들이 살해한 것이다. 이를 기독교인이라고 지칭하는 점은 좀 억울하다. 하지만 이 문장의 기독교인은 그런 머리 빈 사람들의 대명사일 뿐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만일 즐거운 일이나 불쾌한 일을 경험했을 때 마음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있다면, 거기에는 고통이 없다. 당신이 슬픔을 경험하되 그것이 사라지기를 원하는 집착을 품지 않는다면, 당신은 계속 슬픔을 느끼겠지만 그로부터 고통을 당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슬픔 속에 풍요로움이 있을 수 있다. 당신이 기쁨을 느끼되 그것이 계속 유지되며 더 커지기를 집착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고 계속 기쁨을 느낄 수 있다.

>> 웬지, 철학으로서의 부타이즘을 보는 것 같다.


“지금 나는 무엇을 경험하고 있는가”

>> 그러게…


살생, 음행, 도둑질을 피하라고 했는데, 이런 행동은 반드시 집착(권력과 감각적 기쁨, 그리고 부에 대한)의 불을 지피기 때문이었다.


번뇌는 집착에서 일어난다는 것, 번뇌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집착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데 있다는 것, 집착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실재를 있는 그대로 경험하도록 마음을 훈련시키는데 (후략)


부자가 가난한 자에 비해 특권을 누린다는 것은 우리가 부자에게나 가난한 자에게나 똑같이 적용되는 모든 인간의 보편적 본질보다 돈을 더 중시한다는 의미가 된다.

>> 세계의 지배력은 칼을 부리는 권력이 아니라 돈을 부리는 권력이라 생각된다.


‘지식’의 진정한 시금석은 그것이 진리인가 아닌가가 아니라, 그것이 우리에게 힘을 주느냐의 여부다.

>> 언젠가부터 본능적으로 우리는 가치를 좇고 있는 것 같다. 모험도 불사할 정도로.


바벨탑, 이카루스, 골렘 이야기를 비롯해 수많은 신화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모든 시도는 반드시 실망과 좌절을 부른다고 가르쳤다.

>> 가장 익숙한 이야기는 ‘그일 해서 먹고 살 수 있겠니?’이지 않을까? 생명 유지를 볼모로 삼은 설득 말이다.


작물학, 경제학, 의학, 사회학의 최신 발견을 기초로 한 정책을 펴면 가난을 없앨 수 있다는 것은 상식이 되었다. 그리고 사실 이미 세상에는 최악의 헐벗음에서 벗어난 지역이 많다.

>> 어쩌면 우리가 피부로 느끼는 현재가 잘못된 길일 수 있겠다. 지금 배가 부르다고 해서 지금에 이른 방법이 옳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는 명확한 데, 그렇다면 옳은 것은 무엇인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옳은 것은 그 모습과 속성이 달라져왔다. 지금 옳은 것은 무엇인가?


뉴턴 물리학이나 다윈 생물학에 비슷하기라도 한 것조차 전혀 만들어내지 못했다.

>> 이는 기록에 따른 판단일 뿐이다. 우리가 그동안 무서워서 공포를 느껴 없애 버린, 제어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을 때 우리를 윤택하게 할 수많은 발견과 발명이 흙속에 묻힌 예는 너무도 많았다. 지금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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