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의 말 - 정치적인 것에 대한 마지막 인터뷰 마음산책의 '말' 시리즈
한나 아렌트 지음, 윤철희 옮김 / 마음산책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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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의 말은 아렌트가 가졌던 네 편의 인터뷰를 모은 책이다. 정치 이론가로서 그는 많은 저작을 통해 자신의 사유를 개진했다. 하지만 아렌트는 다른 철학자들과 달리 스토리텔링(사유가 어떻게 개념화했는지, 그리고 개념을 어떻게 풀어낼 수 있는지 설명하는 작업)과 메타포(은유)를 한껏 활용해 글을 전개했다. 여기에 그의 난해한 텍스트가 더해져, 그의 사상을 쉽게 이해하긴 힘들다. 아렌트는 이 책에 담긴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사상을 풀어내고, 여기에 더해진 갖가지 오해들을 설명한다. 가령 온 유대인 지식인들의 비난 대상이었던 악의 평범성에 담긴 오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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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절대로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일이에요. 단순히 희생자의 규모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에요. 그런 짓을 자행한 방법, 시신 훼손 등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그와 관련해서 자세히 언급할 필요는 없다고 봐요. 이건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에요.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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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에서 일어난 유대인 대학살은 그의 세계를 뒤바꿔 놓는 대사건이었다. 전체주의가 만들어낸 폭력은 거대한 심연과도 같았다.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될, 앞으로도 있어선 안 될 일이 나치에 의해 계획적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이 일을 저지른 나치의 가담자들은 절대 악마가 아니었다. 그는 아이히만이 아무런 범행 동기도 없었던 평범한 공무원에 불과했다고 말한다. 범행을 저지른 인간을 악마로 묘사하는 것은, 그자를 평범한 인간을 넘어선 특별한 존재로 만든다. 하지만 아이히만은 지극히 평범하다는 점에서 악마가 아니었다. 단지 그는 남들이 무슨 일을 겪는지 상상하길 꺼리는, 지극히 멍청한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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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히만은 완벽하게 지적이었지만 이 측면에서는 멍청했어요……. 남들이 무슨 일을 겪는지 상상하길 꺼리는 단순한 심리만 있을 뿐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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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는 사람들이 악의 평범성을 흔한 것으로 착각한다고 말한다. 악의 평범성은 일상적인 아이히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달리 말하면 평범성은 멍청함과 어울린다. 우린 뛰어난 지적 능력을 바탕으로 학문적 성취를 이룬 사람을 볼 수 있다. 하지만 탁월한 이들이 정작 타인이 겪는 고통을 공감하지 못 하는 경우도 심상치 않게 볼 수 있다. 이 자리에 악의 평범성이 뿌리를 내린다. “다른 모든 사람의 처지에서 생각하는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자기가 결정한 일이 초래할 결과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이 바로 사유하지 않음이며 멍청함이다. 타인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인물과 말하는 것은 벽돌담을 상대로 말을 거는 것과 같다. 아이히만은 이런 의미에서 멍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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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내면에는 기껏해야 심리 유보만 있어요. 그것들은 허깨비들이 하는 거짓말이에요.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대단히 역겨운 거짓말이요. 관료제는 대량 학살을 행정적으로 자행했고, 그런 상황은 여느 관료제가 그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익명성의 느낌을 창출해냈어요. 개별적인 인간은 사라졌어요, 관련 개인이 판사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그는 다시금 인간이 돼요, ... 그 사람이 저는 그저 관료일 뿐이었습니다하고 말하면 판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잘 들어요. 당신이 여기 있는 이유는 그게 아니오. 당신이 여기에 서 있는 것은 당신이 인간이고 당신이 어떤 짓들을 저질렀기 때문이오.”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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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이히샬퉁(Gleichschaltung)이란 정치적 획일화를 의미한다. 이는 자신의 직위를 안전하게 지키거나 일자리를 얻으려고 나치즘에 투항한 현상을 가리킨다. 글라이히샬퉁과 더불어 사람들은 내면적 이민’, ‘어쩔 수 없음으로 자신의 행위를 변명한다. 공적으로 나치와 협력했을지라도, 내면적 영혼, 즉 양심은 이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엔 외면적 저항만이 있을 뿐이다. 전체주의는 개별 인간을 소멸시켰다. 는 전체 앞에서 무릎을 꿇고, 무수히 많은 대중의 일원이 된다. 나는 전체 앞에선 익명에 불과하다. 하지만 법원 앞에선 다시금 인간이 된다. 그들의 양심이 어땠는지는 고려사항이 될 수 없다. 외면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다면, 자신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선 책임을 져야 한다. 동기가 아닌 결과로 판단하는 것이 법이기 때문에 나치 가담자들은 처벌을 면할 수 없다. 멍청함은 죄를 덜어내는 변명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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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과 불일치하는 것보다는 세계 전체와 불일치하는 편이 낫다. 나는 통일체니까.” 소크라테스가 내놓은 이 명제는 아렌트 사유 개념의 핵심을 꿰뚫는다. 사유는 나와 나 자신과 끊임없는 대화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이 사유는 타인의 처지를 고려하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방향을 따라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이다. 사유는 실천적이다. 자신이 어떤 고민을 하든 행위(action)로 드러내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사유를 통해 나 자신과 소리 없는 대화를 진행하고, 자신의 행위를 돌이켜보는 것, 이것이 바로 아렌트가 이야기한, 인간적인 삶이다.

 

사람은 그가 아무것도 행하지 않을 때보다 더 활동적인 적이 없으며, 그가 혼자 있을 때보다 더 외롭지 않은 적은 없다.”
인간의 조건p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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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아렌트 입문자에게 쉬운 책이 아니다. 대담집이기 때문에 글 자체가 어렵진 않지만, 기본적으로 아렌트의 사상 전반을 이해했다는 전제하에 인터뷰가 진행된다. 따라서 아렌트 초심자들은 아렌트가 말하는 메타포에 휩쓸려 그 뜻을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시간이 된다면 전체주의의 기원,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공화국의 위기, 혁명론, 인간의 조건등을 읽어보길 바란다. 이런 사전 작업이 뒷받침된다면, 악의 평범성 외의 다른 개념, 학생운동의 실패, 3세계의 허구성, 정치에서 거짓말, 평의회, 공화주의적 자유가 어떤 의미로 쓰였는지 알게 될 것이다. 아렌트의 숨결을 있는 그대로 느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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