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blue0729 > 탈-재현, 신비로운 법칙

 

  

역시 속편은 본편만 못한 것이던가요? ㅎㅎ책을 읽어가서 메시지가 훨씬 간단 명료하게 드러났던 강의였던 것 같습니다.   

<자연과학은 자신의 패러다임이 언젠가 거짓으로 드러날 것임을 전제로 하는 학문이다. 그런 점에서 인문학이 배워야 할 점이라고 생각한다> 라는 말씀 마음에 쏙 와닿았어요.  

또한 '과학이 기술과 결합하여 나타나는 부작용은 어떻게 하냐'라는 저의 참 답답한 질문에도 시원하게  "어쩔수 없죠"라는 답변도 좋았구요 ㅎㅎㅎ  시행착오를 겪으며 가야하는게 인간의 '어쩔 수 없음' 이라고 저는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더욱더 신중에 신중을 가해야 하는 것이겠지요~ (그것 외에 어떤 도리가 있겠어요..) 

제가 받았던 메시지를 몇자 적어봅니다.  

인간은 사유하는 동물입니다. 사유하는 능력은 첨단기술화 되어 우리 삶의 환경을 편리하게 바꾸기도 하였지만, 역설적으로 과거에 대한 추억과 상처, 미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을 이고 가도록 만들었습니다.   

어떤 책에서 읽었던 내용이 생각나더라구요. - 과거와 미래라는 시간의 울타리를 자유롭게 넘나들 때에만 우리는 시간의 독재에서 벗어났다고 느낀다-  생각을 안할 수는 없으니 불안정함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고 현재를 살라는 의미겠지오. 또 애니메이션 쿵푸팬더에서도 나오죠~                                                                                                              

"Yesterday is history. Tommorrow is a mystery.  

Today is a gift. That's why we call it the present."  

현재만이 선물이었습니다 ㅎㅎ  

<과거의 모든 기억과 미래의 막연함을 순간에 끌어당겨 구성하는 힘이 현재> 라는 채운님의 말씀 인상깊었습니다.    불교의 염불외우기, 최근에 각광받고 있는 명상법 '마음챙김' 등등 다 현재를 살도록 일부로 마음을 조정하는 법칙이었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이렇게 간단한 것을 왜 그리 머리터지도록 고민하고 힘들어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나 모르겠습니다 ㅎㅎㅎ  

과학이나 역사나 등등의 학문으로 이 법칙이 들어오면 매우 논란거리가 많아지는데, 우선 개인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탈-재현의 법칙은 저에게 제1의 법칙이 될 것 같습니다.  제가 물건을 쉽게 못버리는 버릇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정말 쓸데없는 짓이었다고 깨닫게 되었어요. 지금 가진 것 모두 잃어버린 다 해도 전혀 마음에 거스름이 없을 듯 하네요.(또 실제로 일어나면 말이 달라지려나요?)ㅎ 

 더해서.. 두 가지 여운이 남네요 - 

1. 사회구조의 부조리 속에서 (혹은 가정적인 이유?) 성장한 사람은 분명히 탈-재현의 사유를 하는 것 자체가 매우 큰 고통으로 올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삶의 한가닥 줄일지도 모르는데 '아니다 그런 사고는 잘못되었다 버려야한다' 라는 강의의 강한 메시지는 정말 가혹했을 것이라 느껴지네요.. 무조건 '부조리에 맞서 투쟁하라'는 내용 대신에 조금만 부드럽게 방법을 가르쳐 주셨어도 괜찮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탈 재현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 흥미가 있는 무언가를 해보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이런 식으로 말이에요.. 인문학이 인간을 사랑하는 학문인 만큼, 깨우침을 강압하는 것 보다도 인간을 사랑할 줄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논란입니다. 전문가가 아니라 들은 풍월이지만^^;; 저의 의견을 필력해볼게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분명 과학이론으로는 근거를 상실했습니다. 뇌의 메커니즘이 과학적으로 검증가능해지면서 -다른 패러다임이 그러하듯이- 전복된 것이죠. 과학적 진리는 한번 뒤집히면 '완전 뻥'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농담삼아 일부 과격한 심리학자와 생물학자들은 '허위'로까지 취급하기도 하구요. 무엇보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이렇게 까임을 당한 이유는 채운선생님이 말씀하신 데로, '자본'이 잠식해버렸기 때문이겠죠. 정신과의사들이 엄청나게 돈벌이를 한 것이 사실이니까요.(그 정신과 의사들도 일이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그들은 분명 진리는 아니지만 '진심'으로 환자들을 도와줬을 거에요)  

