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변동 : 위기, 선택, 변화 -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재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강주헌 옮김 / 김영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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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는 우리 곁에 머문다.

『총, 균, 쇠』의 저자로 유명한 제래드 다이아몬드 교수는 60년 문명 탐사의 결정판으로 『대변동: 위기, 선택, 변화』를 출간했다. 『총, 균, 쇠』를 비롯하여 그 이전에 저술한 책들이 인간과 국가 그리고 문명의 과거를 추적한다면, 이번 『대변동』에서는 미래를 향한다. 애초 생리학을 전공했던 그는 그 외 다른 분야인 역사학, 지리학, 언어학, 인류학, 생물학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압도적인 배경지식과 비교 연구 방식, 그리고 스토리텔링으로 각 국가가 겪었던 위기들을 총합하고, 이와 더불어 현재 우리가 마주해야 하는 위험들을 집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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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위기에 직면한다. 그 위기는 나와 다른 외적 대상에 의해 발생할 수 있고 내적인 갈등(정치적 갈등, 쿠데타 등)으로 발생할 수 있다. 위기가 지닌 빈도와 기간, 그리고 영향력에 따라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위기는 ‘중대한 위기’이다. 개인으로 비유하자면 경제적으로 파산하여 재기불능 상태에 놓이거나 개인의 생명이 끊어질 뻔한 사건 같이 극단적이고, 위험한 위기이다. 저자는 개인이 경험하는 중대한 위기를 국가로 확장한다. 개인이 경험하는 위기와 그것을 해결하고자 하는 방법은 국가의 그것과 상당히 유사하다는 것이 저자의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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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개인과 엄연히 다르다. 하지만 저자는 개인의 위기를 바라보는 렌즈를 사용해 국가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그 이유는 심리치료사들이 찾은 개인의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12가지 요인이 국가에도 거의 비슷하게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위기를 바라보는 12가지 요인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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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위기 상태의 인정,
(2) 무인인가 해야 한다는 개인적 책임의 수용,
(3) 울타리 세우기.
(4) 다른 사람과 지원 단체의 물질적이고 정서적인 지원
(5) 문제 해결 방법의 본보기로 삼을 만한 다른 사람의 사례
(6) 자아강도(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고 독립된 자아로서 존재함)
(7) 정직한 자기평가
(8) 과거에 경험한 위기
(9) 인내
(10) 유연한 성격
(11) 개인적 핵심 가치
(12) 개인적 제약으로부터 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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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이 기준틀을 국가적 차원에 맞게 변형하여 적용한다. 첫 번째는 국가가 위기에 빠졌다는 국민적 합의이다. 이는 국민이 그 위기를 위기로 받아들이냐 받아들이지 않느냐의 문제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국가적 책임의 수용이다. 국가가 위기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리더들의 적극성, 그리고 책임감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울타리 세우기이다. 해결해야 할 국가적 문제를 규정하기 위한 조건이며, 그 문제가 어떤 대외적인 환경 속에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네 번째는 다른 국가의 물질적이고 경제적인 지원이다. 다섯 번째는 문제 해결 방법의 본보기로 삼을 다른 국가의 사례를 찾는 일이다. 여섯 번째는 국가의 정체성의 정도가 구체적으로 만들어졌는지, 아니면 추상적인지 확인하는 것이다. 