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의 정치 강의 - 사유하고 판단하지 않는 시민에게 정치적 자유는 없다!
이진우 지음 / 휴머니스트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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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사서 읽게 된 이유는 방학 기간 동안 공부할 한나 아렌트 철학을 상기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니체 전문가이자 한나 아렌트의 초기 저작인 「전체주의의 기원」, 「인간의 조건」을 번역한 이진우 교수님이 바라보는 아렌트를 들여다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난 철학자 중에선 니체와 한나 아렌트에 특히 관심을 갖고 있다. 군 생활 시절 니체의 대표 저서들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선악의 저편」 「안티 크리스트」 「도덕의 계보학」 등을 읽었다. 그리고 아렌트의 저서는 시중에 나와있는 대부분을 읽었다. 「인간의 조건」 「전체주의의 기원」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공화국의 위기」 「혁명론」이 그것이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이진우 교수님의 주된 분야와 내가 관심을 갖는 철학자에는 니체와 아렌트가 있었다. 그 둘 사이에는 무슨 공통점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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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시야로 바라보면 니체와 아렌트의 철학에는 극명한 차이점이 있다. 일단 니체는 아렌트와 달리 정치 철학에 대해서 분명한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민주주의만큼은 비난했다. 민주주의란 자신들의 행위를 선함으로 포장하고, 나약하고 저급한 도덕 원칙인 ‘노예의 도덕’을 따르는 대중들에 의해 구성되는 정치체제이기 때문이다. 니체는 천민적 가치가 국가 경영에서 지배적 가치가 되면서 정치는 빠르게 천민화된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는 ‘위버맨쉬’ 즉 현재의 자신을 계속해서 넘어가고자 하는 ‘힘에의 의지’를 보유한 ‘초인’이 등장해야 한다고 말한다. 니체의 ‘위버맨쉬’ 개념은 생물학적 우월함을 말하는 것인지 정신적 우월함을 말하는 것인지 논란이 되었다. 때문에 니체 사후 그의 여동생인 엘리자베트는 그의 유고를 조작해 나치즘을 정당화하는 「권력의 의지」를 출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말한 초인은 우월하고, 현재의 도덕가치를 넘어선 새로운 도덕서판을 만들어내는 리더라는 점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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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시각에서 보면 니체와 아렌트는 접점을 찾아볼 수 없다. 니체의 사상은 전체주의를 옹호하는 이론적 기반이 되기도 했지만(물론 니체는 나치즘을 철저히 반대했다. 그는 반민족주의자였다.) 아렌트는 철저히 전체주의를 해석하고, 전체주의를 재발하지 않기 위한 방법을 찾았던 사상가였다. 하지만 그 니체와 아렌트 사이에는 명확한 공통점이 있다. 바로 진리를 배척했다는 것이다. 니체의 유명한 격언인 ‘신은 죽었다.’는 신이라고 의인화되는 절대적 진리가 19세기 허무주의와 함께 도태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니체는 이 허무주의를 극복하고 새로운 가치를 세우는 작업을 진행했지만 새로운 가치는 도덕적 진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것은 현실에 적용가능하고 주어진 것에 만족하지 않는 ‘힘에의 의지’를 지향하는 삶의 태도를 말한다. “도덕적 현상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현상에 대한 도덕적 해석만이 존재할 뿐이다.”라는 선악의 저편의 구절에서 보듯이 니체는 도덕이란 해석의 여지에 따라 변화할 수 있는 것, 사회적 가치관에 의해 부여되는 것이라 점, 그리고 그 행위의 주체는 ‘개인’이란 점을 명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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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는 나치즘의 폭력에서 탈출한 유대인이었다. 그 신분과 경험은 아렌트 사상의 뿌리가 되었다. 아렌트의 관심은 오롯이 전체주의를 이해하는 것에 있었다. 전체주의는 인간을 쓸모 없는 잉여물로 환원함으로써 그들의 법적, 도덕적 개별적 인격을 모조리 파괴한다. 아렌트는 사람들이 정치에 관심도 없고 정치적 활동이 벌어지는 ‘공적영역’이 이해관계에 잠식하게 될 때 전체주의적 경향이 나타난다고 「인간의 조건」에서 밝힌다. 