  그렇지만 플라톤이 후대 철학자들에 의해 그렇게 까임을 당하면서도 생생히 살아있는 것과 같이, 프로이트 또한 계속해서 부정당하지만 위대하게 평가 받을 여지가 있다고 합니다. 과학성보다는 비과학성 때문이지만요ㅎㅎ 인문학에서 프로이트는 여전히 깊고도 유용한 통찰을 던져준다고 합니다. (최재천, 도정일 공저 '대담'에 수록된 내용입니다) 학문으로서 유용했을 때도, 학문으로써 힘을 상실한 후에도 영원히 죽지 않는 이론을 세우다니// 정말 존경스럽네요, 프로이트..(하나의 예술품으로 느껴지기까지 하네요!ㅎㅎ) 

중구난방 후기 여기서 마칠게요^^  

금요일이 기다려지는 이유! 인.스.1기 홧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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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blue0729 >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정말 끝나기는 하는 걸까 싶었던 10번의 강의가 이렇게 막을 내렸습니다.   

어느 분의 말씀처럼 '용두사미' 였지만 그 강의실에 계시던 소수의 분들은 커다란 희망이라는 씨앗을 하나 품고  

인문학 스터디 1기를 마치셨을거라 생각합니다.

고병권씨와 청중분들이 모두 하나가 되서 호흡했던 강의 였으니까요.  

그 어느 때보다 박수소리도 더 벅차게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인문학 스터디는 이제 사회인으로 출발하는 문가에 선 저에게 어떤 삶을 살아야하는가  

영혼의 눈을 뜰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때론 고뇌와 좌절과 희열과 즐거움을 맛볼 수 있었던 강의들.  

하나하나 소중하게 느껴집니다.(결석 1번, 지각 2번 스스로 성적이 뿌듯하네요^^)    

인문학 스터디 2기는 이제 학교에서 본격적으로 중간기말이 닥쳐올테니...  아쉽기만 합니다.ㅠㅠ    

끝으로..

모자르지만 마지막 강의, 정리해보았어요^^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고병권 


 대한민국은 87년 이후 민주화의 길을 걷고 있다. 그러나 최근 ‘잃어버린 10년’이나 ‘민주주의의 퇴행’이라는 말이 유행하는 것과 같이 사회는 안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사실판단은 뒤로하고 ‘현 정권이 독재의 행태를 보인다.’라고 말했을 때, 그 실체는 무엇일까?  


1. 대한민국은 성숙한 대의민주주의 국가이다. 
 대의 민주주의가 무엇인가하면 다수의 국민을 대표할 정책결정자들이 국민의 의사를 되도록 정확히 반영하여 정치를 하는 체제를 말한다. 더하여 시민단체와 언론, 노동조합, 학생회 등 여러 단체들이 이들이 정치를 잘못하지 못하도록 감시하게 되어있다. 이명박 정부에 들어서 정권과 유착하는 행태를 보이긴 하지만 시민단체나 노동조합들은 어느 때보다 그 기능이 활발한 상태이다. 정부 정책에 대한 국민적 토론이나 의견은 활발히 개진되고 논의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민주주의는 문제가 있다고 난리 법석이다. ‘이명박 정권’을 물러나게 하면 진정한 민주주의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성향은 조금 다를지 몰라도 노무현 정권 때와 이명박 정권은 별로 다른 것이 없다. FTA와 같은 정책적 과제들은 앞뒤가 딱딱 맞고, 일어나는 사건들도 비슷비슷하다. 국회의원들도 서로 정책사항을 가지고 맞붙는 것이 아니라 조금과 덜이라는 정도 차이가지고 격렬하게 싸울 뿐이다. 지금의 이명박 정권을 물러나게 한다 해도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면, 또 다른 이명박 정권이 계속 등장할 것이다. 그렇다면 민주주의의 퇴보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2. 민주주의 이데아는 존재하는가.
 개념이나 실체에 대해 사고할 때, 관념의 환상에 빠지는 것을 주의해야함을 알면서도 우리는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한다. 민주주의가 아직 덜 되었다는 말은 어딘가에 완벽한 민주주의가 존재해서 거기까지 얼마만큼 남았다는 거리의 개념이 된다. 그러나 그런 민주주의는 아무데도 없다. 다만 지구상에 미국형 민주주의 유럽형 민주주의 등 상대적으로 비교할 대상이 있을 뿐이다. 국민성이 모두 다름을 알고 있다면 이 상대적인 민주주의에 우리나라를 무턱대고 비교하면 안 된다는 것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양한 민주주의가 있다는 점을 유의할 때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어떤 문제에 봉착해 있는가? 