일곱 번째는 국가가 자신의 위치에 대해 정직하게 자기평가를 내릴 수 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여덟 번째는 역사적으로 과거에 경험한 국가 위기를 통해 교훈을 도출하여 현재의 위기를 해결하는 것이다. 아홉 번째는 국가가 실패에 대처하는 방법은 다양하다는 것이다. 열 번째는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응하는 국가의 능력이며, 열한 번째는 국가가 중요하게 여기는 핵심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답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지정학적 제약으로부터 해방이다. 국가는 지리적 위치와 국부 및 군사력, 정치력의 차이로 선택의 자유에서 제약을 받는다. 지정학적 제약은 약소국, 그리고 중견국가가 쉽게 빠져나올 수 없다는 한계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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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가가 위기에 빠졌다는 국민적 합의
(2)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국가적 책임의 수용
(3) 울타리 세우기, 해결해야 할 국가적 문제를 규정하기 위한 조건
(4) 다른 국가의 물질적이고 경제적인 지원
(5) 문제 해결 방법의 본보기로 삼을 만한 다른 국가의 사례
(6) 국가 정체성 
(7) 국가의 위치에 대한 정직한 자기평가
(8) 역사적으로 과거에 경험한 국가 위기
(9) 국가의 실패에 대처하는 방법
(10)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응하는 국가의 능력 
(11) 국가의 핵심 가치
(12) 지정학적 제약으로부터의 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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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준거들을 통해 다이아몬드는 자신이 선별한 국가들이 어떻게 위기를 겪었고, 그 위기를 극복했는지를 설명해준다. 그 국가는 외부적 요인으로 갑작스런 변화를 맞이한 핀란드와 일본, 내부적 갈등으로 위기에 처한 칠레와 인도네시아, 그리고 점진적으로 확대된 위기에 시달린 독일과 오스트레일리아이다. 과거 국가의 영광, 몰락 그리고 극복 과정을 보여주고 난 뒤, 저자는 현재진행형인 위기에 대해 논평한다. 지금 일본은 국가부채가 너무 많고, 여성 혐오가 만연하며, 저출산으로 인해 인구가 점차 붕괴하고 있다. 저자는 일본이 해외 자원 장악 욕심이 과하고, 과거 식민지배 시절을 인정하지 않고 도리어 피해자로 생각하며, 엄격한 자기평가가 부족하다고 말한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일본은 점진적으로 다가오는 국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덧붙인다. 저자의 조국은 어떤가? 다이아몬드는 현재 미국의 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있다고 말한다. 미국에서 정치적 타협은 갈수록 불가능한 일이 됐고, 복잡한 유권자 등록 시스템으로 인해 미국의 투표율은 전 세계 민주국가 중에서도 항상 최하위권을 달리고 있다. 경제적으로도 불평등이 심화하고 사회경제적 차원에서 신분 이동이 불가능해지면서 폭동이 발생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미국이 이 문제를 애써 무시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미국이 유럽, 아시아 등과는 다르다는 “미국 예외주의”로 인한 자부심이 팽배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미래에 닥칠 위기인 ‘핵무기, 기후 변화, 자원 고갈, 부의 불평등문제’를 언급하며 12가지 기준에 따라 이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위기는 먼 미래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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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은 와중에 대한민국은 분명한 위기에 마주했다. 일본과의 갈등의 골은 갈수록 깊어졌다. 일본은 자국의 안전 보장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첨단 기술과 전자 부품을 수출할 때 허가 신청을 면제하는 국가를 ‘백색국가’로 지정한다. 일본은 이렇게 지정된 국가를 안보 우방 국가로 생각한다. 하지만 일본은 이 백색국가 리스트에서 한국을 제외함으로써 실질적으로 한국을 안보 위협 국가로 규정했다. 또한 우리나라에 일부 소재 물품 수출을 규제하여 한일간 무역 분쟁이 가시화되었다. 