그리고 아이히만의 재판에 참석하여 그가 철저하고 완벽한 공무원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명령에 복종할 줄만 알지 자신의 고유한 ‘판단’을 내리지 못한 그를 통해 아렌트는 이젠 너무나 대중화되어 진부해진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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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사유의 과정 속에서 아렌트는 정치영역의 회복을 요구한다.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개개인의 의견들이 보장되는 ‘공론 영역’에서 정치를 만들어낸다. 아렌트는 정치를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가장 자유로운 행위라고 말한다. 이 자유로움 속에서 정치권력은 폭력과는 거리가 먼, 집단적 힘이라고 명시한다. 즉 권력이란 개인들이 모여 서로 협력할 수 있게 만드는 공공의 힘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힘, 그것이 바로 정치이다. 아렌트는 정치는 진리의 영역이 아니라 의견의 영역이다”라고 말을 함으로써 정치에서의 절대성을 부정한다. 진리는 비정치적이다. 진리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이야기할 뿐 바뀔 수 있는 현실에 관해서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니체는 개인의 의지를 통해서 도덕적 진리를 파괴했다면, 아렌트는 정치적 공동체, 공화주의를 통해서 정치 내부에 잠식한 진리를 걷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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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민주주의를 노예의 정치라고 말하며 혐오한다. 그가 꿈꾼 이상사회는 귀족의 도덕, 즉 발전을 위해 나아가고 힘의 의지를 갖춘 귀족적 인간이 중심이 되는 정치이다. 하지만 아렌트는 시민을 믿고 있다. 아렌트는 지배자의 등장이 시민들의 자유로운 행위를 상실시킨다고 말한다. 그는 진정한 자유란 정치적 평등이 이뤄진 상태에서 지배자와 피지배자를 구분하지 않는 비지배 자유가 실현된 상태라고 말한다. 하지만 인간이 어떻게 복잡하고 변화하는 현실 속에서 정치적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가? 혹은 그것이 옳은 방향이라고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아렌트의 지적 여정은 마침내 정치적 판단 문제에 도달했다. 하지만 이 문제를 다루고자 한 「정신의 삶」은 1부 사유, 2부 의지만을 완성하고 3부 판단을 쓰지 못한 채로 아렌트는 생을 마감한다. 그가 말하고자 한 정치적 판단은 도대체 무엇인가? 판단은 어떻게 현대사회에 남아있는 전체주의적 경향을 배격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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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는 판단의 해답을 칸트의 「판단력 비판」에서 찾는다. 흔히 알고 있듯이 「판단력 비판」은 취미판단의 일종으로서 미학의 기반이 되었다. 아렌트는 정치가 아름다움과 추함을 판단하는 예술과 다를 바가 없는 것으로 바라본다. 아름다운 것은 아무런 이유 없이 우리의 마음에 든다. 가령 특정한 장미가 마음에 들 때 우리는 아름답다고 판단할 뿐이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정치에는 객관적인 기준과 규칙이 존재하지 않는다. 때문에 시민은 정치 사건에 대해 나름대로 규칙을 만들어내면서 동시에 판단한다. 때문에 기초적인 정치 판단은 장미를 보고 아름다움을 느끼는 취미 판단과 별로 다를 바 없다. 실제로 우리는 쉽게 정치인의 언행과 이미지 만으로 호감이 가는지 혐오감이 이는지를 판단하지 않는가? 하지만 아렌트는 이런 일차적인 정치판단에서 벗어나 구체적인 현실에서 개별적인 사건을 판단하고 방향을 제시해주는 정치적 ‘판단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여기서 정치의 필수 조건은 다원성에 기초한 ‘공평성’이다. 공론 영역에서 다양한 행위자가 모이는 다원성이 보장된 상황에서, 서로를 의지하고 자신의 생각을 공개하는 과정이 바로 ‘공평성’이다. 아렌트는 판단력이 가능할 수 있는 조건이 다양한 인간들이 어울리는 사교에 있음을 강조하며, 공개적인 소통이 이뤄지는 정치가 판단력이 기능할 수 있는 조건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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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에서 진리가 작동하게 되며 인간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자유를 포기할 수 밖에 없다. 그 진리를 정해준 자는 폭력을 지닌 자이며 그들의 총구는 사람들의 머리를 향해있기 때문이다. 진리가 강조될 때 전체주의의 싹이 자라난다. 아렌트는 인간의 사유능력에 희망을 갖고 자유로운 의사소통이 생각할 수 있는 자유를 가능하게 한다고 말한다. 생각한다는 것은 공동체에 참여하기 위한 것이다. 니체와 아렌트는 방향은 달랐지만 그들이 전복하고자 한 것은 공통의 진리이다. 아렌트는 진리를 정치영역에서 배제시킴으로써 전체주의의 싹을 자르고자 했다. 그 사상의 조류는 정치 영역의 회복으로 촛불 혁명이란 실천적 행위로 빚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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