3. 얼굴 없는 시민의 난입
 2003년을 앞뒤로 문제는 수면위로 떠올랐다. 바로 촛불시위다. 그 후로 쇠고기 수입, 장갑차사건, E랜드 사태, 스크린쿼터, 한미 FTA, 비정규직문제 그리고 최근 용산참사까지 이런 문제들은 지속적으로 붉어져 나오고 있다. 공통된 특징은 사건의 주체들이 ‘신원불명’이라는 점이다. 시위를 막아서는 경찰이 “너 누구야?”라고 물으면 “저는 어디사는 누구인데요” 답한다. 그러나 경찰은 더욱 당황하며 묻는다. "누구냐니까?! "
대의 민주주의는 대표만이 발언권과 정치권력을 가진 제도이다. 개인이 직접 말하게 되면 그 사람의 성분이 파악되지 않고 따라서 표상되지도 않는다. 익명성이 국민의 맨얼굴이다. 그런데 드러나지 않아야 할 국민들이 촛불을 들고 광장에 나오기 시작했다. 국민들이 대표를 산출하지 않고 ‘직접’ 세상에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로 대의제가 무능력해졌음을 의미한다.  


 가계소득불평등지수를 나타내는 지니계수와 같은 여러 통계자료들을 살펴보면, 대한민국은 민주화가 된 이후부터 양극화가 진행되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민주화정권이 가장 먼저 내세운 캐치 프레이즈는 ‘세계화, 자유화 시대’에 경쟁력 기르기이다. 진정한 자유 속에서 정정당당히 경쟁한다니! 우리는 진정한 유토피아가 도래한 줄 알았다. 하지만 우리는 자유와 경쟁이 무엇을 가져왔는지 지금까지도 잘 깨닫지 못하고 있다. 바로 경쟁에서 도태된 민중들이 발생한다는 사실이고, 이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자유롭게 경쟁하고 있지만 이는 절대 공평한 싸움이 아니다. 이미 돈과 권력을 가진 부유층과 중산계층이 한 우리 안에서 경쟁을 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것이 양극화의 실상이고, 얼굴 없는 시민들이 광장에 등장하는 이유이다.  

4. 대의를 대의하지 않는 민주주의 
 아무리 대의제 체제라지만 대표할 수 있는 사람들은 한정되어있다. 아무리 학생대표를 뽑고, 이주노동자 대표를 뽑고 또 뽑아서 국회로 보낸다고 하지만 이들의 의사는 반영될 수 없다. 또한 뒷배경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의견만이 잘 대의될 것이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렇게 대한민국의 국가 정책은 확고한 대의제 체제 위에 매우 합법하게 ‘소수 대의되는 시민들’만을 위하여 돌아가고 있다. 그러나 그 밖의 밀려난 사람들. 대의되지 않는 익명의 사람들. 이 사람들의 의견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들의 이권은 누가 보장해 주는가? 대표라는 이름으로 대의제의 대표들이 내놓는 정책은 ‘밖의’ 사람들의 목숨을 위협한다. 거의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주노동자들을 강제 출국시키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대폭 늘리고, 고가의 재개발로 이전의 영세한 거주자들을 내쫒는다. 이 모든 것이 경제개발이라는 이름으로 합법적으로 자행된 정책이다. 이뿐인가, 아이의 건강이 걱정돼 유모차를 끌고나온 어머니들을 연행해가고, 철거의 자리에서 결국 사람이 죽게 만든다. 이들이 겪는 삶의 불안감은 그들을 시위하게 만든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무는 법이다.
 여전히 이들을 대표하는 기구를 만들면 되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겠지만 이는 불가능함이 지난 20년간 증명되었다. 대의민주주의의 무능력함이 계속적으로 터져 나오고 있다. 그렇다면 대안은 있는가? 어떤 민주주의로 이행해야하는가? 