이러한 일본의 조치로 대한민국 내부에선 일본 불매운동을 통해 NO 재팬 운동을 펼치고 있으며, 文정부과 여당은 극일 의지를 다졌다. 하지만 문제는 일본에서 끝나지 않는다. 북미간 판문점 회동 이후 뚜렷한 북미 접촉은 이뤄지지 않고 있으며 북한은 연일 단거리 미사일을 발사하여 대한민국의 안보를 위협하고 있다. 러시아는 중국과의 군사훈련을 명분으로 독도 영공을 침범하기도 했다. 대한민국의 내부 문제인 이념 갈등, 성별갈등, 제노포비아, 청년실업 등도 마찬가지로 위협적이다. 하지만 난 대한민국이 처한 외부적 위협을 다이아몬드가 제시한 12가지 기준 틀을 통해서 바라보고자 한다. 대한민국은 현재 처한 위기를 제대로 직시하고 있는가? 지금 채택한 방법은 그 위기를 해결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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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민은 현재 처해진 위기에 대해 대체로 국민적 합의가 이뤄진 편이다.(요인1) 그 원인이나 방법에는 차이가 있을지언정, 국민들은 일본에 대해서 불매운동을 펼치고, 북한과의 평화를 바라며 한반도의 안보 위협이 해소되기를 희망한다. 또한 대한민국은 단일민족국가이고 독자적인 언어인 한글을 갖고 있어서 국가 정체성이 상당히 강하다(요인6). 그리고 식민지배, 6.25 전쟁과 같이 대한민국은 거대하고, 완전하며, 그 후유증이 여전히 남아있는 위기를 겪었다(요인8). 하지만 그 외엔 우리나라에게 적용될 만한 기준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앞서 이야기한 기준틀마저 독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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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대한민국은 지정학적 제약(요인12)으로부터 해방되지 못했다. 반도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분단이란 현실로 인해 육로를 통한 대륙 진출은 불가능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주변의 강대국(미국, 러시아, 일본, 중국)은 대한민국의 동아시아에서 국제적 입지를 축소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경쟁은 남중국해를 넘어서 인도양으로 확장했다. 두 국가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대한민국은 그 패권경쟁에 의도치 않게 휘말릴 수 있다. 따라서 대한민국은 동아시아의 지정학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대한민국의 국제적 자율권은 강대국들에 의해 제약당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는 정직한 자기평가(요인 7)가 절실히 부족하다. 첫 단추가 잘못 끼워져 대한민국은 울타리 세우기(요인 3), 상황에 유연하게 대응하는 국가의 능력(요인 10), 국가의 핵심가치(요인 11), 다른 국가의 물질적이고 경제적인 지원(요인 4) 국가적 책임의 수용(요인 3) 등 전반에 대해 오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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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동맹은 미일 동맹과 대등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 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미국은 한국보다 일본을 더욱 중요한 동맹국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게 내 입장이다. 현재 미국이 중국의 일대일로에 대항해 추진하는 ‘인도-태평양 전략’은 모두 아베의 작품이다. 2006년 1차 아베 내각은 미국-일본-호주-필리핀-인도를 통해 중국을 포위한다는 ‘자유와 번영의 호’ 전략을 제시했다. 이 전략은 훗날 제2차 아베내각이 2015년에 제시하게 된 ‘인도-태평양 전략’의 초석이었다. 아베는 2017년 미일 정상회담에서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 전략’을 트럼트 대통령에게 소개했고 그는 이 전략을 이후 미국의 전략으로 채택하게 되었다. 인도-태평양 전략은 미국-일본-인도-호주가 협력하여 중국의 급격한 부상을 견제하는 전략이다. 미국은  2017년 발표한 『National Security Strategy』(국가안보전략)에서 미국의 주적을 북한과 러시아 그리고 중국으로 규정했다. 중국의 급격한 부상은 미국에 위협이 되었으며, 미국은 ‘인도-태평양 전략’을 통해 효과적으로 ‘대중국 포위망’을 구축하고자 한다. 최근 미 국방부가 발간한 『Indo-Pacific Strategy Report』를 보면 대만을 국가로 인정했다. 