5. 아르케 건너편의 오이코스
 아르케는 공공적, 제도적인 정치 영역을 의미한다. 반면 오이코스는 사적이고 개인적인 삶의 영역이다. 인간은 아르케와 오이코스를 적절히 누리며 살고 있다. 아르케에서 쫓겨난 인간은 오이코스의 영역이 확대된다. 약자인 이들은 여기서 서로 연대하고 도와가며 나름의 재미와 삶의 의미를 찾아가며 살아가고 있다. 이는 드러나지는 않지만 위협받으면 엄청난 세력으로 들고 일어날 수 있는 네트워크 권력이라고 할 수 있다. 자격 없는 자들이 근거 없이 사는 것이 오이코스이다. 아무런 권력도 없고 부유하지도 않지만 오로지 삶에 대한 의지와 인간미 넘치는 인심만 가지고 서로 의지하며 산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삶에 대한 집단적 실천, 인간성의 회복은 사람을 살게 한다. 어떻게 아르케 영역까지 연결시킬지 아직 해답은 없지만 민초로써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르케가 공격하더라도 쉽게 무너지지 않을 강력한 삶의 연대를 만드는 것이다. 
      

6. 와 닿았던 말씀들 

 - 사람들과 함께 무언가를 하면서 느끼는 즐거움이 오이코스의 삶입니다. 결핍도 결여도 없고 세상에 부러울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삶을 보면 부자들이 벌벌떨어요. 왜냐하면 빼앗을게 아무것도 없거든요. 더 많이 가지고 있는 자신이 그들보다 즐겁지 못하다는 사실은 매우 공포스럽게 만듭니다. 민중들이 만드는 것이 이런 삶이에요. 자격없는 자들이 근거 없이 사는것. 근거가 다른 사람들이 근거를 넘어 연대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민주주의입니다.  

-아무거나 '같이' 하세요. 아이폰 모임을 만들고 독서토론 동호회에 나가고. 자신들이 즐기는 것 아무거나 같이 하세요.  여기서 연대의 힘이 나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오늘 배운 것을 포함해서 이건 저렇다 저건 저렇다 가르치려 하지 마세요. 절대 도움안됩니다. 교화하겠다는 생각은 오만한 거에요. 아무말 없이 같이 무언가를 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실천입니다.  

+ 질문을 한 저를 고병권 선생님이 안타깝게 바라보셨었는데 ..ㅎㅎㅎ  사실 저 여러 모임 하구있다구요!!! 저만이 아니라 같이 움직여야 큰 힘이 발휘 될텐데, 사람들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어떻게 하면 바꿀 수 있을까 답답해서 해본 질문이었었습니다. 흐윽ㅠ  어리석은 중생이 된 기분이었어요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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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blue0729 > 색즉시공을 외치기에는..


 

  '색즉시공'을 외치기에는 이번 수업 만으로는, 불교에 대한 개념이 턱없이 모자른 듯 하네요..^^   

저번 '주체란 무엇인가' 에 대해서 전혀 글을 올리지 않았던 바 반성하며, 써 놓은 글을 올리긴하는데.. 

지금도.. 잘하는 것인지 모르겠네요^^;;; 

'독화살의 비유'에서 느꼈던 점을 집중적으로 쓴 것이니  아무리 편협하게 느껴지시더라도 이해해 주시길..  

써 놓은 글을 올리는 것이라.. 경어체 쓰지 못한점 죄송합니다. 

[공이란 무엇인가] 후기

  매우 기대하던 수업이었는데, 안타깝게도 40분이나 늦는 불상사가 벌어졌다. 그럼에도 꽉 막힌 버스 안에서 내내 마음 편히 평안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김영진 선생님의 <공이란 무엇인가>를 읽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역시 기대했던 것을 뛰어넘는 텍스트였다. 

  불교 집안에서 태어나 절에 몇 번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불교에 대해서는 일자무식이었다. 그래도 도덕책에서 언뜻 보이는 ‘공’사상이나 만화에서 접한 ‘공자를 만나면 공자를 죽이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와 같은 글귀에 홀려 불교에 대한 아련한 매력만을 가지고 있었다. 배울 시간이 없다 미루고 미루던 중, 드디어 김영진 선생님의 수업으로 불교에 첫 걸음을 내딛게 된 것이다. 

  앞의 수업을 못 듣고 바로 ‘독화살의 비유’를 설명하시는 부분부터 들었는데, 이해가 되면서도 안 되는 이상한 기분이었다. 게다가 몇몇 부분은 나를 회의주의로 몰아가기까지 했다. 더 깊은 이해도 없이 감정만이 앞선다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끼지만, 이를 짚고 넘어감 없이는 피안의 세계로 갈 수 없을 것 같으니. 우문(愚問)을 시작해보려 한다.

*형이상학의 질문에 無記로 답함.

  독화살의 비유에서 등장하는 만동자의 질문은 분명 실존에 대한 형이상학적 질문이었다. 이에 무기(無記)로 답한 부처님. 부처님의 설법 자리에 데카르트를 비롯한 서양 철학자들이 있었다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궁금해지는 대목이었다. 그렇게 과격한 은유가 아니었을 텐데, 내가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인가? 혹은 과도한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인가? 독화살의 비유를 듣고 나니, 형이상학의 질문을 이어받아 자신들만의 독특한 세계관을 만들어 온 철학자들이 모두 ‘독화살에 맞은 채로 독화살에 대해 논하고 있는 사람’으로 느껴진 것이다.  

  ‘나는 존재하는가? 내 삶에 의미가 있는가? 영혼은 있는가?’ 이런 고민을 매일 일삼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지만,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이런 고민들을 한다. 고민이 곧 고통임을 불교에서 말하는 어리석음임을 인정하지만, 고민은 삶을 꾸려나가는 원동력이 된다. 불교는 어떻게 탄생했는가? 바로 고통 극복을 위한 것이었다. 고통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공함’을 알게 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만동자의 고민이 깨달음을 얻기 전 고타마 싯다르타가 가지고 있었던 고통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의문스럽다. 내가 볼 때, 고민을 하는 만동자는 분명 답을 구하는 과정에서 싯다르타처럼 깨달음을 얻게 될 것 같기 때문이다.  

   결국 난 ‘형이상학의 질문들이 왜 필요가 없는가?’라고 부처님께 따지고 싶은 것이다. 형이상학의 질문에 매몰되는 것은 경계해야겠지만, 형이상학은 개인에게는 자신을 알게 하고 사회에는 올바른 윤리관을 제시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의 행동을 유발하는 기제는 인간의 -의식이든 무의식이든-‘사고’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 ‘사고’에 대해 성찰하는 것이 형이상학이라고 나는 이해하고 있다. 드러내어 논의 해야지만, 즉 따져 묻고 잘못된 점은 없는지 성토해 봐야지만 어리석은 인간으로서 그나마 올바르게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독화살에 대한 주객전도 된’ 논의라니. 

  만동자의 에피소드 후에 반야경과 금강경의 내용을 듣고 있으려니, 역설적이게도 만동자가 한 형이상학적 질문의 답을 열심히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존재의 본질에 대한 고찰, 실체의 부정. 앞의 1)재현이란 무엇인가 2)주체란 무엇인가의 교훈도 고스란히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닌가. 부단한 차이화만이 존재의 방식이라는 점에서 ‘나 없음’을 주장하는 사르트르의 실존철학과도 매우 흡사해 보였다. 인간을 결국에 자유롭게 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올바른 지(知)라고 결정론이 결론을 맺는 것처럼, 불교도 ‘반야’를 통해 ‘바라밀다’한다고 말한다. 사법인과 연기법에 이은 ‘공’사상. 이렇게 깨달음으로 가는 설법을 할 것이었으면서, 왜 형이상학의 ‘물음’은 원천봉쇄 해버렸단 말인가. 깨달음이 있기 전에 물음이 먼저 있어야 함인데 말이다.  

  사실.. 깨달음의 기쁨을 누리며 공부에서 스스로를 발견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그를 부정당하는 것 같아 매우 거부감이 들었었다. 그러나 글을 쓰고 난 뒤인 지금, 결국 불교 자체도 내가 필요 하다면 삶에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상일 뿐이고, 앎에 이르게 한다는 점에서 다른 철학 이론들과 크게 배치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하나의 번민을 넘어오니 불교의 사상에 한결 가깝게 다가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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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blue0729 > 역사에서 재현의 역할에 대한 궁금증


 

  저번에 강의 정리글을 올린, 정말 어줍지 않지만 진화생물학과 뇌과학, 인문학에 관심만 많은 처자입니다.^^
나온 지는 꽤 되었지만 인문학에 대해 알아보겠다고 지금에서야 (도정일, 최재천 공저) '대담'을 읽고 있습니다. 잠시 딴소리를 하자면^^;;, 인문학과 자연과학은 인간의 사회, 정치, 문화와 같은 행동 양식을 제시한다는 측면에서 -한 쪽은 재료를 제공하고 한 쪽은 설계도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인문학 스터디인 우리는 자연과학의 문제에도 꼭 관심을 가져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본론으로 들어와서~ 저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첫 번째로, 인문학에서 탈재현이라는 개념은 그 자체로 인문학을 돌아보게 하는 역할을 하는 듯이 보입니다. 개념에 대한 끝없는 비판, 반성이라는 측면에서 ‘철학하기’와는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두 번째로,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재현적 사고를 하게 된다면, 탈 재현은 어떻게 일어나는가에 대한 의문입니다. 개별 인간의 관점이 아니라 적어도 사회라는 거시적 관점에서, 자신이 쌓은 공든 탑을 무너뜨리는 탈 재현은 결국 또 다른 이상향을 상상하는 ‘재현’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닙니까?   