이는 미국이 중국과 국교를 수립할 때 맺은 ‘하나의 중국(대만의 독립 부정)’ 원칙을 폐기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중국을 보편적 국제질서를 파괴하는 현상타파국가로 지목했다. 즉 차후 미국이 주된 위협국가는 북한이 아니다. 중국이다. 『Indo-Pacific Strategy Report』는 일본을 ‘인도-태평양 지역 평화와 번영의 초석(cornerstone)’으로 규정하고 일본이 미국의 입장에 대부분 동의한다고 말한다. 반면 한국에 대해선 ‘평화와 번영의 핵심국(linchpin)’이라고 언급할 뿐 미국의 입장을 따른다는 말도, 인도-태평양 범주에 함께한다는 언급은 없다. 이는 한국과 일본을 바라보는 미국의 입장 차이를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다. 현재 일본은 미국 최고의 동맹국인 기밀정보 동맹 ‘Five Eyes’와의 관계 강화를 추진하고 있다. ‘Five Eyes’는 미국, 영국,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등 영어를 사용하고 같은 문명권을 공유하는 국가들이다. 영어를 사용하지도, 같은 문화, 문명을 공유하지 않는 일본이 그들과 협력을 추진한다는 사실은 미일의 공조는 그 어느 때보다 더 단단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베가 미일 동맹을 NATO(북대서양조약기구) 수준으로 비유한 건 과장이라 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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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평화헌법을 수정하여 전쟁 가능한 국가로 나아가고자 한다. 대한민국은 일본의 행보를 군국주의의 부활이라고 비판한다. 하지만 일본의 변화를 누구보다도 환영하는 국가는 미국이다. 미국은 일본을 전쟁 가능한 국가로 만들어 자국의 군사적 행보에 동참하는 것을 항상 요구해왔다. 세계적인 정치학자이자, 국제정치 전문가이며 클린턴 정부 시절 국방부 국제안보를 담당했던, ‘소프트파워’로 유명한 조셉 나이는 “The Us-Japan Alliance Report”를 통해서 동맹 협력을 제약하는 일본 헌법 수정, 그리고 일본 군대의 해외 배치 허가 법안 등을 마련할 것을 권고했다. 하지만 일본은 지극히 최근까지도 GDP 대비 국방비 지출을 1% 미만으로 유지해왔다. 반면 우리나라는 3% 이상을 유지해왔다. 절대적 비용으로 비교해보면 분명 일본의 국방비 지출은 우리나라보다 많다. 하지만 GDP 대비 국방비 지출 비중이 보여주는 것은 그 국가가 ‘국가 안보에 얼마나 적극적이고 관심을 두고 있느냐?’이다. 미국의 GDP는 19조 3천억 달러에 달하고 국방비 또한 7천억 달러로 GDP에 3%를 차지한다. 미국은 세계금융위기 당시 GDP는 전반적으로 감소했다. 하지만 국방비는 유지하여 그 비중이 GDP에 4~5%를 차지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와 미국에 반해 일본은 국가 안보 자체를 미국에게 의존하고 그 비용 전반을 경제 성장에 투자하고 있다. 따라서 일본이 군국주의 추구한다는 해석은 다소 현실과 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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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중국과의 패권경쟁에 대비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은 자국이 지금까지 부담했던 안보비용을 줄이고 온전히 중국에 집중하고 싶어 한다. 이 때문에 미국은 일본과 한국뿐 만이 아니라 EU에게도 방위비 분담금과 국방비 증액을 요구하고 있다. 이 상황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다. 1950년대 미국과 소련 사이의 냉전이 짙어지자, 유럽대륙에서는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열전에 대한 우려가 번졌다. 미국은 사회주의 세력에 대항할 최초의 방어선인 서독의 재무장이 필요했고 이를 추진했다. 프랑스, 영국 등의 반발에도 서독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10년도 되지 않은 채 독자적인 군사력을 갖췄다. 당시 독일의 총리였던 아데나워는 재무장에 대한 국내 반대여론이 과반을 넘어선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가 끝내 재무장을 실현한 목적은 주권을 회복하여 독일을 정상국가로 만들고자 함에 있었다. 미 부르킹스연구소의 선임연구위원이며, 미국 외교정책에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로버트 케이건’은 미국과 유럽의 역할 차이를 곰과 사냥꾼에 비유한다. 사냥꾼이 칼을 들고 곰을 마주치게 된다면, 사냥꾼은 곰에 대항하는 것이 더 위험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곰이 그냥 지나치기를 바란다. 하지만 사냥꾼이 총을 들고 있다면 곰을 죽여 위협 요인을 제거하고자 한다. 