  대담을 보면 <인간의 이상과 꿈이 인간 존재의 보편적 존엄을 실현하자는 것이라면, 그 꿈을 향한 발걸음은 적어도 역사의 제한된 시간폭 안에서는 진보라고 할 수 있다>라고, 인문학자 도정일님이 말하십니다. 노예제 사회가 폐지되고 보편인권을 주장할 수 있게 된 사회는 더 나은 사회로 ‘발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채운님은 푸코의 예를 들어 <역사 속에서 발전이라는 개념은 없다>라고 일축하셨지만, 이상향을 그릴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은 이전보다 더 많은 사람들의 존엄성을 수호하기 위해 -그 결과가 어찌되던지 간에- 새로운 사회체제를 만들어내는 ‘원동력’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상상력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상향을 그리는 능력을 통해 군주제부터 제국주의, 공산주의를 거쳐 민주주의를 만들었지 않습니까. 정치, 법, 규율 등 사회양식은 그 체제를 바탕으로 만들어집니다.  이상향을 그리지 않고서 어떻게 기존의 불합리한 사회체제에 맞서 구체적인 대안이 되는 사회체제를 제시할 수 있는지요.    

  이런 이상향을 그리는 능력도 채운님의 강의에 조심스럽게 따르자면, ‘재현’이라고 느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탈재현의 논리가 재현의 ‘사회구성 기능’을 거세하려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듭니다.  

  질문이 참 논리적 비하에 빠져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ㅠ 저의 논리에 따르면 이런 궁금증이 생기더라구요. 어디에서 제가 잘못된 것인지, 아니면 재현은 또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채운 선생님 외에도 스터디를 같이하는 사우(師友)로서^^ 여러분의 의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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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blue0729 > [1강. 재현이란 무엇인가] 후기!


경어체 쓰지 못한점 정말 죄송합니다ㅠ 조금더 격식있게 써보고 싶어서요~   

죄송합니다^^  

 

2010. 1. 15. 첫 시간
1. 재현이란 무엇인가
               -채운 선생님

 천신만고 끝에 인문학스터디 1기에 참여하게 된지라, 강의를 듣기 전 완벽히 준비를 해야겠다는 열정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교제로 지정된 ‘개념어총서’도 못 읽어보는 불상사가 벌어진 것이다. 첫 강의시작 전. ‘재현’이라는 단어조차 생소한데 과연 강의를 잘 이해하고 전부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 에서부터 높은 경쟁률을 뚫고 1기가 되었는데 그 값어치를 내가 해낼 수 있을까하는 걱정들이 머릿속을 맴돌며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그러나 강의가 끝난 지금, ‘책 주문하기’를 후다닥닥 누를 수밖에 없었다. 강의는 그 자체로 완전무결한 감동적인 연설이었고, 적어도 나 하나의 인생관을 뒤흔들어 놓기 충분했기 때문이다. 물론 나와 같은 느낌을 받은 분들이 대다수일 것이라 확언할 수 있다. 이 깨우침이 날아가기 전에 나름 강의를 정리해놓기로 한다.

1. 재현이란 무엇인가
 최근 개봉한 영화 ‘아바타’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나듯이 우리는 ‘이상향’을 꿈꾸며 산다. 모든 존재들이 아름답고, 행복한 세상을 꿈꾸는 것이 무엇이 잘못 됐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해야 한다. 인간의 존재방식을 돌아보건대, 인간의 역사에서 이상적인 세계는 과거에도 없었고 또한 미래에도 절대 오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리는 이상향에 가까운 찬란한 문화 부흥의 시대였던 ‘르네상스’와 ‘영,정조시대’는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 반박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대를 문화 부흥의 시대라고 규정지을 수 있는 증거들을 보면, 그 시대를 완벽히 지배했던 것이 아니라 다양한 성향들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르네상스 시대에 배고파서 굶어죽은 거지가 단 한명도 없었을 것이라 아무도 단언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재현의 특성이다. 아무런 의미도 인과도 없는 세상을 마치 그런 것 마냥 자신의 잣대로 세상을 판단하는 것. 이것이 재현이다.

2. 재현의 세계에 사는 우리
 우리의 생존방식은 ‘개념’의 재현이다. 개념이 무엇인가 하면 세상만물에 대한 자신만의 ‘정의’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장면을 보고 ‘정말 비인간적이다’라고 말했다면 그 사람은 ‘비인간적’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어느 정도까지를 인간적이라고 부르고 비인간적이라고 부를지 스스로 정했다는 말이다. 이렇게 개인은 개인만의 개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의 단어에도 세상 사람의 숫자만큼의 다다른 개념이 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그래서 위의 같은 장면을 보고도 어떤 사람은 ‘왜 괜찮은데?’라는 판단을 하게 될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정의한 ‘개념’을 끊임없이 재현하며 산다. 자신의 개념에 따라 상황을 파악하고, 가치판단을 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학자 푸코는 ‘모든 사람들은 투명한 어항 속에 갇혀 있다.’라고 말했다.

3. 재현의 커다란 함정    

 우리는 우리가 가진 개념을 ‘진리’로 믿기 때문에 큰 오류를 범할 위험을 가진다. 꼭 진리로 믿어야지 라고 결심해서 믿는다는 것이 아니라, 의식하는 메커니즘이 이미 그렇게 작동되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 모든 지배계층은 ‘국민’을 위해 정치를 한다. 심지어, 이명박 정부의 회의에서 가장 많이 들을 수 있는 단어가 ‘국민을 위해서’ 라는 말이란다. 그런데, 정작 국민은 그런 것을 원한 적이 없다. 지배계층은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국민’의 개념에 맞추어서 국민들을 위한 정치를 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그래서 진리일 수는 없으나 진심일 수는 있다고 한다.) 지배계층은 끝없이 진정한 유토피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지만 번번하게 실패한다. 과학자는 단 하나의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 탐구하지만 후학들에 의해 그 진리는 깨지게 된다. ‘재현’이 어쩔 수없는 우리의 생존 방식이라서 발생하는 문제점은 바로 이 ‘진리를 추구한다.’는 점이다. 사랑을 하는 사람은 곧잘 생각한다. 애인과 매번 싸우고, 오해로 점철된 힘든 사랑을 하지만, 이상적인 사랑은 어딘가에는 있을 것 이라고. 이상적인 사랑, 즉 개념의 진리가 존재한다는 믿음. 이것이 우리를 현실에 살지 못하게 하는 주범이다. 재현이라는 단어로 설명하면, 나만의 개념으로 만들어진 이상향을 계속 재현하면서 진짜가 아닌 ‘가상현실’속에 사는 것이다. 진리를 찾기 위해 우리는 세계의 진정한 모습인 ‘변화, 사건’을 무시한다. 그대로 즐길 줄을 모른다는 말이다. 나만의 이상향을 추구하기위해 현실을 희생한다. 괴로워도 참고, 힘들어도 그냥 한다. 하지만, 정말 안타깝게도 ‘진리는 없다.’ 세상은 계속 변화하는 흐름 속에 존재할 뿐이다.
 

4. 지배담론이 재현을 통해 구성 될 수밖에 없는 이유
 재현은 1. 재인식 2. 상식(양식)이라는 논리를 가진다. 먼저, 재인식은 인식의 주체와 인식의 대상을 불변한 것으로 보고, 같은 방식으로 인식을 반복하는 것을 말한다. 나도 변하지 않고 너도 변하지 않으니 판단을 달리할 이유가 없다는 의미다. 그래서 이런 불평들을 한다. 하루하루가 지겨워, 오늘도 어제와 별다를 거 없어, 비슷비슷해 등등. 그러나 매우 놀랍게도(?) 인식의 주체인 ‘나’도 매일매일이 다르며 인식의 대상인 ‘세계’는 말할 것도 없이 계속계속 변화한다. 그렇게 따지면 우리는 개념을 항상 수정해야 할 것인데, 우리는 지적으로 게으른 동물이므로 그냥 내버려둔다. 그러니 오류가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쉽게 자신만의 고정관념에 빠져 그 세계에서만 살게 되거나, 자신이 쌓아 올린 것이 무너질까봐 전전긍긍하며 살게 된다. 전부, 변화를 인정하지 않는데서 발생한다. 내가 가진 것(가진 것이 있기는 한가!)들이 시간이 흐르면 또 변한다는 사실. 사실 내 삶이 재인식의 연속이었다는 사실 말이다!
 두 번째로 상식(양식)의 논리이다. 개인들이 재현에 한번 쯤 의심을 품지 못하고 습에 젖어 살아가는 막강한 파워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보편적인 것이 진리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다수가 전부를 대표한다는 말이다. 재현의 기준이 되는 개념은 이렇게 ‘상식’선에서 결정된다. 너도 나도 저 사람도 믿으니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냐는 논리인 것이다. 분명 최다수는 경향을 말해주지만 그것을 진리로 볼 것이냐는 또 다른 문제이다. 다양성을 인정하고 관용을 베풀기 위해서는, 혹은 내 개념이 틀렸다는 것을 나중에 인정하기 위해서는 개념을 경향으로서만 인정하는 현명함이 필요하다.