즉 힘을 가진 자는 위협요인을 제거하고자 하며, 근거 없이 평화를 바라는 것은 단지 힘이 없기 때문이다. 충분한 군사력을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평화를 바라는 것은 허황된 꿈이다. 케이건은 충분한 군사력 없이 낙원을 만들고자 하는 유럽의 행태를 이상주의라고 비난하고 그 낙원은 오로지 미국의 힘 덕에 마련된 것이라 주장한 바 있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일본은 자국의 안보를 미국에 의존하여 평화를 유지해왔다. 하지만 시대는 바뀌었고 미국은 일본이 전쟁할 수 있는 국가가 되어 국제적 평화를 위해 적극적인 군사행동을 취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아베는 미국의 입장을 전격 수용하여 평화헌법을 수정하려 하는 것이다. 이것이 국제정세가 돌아가고 있는 방향이다. 만약 무작정 일본의 군사화를 반대한다면 그것은 미국의 국가이익에 상치(相馳)한다는 것을 뜻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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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우리나라는 마치 한미 동맹이 미일 동맹보다 중요한 것처럼 간주한다. 북미간 정상회담이 진행되면서 국내 언론들은 일본이 그 대화에서 끼어들지 못하는 이른바 ‘일본 패싱’을 인용한다. 하지만 미국의 주된 위협국이 중국을 향해 있다는 점에서 북미간에 대화는 이를 위한 사전 작업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북한이 친미화하는데 성공한다면 중국의 영향력을 그만큼 축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 당장 일본이 북한과의 협상에서 패싱당하고 있다 하더라도 장기적으로 중국과의 대립구도는 명확해질 것이기 때문에 일본의 전략적 가치는 상승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미국에게 충분히 매력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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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핵심가치는 무엇인가? 우리는 시장자본주의를 채택하고 정치체제는 민주주의를 따른다. 우리의 가치는 미국 중심의 자유주의 질서에 부합한다. 하지만 정작 미국이 주도하는 ‘인도-태평양 전략’에 한국의 중요성은 크지 않은 듯하다. 이 전략의 중요한 축은 ‘민주주의 안보 다이아몬드’이다. 이것은 미국과 일본, 인도, 호주가 다이아몬드 형태의 협력 구도를 구축하여 중국을 견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네 국가를 선으로 잇는다면 다이아몬드 형태가 만들어지기 때문에 ‘민주주의 안보 다이아몬드’라고 명명되었다. 이 동맹은 민주주의 시스템을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가치동맹이다. 하지만 정작 대한민국은 제외되었다. 애초에 일본은 이 전략을 제시할 때 우리나라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고려하지 않았다. 미국은 우리나라에 ‘인도-태평양 전략’에 참여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현 정부는 중국의 패권전략인 일대일로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정작 ‘인도-태평양’ 참여에는 소극적이다. 또한 일본의 무역보복에 우리나라는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폐기를 꺼냈다. 이 카드는 미국의 개입을 유도하기 위한 전략적 접근이었겠지만, GSOMIA는 미국이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는 데 필요한 한미일간 주요 안보 채널이다. 이를 폐기하겠다는 것은 명백히 미국의 국가이익에 반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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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정경두 굮방부 장관과 미국의 에스퍼 미국 국방부 장관이 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에서 에스퍼 장관은 ‘인도-태평양’ 지역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GSOMIA의 유지를 희망했다. 확인이 필요하지만, 일본 마이니치 신문은 미국이 징용문제가 끝났다는 일본의 입장을 지지한다는 의향을 일본 정부에 전달했다고 보도했다. 이 보도가 사실이라면 한국이 꺼내든 카드는 미국의 협력을 끌어내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나라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임에도 섣불리 친중 노선을 취했고(요인11), 해결해야 할 국가의 문제가 어떤 대외 환경에 속해있는지 오판하여 울타리를 잘못(요인 3) 세웠다. 미국의 지원도 불명확(요인 4)하며, 우리가 지정학적 조건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정확히 평가(요인 7)내리지 못했다. 또한, 현 정부는 불매운동과 반일 정책 외에 다른 뾰족한 수(요인 10)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일본의 반도체 기술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때마침 나의 아버지가 반도체 관련 사업을 20년 넘게 유지하고 계신다. 덕분에 일본 반도체 기술을 간접적으로나마 알게 되었다. 한국제 반도체의 가격은 일본의 대략 1/10밖에 되지 않는다. 이렇게 싼 가격을 갖추고 있음에도 아버지의 기기에선 국산화 반도체를 찾기 어렵다. 그 이유는 국산 제품을 도저히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본의 반도체는 엄밀한 검증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고장도 잘 나지 않고, 그 수명 또한 길다. 반면 국산 제품은 고장 나기 쉽고 수명도 짧아 사용할 수 없다. 반도체 부품이 한 개라도 망가진다면 전자 기기는 정상적으로 기능할 수 없다. 따라서 부품 하나를 고를 때도 신중해야 한다. 상황이 이러한데 국산화 생산을 강화한다고? 그 기술력의 격차를 단기간에 따라잡을 수 있을까? 가능했다면 왜 지금껏 하지 않고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에서야 시작한단 말인가? 일제를 사용하면서 동시에 국산 제품의 품질을 개량하면 다른 중소기업에 피해를 주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소 잃고 외양간 고쳐봐야 피해를 보는 것은 국민이다. 시간은 충분했고, 우린 그 시간 동안 나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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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역사적으로 무수한 국가 위기를 겪었다. 일본에 의해 식민지화되었고, 6·25전쟁으로 분단의 비극을 겪었다. 하지만 우린 이 위기로부터 무언가 교훈을 얻었는가(요인8)? 우리는 여전히 피해자임을 자처하며, 도덕적 정당성 문제에만 빠져있는 것 같다. 국제관계는 도덕의 영향력이 지극히 미비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우린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국가적 책임을 수용(요인2)해야 한다. 우린 이 교훈을 『대변동』에서 핀란드의 예시(요인 5)를 통해 배울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핀란드는 자국의 영토를 침범하는 소련에 대항해 항전을 벌였다. 이 전쟁에서 핀란드의 사망자는 거의 10만에 달한다. 이는 당시 핀란드 총인구 370만 명의 2.5%였고, 남성의 5%였다. 거기에 핀란드는 전 영토 1/10을 소련에 양도했다. 거기에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핀란드는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서 독일과 함께 소련을 공격했다. 이 일은 후에 연합군에 의해서 문제시되었고, 졸지에 핀란드는 전범국이 되었다. 소련의 사회주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핀란드는 독립을 유지할 수 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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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는 소련에 의해 막대한 피해를 보았다. 그런데도 그들은 소련의 걱정과 예민한 심기를 다독거리기 위해 다른 민주국가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조치를 취했다. 전시의 지도자들을 전범 재판에 회부하고 징역형을 구형했다. 또한 긴급조치법을 통해서 대통령 선거를 연기했고, 언론을 통제했다. 이러한 조치들은 핀란드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함이었지만 서방 국가들은 핀란드의 사정을 몰랐다. 그들은 핀란드의 정책이 자주적인 자유를 포기한 개탄스러운 상황이라고 말하며 ‘핀란드화’라는 경멸적인 딱지를 붙였다. 하지만 이 오명은 핀란드에 대한 오해이다. 핀란드는 조국의 독립이란 핵심 가치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희생했으며, 이웃한 소련의 위협에 항상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민주주의란 명분보다 국가의 독립이란 실리를 추구해 독립을 유지했다. 