5. 재현의 세계에서 탈주하기! 
 그렇다면 어떻게 재현의 세계에서 탈주 할 수 있는가. 재현은 인간이 가진 어쩔 수없는 특성인데 어떻게 그를 벗어난단 말인가. 우리는 스스로를 감시하는 철학자가 되어야한다. 철학자는 어떠한 개념과 현상에 ‘왜 그런데?’라고 비판을 하는 사람이다. 스스로 믿고 추구하는 것에 맹목적이 되지 않도록, 나 자신을 먼 거리에서 조망하며 ‘그게 정말로 맞는 것인가?’라고 반문하는 자세. 이것만이 재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다. 당연히 지금까지 자신이 쌓아온 것을 부수는 작업이므로 허무함과 괴로움을 동반한다. 그렇게 부술 거면, 지금까지 이룬 것들을 부정할 것이라면 왜하느냐! 라고 비관하고 비난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끊임없이 만들고 부수고, 만들고 부수는 과정 자체가 삶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좌절, 외로움, 분노, 절망 등 온갖 고통을 당하겠지만 반면에 행복, 뿌듯함, 감사, 즐거움, 짜릿함 등의 온갖 달콤함도 맛볼 수 있다. 그 모든 것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자체를 즐기는 자세. 그 가운데 열정을 잃지 않는 모습. 이것이 재현을 벗어나 분명한 나로 사는 길일 것이다. 
 

6. 청중과 선생님의 질의&응답

(1) 강의를 들으며 내내 마음이 불편했던 것이 나의 ’가치관’을 부정한다는 도전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개념과 가치관의 차이는 무엇이라 생각하나?
-> 매우 비슷하게 느껴져서 혼동이 있었을 수도 있겠다. 개념은 무의식적으로 우리가 그냥 하는 행위의 메커니즘이고 가치관은 스스로 가지고 있는 의지적 판단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바람직한 가치관을 가지는 것은 재현을 탈피하는 것과는 상관없는 말이다. 바람직한 가치관은 꼭 필요하다.

(2) 많은 ‘자기개발서’들은 선생님의 강의에 의하면 재현적 삶을 되풀이 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이상향인 ‘꿈과 비전’이 없으면 삶의 방향성을 잃게 되는 것 아닌가?
-> 우리는 꿈, 비전이라는 말을 잘못 정의하고 있다. 예를 들어 영화감독이 되는 것이 꿈이야. 라고 비전을 정했다면, 연극 영화과에 진학해서 우수한 성적을 받고 충무로에 가서 영화를 찍고 그 영화가 크게 성공해야지 꿈을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단지, 코스를 밟아서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것이지 비전이나 꿈이 아니다. 비전이나 꿈은 ‘우주에서 우리가 어디쯤의 위치를 차지할 것인지’ 그 자리를 정하는 것이다. 나와 같은 경우는 ‘내가 받은 도움을 지적 활동을 통해 만인들에게 모두 봉헌하는 것’ 이것이 나의 비전이고, 보시다시피 지금도 그 비전을 계속 이루고 있다.

 여기까지가 내가 채운선생님의 강의를 듣고 이해한 내용이다. ‘개념어총서 재현이란 무엇인가’의 내용을 그대로 요약해놓은 글 밖에 되지 않을 듯하지만, 나 나름대로 정리했다는데서 만족감을 느낀다. (나중에 부정되더라도 지금 즐기려는 것?) 강의가 끝난 후 정말 기립박수를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호모 쿵푸스’를 읽고 난 뒤, 앎의 코뮌을 형성해 지(知)를 추구하며 살고 있지만 그래도 풀리지 않는 갑갑증이 있었던 것이다. 오늘 그 실체를 낱낱이 파악했고 철학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던 아주 즐거운 시간이었다. 벌써 다음시간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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