소련의 영향권 아래에서 이토록 독립을 유지한 국가는 극히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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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의 침략으로 많은 국민이 죽었고 과부나 고아가 되었다. 그럼에도 핀란드의 재평가는 가혹할 정도로 냉혹했다. 자신이 약소국인 것을 깨달았고, 소련에 영원히 저항할 수 없다는 현실을 알았다. 그들은 경제적 독립과 표현의 자유를 조금 희생하더라도 소련의 신뢰를 얻기 위해 모욕을 감수했다. 우리는 어떤가? 일본과의 과거사 문제는 현재진행형이다. 일본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고, 독도를 자기네 영토라고 주장하며, 위안부 그리고 강제징용에 대해 부인하는 발언을 일삼았다. 감정적으로 나오기 쉬운 상황이다. 이로 인해 현 정권은 일본보다 북한과의 평화협력을 통해 우리나라를 발전시키고자 하는 것 같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세계 최하위 국가인 북한과 협력해봤자 세계 GDP 3위인 일본을 잡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리다. 그리고 북한과의 협력이 성공적으로 진행될 수 있는지도 미지수다. 분명 북미 정상회담이 이뤄지는 등, 북한과 전례없는 관계 개선이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전례가 없었을 뿐이지, 다시 갈등 관계로 회귀할 수 없을 거라는 확신은 그 어디에도 없다. 변수는 충분하다. 우리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여러 가지 옵션을 마련해 둘 필요가 있다. 그 옵션은 한미일간의 공조에 있다. 하지만 일본과의 관계 악화는 그 옵션을 선택 가능한 대상으로 만들지 않는다. 그리고 그 갈등에서 미국은 일본을 택할 것이다. 우리는 외교적 고립에 놓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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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해서 중국은 정답이 아니다. 중국은 러시아, 홍콩, 대만, 인도 등 국경과 인접해 있는 국가 및 준 국가들과 국경분쟁을 벌이고 있다. 중국의 급격한 성장과 팽창은 주변국들에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다. 그런 와중에 중국과 경제협력보다 더 포괄적인 협력을 취한다? 이를 미국이 반길 것으로 생각하는가? 중국과 패권경쟁을 벌여야 할 미국이? 미국이 없는 대한민국은 자유로운 무법지대이다. 미국의 도움 없이 북핵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으며, 중국은 그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도 않을 것이다. 우린 더 상상할 수 없는 위기에 빠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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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일본 사이의 힘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압도적이지 않다. 따라서 일본 입장에 전적으로 동의할 필요는 전혀 없다. 다만 일본과의 관계 악화는 전혀 대한민국에 이롭지 않다는 것이다. 우린 과거사에 얽매여 일본을 동맹국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과거에 얽매인다면 우린 미래로 나아갈 수도 없다. 상황은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다. 박근혜 정부 당시 이뤄진 위안부 합의를 현 정부가 성급히 폐기한 것은 오판이었다. 분명히 졸속히 체결된 합의이고 피해자인 위안부 할머니들의 입장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국가 대 국가 맺은 합의였기 때문에, 그 합의를 체결한 우리에게도 일차적인 책임이 있다. 하지만 이 합의를 일방적으로 폐기 처분하여 없었던 일로 만든 것은 그 책임을 모조리 일본에 전가하겠다는 명분에 사로잡힌 그릇된 판단이었다. 국제관계는 명분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실질적인 국가이익이다. 이 당연한 명제를 반일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가? 우린 대체 반일을 통해서 어떤 국가이익을 얻겠다는 것인가? 일본이 항복하면 그것이 정녕 우리에게 이익이 될 수 있는가? 부디 이 상황을 포퓰리즘으로 이용하여 정권 유지를 위한 수단이 되지 않았으면 한다. 현 국제지형은 생각보다 우리에게 불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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